국가의 의무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이다. 전쟁은 발발하면 국가의 흥과 망은 물론, 개인의 생과 사를 극단적으로 가르는 행위이기에, 전시에는 군인의 무소불위가 용인되기도 했다. 군인이 작전상 후방 주민을 통제할 때, 적의 프락치나 제5열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에 자칫,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을 함부로 행하는 경우도많았다. 하지만, 이는절대 금물이다. 굳이, 애국애족을 네세우지 않더라도, 영어에서 군인을 'Military Servceman'으로 부르듯이, 군인은 국민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service')하는 직업이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숱한 왕조시대는 초기에는 민생을 표방하다가, 안정기를 지나 혼돈기에 이르면 ‘무력에 의한 군림’이라는 통치 방식을 이어갔다. 혹, 민란이라도 일어나면 토벌군은 점령지를 수탈하였고, 거주민에 대한 억압과 횡포가 이어졌다. 오랜 전란에 지친 백성들은 가장 거대한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뿔뿔이 흩어져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관의 무자비한 폭력과 착취, 수탈에도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다. 국민당을 내세운 ‘장제스(將介石)’ 군대도 그런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 역시 한번 공산당이 점령하였던 지역에는 피비린내 나는 보복을 가했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통치수단이 야비했고, 잔인했다. 결국, 민심을 잃었다.
1921년 창설된 중국공산당은 맨 먼저 ‘중국 인민’의 이익을 표방했다. 비록, 1918년의 러시아의 ‘노동자‧농민’ 계급에 의한 공산주의 혁명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전제 군주제였던 청조(淸朝)의 멸망으로부터 불과 10년도 안 된 시점에서, 당시 중국에서 가장 무기력한 무산 계층(프롤레타리아)인 ‘인민’을 위해, ‘잘사는 삶(샤오깡)’과 ‘평등’을 내세웠던 것은 과히, 혁명적인 ‘사고의 변화’였다. 그리고 이런 이념적 변화는 집권층의 무기력과 악습에 의해 더욱더 빠르게 민중들에게 확산하였다. 특히, ‘마오쩌둥’은 “인민은 물이고, 군대는 물고기”라고 강조했다. 물을 떠난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현지민의 지지없이 어떤 군대든 승리할 수 없다. ‘민심이 곧 천심’으로,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도(道)의 근본은 민심이었다. 그는 승리의 요체를 알고 있었다.
‘마오’는 한때 군세가 약하여 중국 대륙을 가로지르는 ‘장정(長征, 1934~1935년)’으로 ‘장제스’군에게 쫓겨 1만 여리를 도주하였다. 그는 한없이 쫓기는 동안에도 당권을 장악하고, 지나치는 지역의 민심을 얻는 데 치중했다. 기본적으로 농민 출신인 ‘마오쩌둥’의 ‘홍군’은 자체적으로 사상적 무장을 강화하며, 끼니조차 거르면서도 민중에 대한 일체의 약탈을 금지하였다. 이른바, ‘물고기(군대)가 물(인민)을 떠나 생존할 수 없다’는 민군 일체의식이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주민 신세를 지는 경우에는, 반드시 중공군이 발행한 ‘전표’를 주고, “혁명이 완성되면 몇 갑절 되갚겠다”며 다짐하였다. 도둑질은 아니라는 거다. 인민해방군이 내건, ‘3대 기율, 8항 주의(主意)’라는 행동요령을 부대운영지침으로 엄격히 준수한 중공군은, 관료나 지주로부터 천대받았던 일반 중국 인민으로부터 열렬한 지지와 칭송을 받았고, 이는 마침내 ‘마오’의 강력한 지지기반이 되었다.
이처럼, 민군 관계에서도, ‘상대 읽기’가 중요하다. 1950년 10월 25일 불법 입경하여 북진하던 미군과 유엔군을 기습했던, “항미원조” 지원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마오쩌둥(毛澤東)’으로부터 “…조선의 일초일목(一草一木), 일산일수(一山一水)를 소중히 여기고 보호하라”며, 설령, 미군으로부터 큰 피해를 입더라도 “조선의 엄격한 미풍양속을 존중하라”고 지시하는 전문을 받았다. ‘마오’가 무슨 조선 민족의 정서를 고려했다기보다, 오랜 전쟁경험에서 민중의 지원을 얻기 위해 우러나온 전략적 지시였을 것이다.
