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남창(南昌) 봉기’를 계기로 창설된 중국 ‘공농혁명군’은 ‘홍군(인민해방군)’의 모태로서 말이 군인이지 대부분 평민으로 이루어진 잡병들로 엄청난 희생을 감내하며 혁명투쟁을 전개해 온 군대였다. 그야말로 지배 계층의 핍박에 시달리다 뛰쳐나온 농민 저항군들이었다. 그런데, 전사(戰史)를 보면 비록 상대방에 비해 무기체계나 군사력이 열세하더라도 상하동욕자승(上下同欲者勝)이랄까? 리더십과 단합된 정신력으로 승리를 쟁취한 사례가 많았다.
예컨대, 프랑스혁명 이후의 나폴레옹은 ‘용병 고용’으로 엄청난 전비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지만, 중세 프랑스의 농노출신 시민군에게 ‘애국’과 ‘시민’ 의식을 일깨워, 전문 직업군인 용병을 고용한 중세 봉건귀족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며 왕정체제를 붕괴시켰다. 무형의 애국심과 시민의식이 유형의 군사력을 압도한 사례였다.
1550년대 일본에서, 수백여 년간 지속된 전국시대에 ‘오다 노부나가’라는 작은 가문의 영주가 일본 통일의 단초를 마련하였다. 그가 강했던 것은 새로이 등장한 ‘조총’이라는 신무기도 있었지만, 무사에게 멸시받고 시달리던 ‘아시가루’라는 피지배 농민들에게 당시 지배 계층인 ‘무사’ 타도의 적개심을 고취시키고, 조총으로 잘 훈련시킨 덕분이었다.
사실, 싸움판에서 싸움 잘하는 사람은 태권도 등 무술 단련자보다, '헝그리 복서'랄까? 시장 바닥에서 잡배들과 싸우면서 ‘깡’을 배우고 잔뼈가 굵어진 ‘싸움꾼’이다. 싸움은 이론이나 훈련보다 온갖 상황하에서 그저 ‘절실한’ 마음으로 ‘싸우고, 깨지면서’ 습득한 실전경험이 가장 효과적이다. 중공군의 홍군 지휘관 대부분은 빈한한 농민 출신으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이럴 적부터 소년군에 참가하여 10~20여 년 이상 온갖 전쟁터를 누빈 노련한 인물들이 많았다.
예컨대, 중공군 ‘덩화’ 제1 부사령관이나 그를 도와 기동전인 제1~5차 공세를 계획하였던 중공군 사령부 작전참모 ‘청푸(成普)’도 그 위치에 비해 나이는 갓 30대 초반이었고, 1950년 10월 25일 최초로 국군 6사단을 기습 공격하여 심대한 타격을 가한 중공군 제40군 118사의 사(단)장 ‘덩웨(鄧岳)’도 당시 32세의 약관으로, 이미 12세 때부터 대장정에 참가한 소년군 출신이었다. 또, 중공군의 3차 공세에서 중앙청과 경무대를 점거하였던 제39군 116사의 사(단)장 ‘왕양(汪洋)도 30세였다.
이런 사례를 보듯 중공군은 비록 계급은 없었지만, 직책부여에 엄격한 기준을 두었다. 예컨대, 약 150여 명을 지휘하는 연(중대급)장은 해방전쟁 참여 경력은 물론 전투경험 수년 이상을 가져야 했고, 3,000여 명을 지휘하는 단(연대급)장은 항일 전쟁과 전투경험 10년 이상, 그리고 8,000~1만 명을 지휘하는 사(사단급)장이나, 2만~3만 명을 지휘하는 군(군단급)장은 홍군 시기부터 참가한 이들로 전투경험이 20년 이상이었다. 물론, 이 같은 직책임명 시, ‘꽌시’랄까? 언제, 어디서, 어느 지휘관과 얼마나 함께 전투하였는가? 도 중요했다.
참고로, 중공군 편제에서 최상위 제대는 야전군이고, 병단은 국군의 군사령부급으로서, 통상 병단은 5~6개의 군을 지휘하며, 15~25여만 병력이었다. 그리고, 우리 국군의 군단급에 해당하는 군은 예하에 3개 사를 두었다. 즉, 병단(군사령부), 군(군단), 사(사단), 단(연대), 영(대대), 연(중대), 배(소대)의 체제를 갖추었다. 이에 비해, 북한군의 사단은 1만여 명, 여단 6,000명, 연대 3,000여 명으로 중국군보다 병력이 약간 많았다.
당시, 우리 국군에도 백선엽 장군 등 30세 초반에 12,000여 명을 지휘하던 사단장들이 많이 있었지만, 이들은 대부분 정규과정을 거친 초급장교로 근무하다, 갑작스러운 전쟁으로 부대가 급팽창하자 고위직으로 승진한 경우가 많아 직책이나 나이는 중공군과 비슷해도 실제 군사경력은 이들에 비해 많이 짧을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 지휘관들은 전투 경험에 덧붙여, ‘마오쩌둥’이 전 홍군에 대한 전술적 지침이자, ‘작전지침’으로 20여 년간의 전투경험을 바탕으로 내놓은 ‘10대 군사원칙’을 숙지해야 하였다. (국공내전 중이던 1947년 12, 하달)
참고로, 그 내용은 대체로 아래와 같은데; 이는 당장 미군과 국군이 싸워야 할 그들의 전술이었다.
0. 먼저 분산되고 고립된 적을 치고, 후에 집중하고 강대한 적을 친다.
0. 적의 유생역량 소멸을 주요 목표로 삼고, 도시와 지방을 지키거나 탈취하는 걸 목표로 삼지 않는다.
0. 전투마다 절대 우세병력(상대의 3~5배)을 집중하여 사면으로 적을 포위하여 포위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특별한 경우, 병력을 적 정면이나 일익, 혹은 양익을 타격하여 일부섬멸, 일부 타격의 목적을 달성한 뒤, 병력을 신속히 전용하여 다른 적군 섬멸을 지원한다.
0. 득 보다 실이 많거나 득과 실