‘마오’의 지시에 따라, 중공군 지도부는 ‘항미원조’ 입대자들이 조선에 입경하기 전, 애국주의, 혁명 영웅주의 교육으로 그들의 열정과 사명감을 북돋우는 한편, 조선 민중에 대한 정치공작을 강조하고, ‘마오’가 1928년 이래 강조하여 온 ‘3대 기율, 8항 주의(主意)’를 교육시켰다. 1951년 1월 25일, ‘펑더화이’는 중조 양군 간부회의에서 이를 다시 강조하였고, 중공군 제2 부사령관 ‘훙쉐즈’는 간부들에게 “전쟁 이후 조선 민중이 우리를 혐오하지 않도록, 우리 병사들에게 정치교육에 힘쓸 것을 당부한다. 병사들에게 ‘아랫도리’ 조심하고, 대소변 아무 데나 하지 말고, 침 함부로 뱉지 말라는 것부터 가르쳐라”고 강조했다. 이는 일종의 작전수칙으로서, 현지 인민 존중, 학교, 문화 명승지 보호, 민가출입 금지, 교회나 사찰에 간섭 금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6‧25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같은 우리 군 인사에게, 중공군은 철천지원수였지만 한편으론 놀라운 상대였다.그는 비록, 적이었지만 이처럼 엄정한 중공군의 군기를 인정하였다. 무모하게 ‘인해(人海)전술’만 구사한다는 이미지는 잘못이라고 백선엽은 술회한다. "중공군은 교활하고 영리하면서 침착하기까지 한 강군(强軍)이었다." 백선엽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엄격한 군기(軍紀)였다. "중공군은 주민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은 가능한 한 민가에서 숙영(宿營)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머물더라도 깨끗이 정리하고 반드시 화장실까지 청소한 뒤 떠났다." (백선엽의 ‘6‧25 징비록’ 33화)
이에 비해, 원정군인 미군은 대민관계의 여러 면에서 다소 무지했다. 전혀 다른 문화권의 전쟁에서, 낯선 땅에 전개된 그들을 맞이한 것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싸우는 군대와 열악한 인프라, 그리고 혹독한 무더위와 추위로 기후마저 악명이 높았던 전쟁터였다. 웬만한 사명감이 없는 징집병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어렵고 불리한 여건이어서일까? 승리에 목말랐던 미군은 목전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아무 곳에나 엄청난 항공, 포병 화력 사용을 마다하지 않았다. 덕분에 수많은 우리 문화유산도 부서지고 불탔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이, 점령한 세계적 문화유산이 가득한 프랑스 수도 ‘파리’를 철수하며 불태우려는 시도를 모면한 스토리를 소재로 제작한 영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Is Paris burnning?)‘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에서, 서구인은 현지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는데… 한국에서는 ‘문화재조차 전쟁 승리 뒤에 모두 복구하겠다’는 확신이 있었을까? 이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한다’며 펼쳤던 화력전은 일종의 ‘청야전술’로서, 어쩔 수 없었다지만... 엉뚱하게도 한국의 산야와 문화재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중공의 ‘마오쩌둥’ 주석이 “조선의 미풍양속을 존중하라!”는 지시를 내려서 일까? 휴전 이후, 북한에서는 전쟁 동안 조선의 풍습과 법규를 해친 중공군 요원들에 대한 처벌이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의 곡식이나 가축을 함부로 해치거나 부녀자를 겁탈한 경우였을 것이다. 그런데, 중공은 이런 범죄행위를 저지른 자국 군인을 보호하려 하지 않고, 이들에 대한 재판권 행사를 포기하여 공개적으로 북한 정권에게 이들을 처벌하도록 하였다. 이런 면에서 중공군은 우리 군이 참고할 부분이 많은 군대였다. 비록, 적이지만 지휘부부터 여성에 엄격하고, 주민을 돕고, 각종 문화행사를 함께하는 등 현지인 친화적으로 다가갔다. 이는 우리가 한미 동맹을 더욱 가치 있는 동맹으로 성장시키려면 반드시 주목할 부분이기도 하다.
중공군에 비해, 미군도 이들 못지않게 활발한 대민 지원 활동을 하였다. 심지어, 전차, 차량 등 각종 전쟁물자와 지원물자 외에도, 미공법 제 480조에 의한 미국내 잉여농산물 무상지원으로 헐벗고 굶주리는 한국인들을 구휼하였다. 하지만,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랄까? 일부 미군은 ‘성폭행’ 범죄나, 매춘 등 성범죄를 자행하며 점령군 행세를 하는 이도 많았다. 그렇지만,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으로, 이미 독일, 일본, 필리핀 등 패전국이나 점령국과 SOFA 협정을 맺어, '미국 우선주의'라며 자국민을 지켜왔기에, 한국에서도, 미군과 그 가족의 범죄행위에 대한 재판을 결코 주둔국 법정에 넘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후세인 정권을 전복시켰다. 처음에는 많은 이라크인이 미군을 환영하였으나, 몇 개월 후 분위기는 적대적으로 변했다. 일부 미군들의 성범죄와 민간인에 대한 고문 등이 민심을 자극했다. 한국전쟁 당시의 한국사회는 여인들의 정조 관념을 절대 시하는 것이 미풍양속이었다.
그런데, SOFA 협정이 무엇이길래,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에 따르라”는 말도 있고,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라는 말도 있는데, 미국 군인과 그 가족이라고 해서 “약소국의 법 따위는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졌을까? 미국이 한국안보에 기여한 공로는 크지만, 이런 류의 접근 방법이 그간의 모든 지원노력조차 가린다고 생각하는 견해도 많은 것 같다. 사실, 주한 미군의 법적 지위가 높았던 이유는 전쟁중인 1950년 7월 12일, 미군의 범죄에 대한 형사재판권을 미국에게 일방적 관할권을 인정 해준 탓이다. (대전 협정) 그런데, 이게 전쟁이후에도 계속되다가 2002년도 '효선, 미선' 두 중학생 사망사건을 계기로 비로소 실질적인 개선이 있었다.
필자는 우리의 안보현실로 인한 한미 동맹의 필요성에 무엇보다 공감한다. 다만, 동맹은 양국 국민에 대한 상호 존중의 정신이 그 기본이다. 그 때문에, 미군 주둔 반대론자들이, 미군들이 범한 여러가지 범죄에 우리가 잘못 대응한다며,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그 자체가 불평등 조약으로 SOFA의 모법(母法)인 ‘한미 상호방위조약’도 함께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대해, SOFA는 SOFA고 ‘상호방위조약’은 '상호방위조약이라고 말하고 싶다. 방위조약은 미군 주둔의 근거만을 제공하지, 주한 미군의 ‘지위’와 무관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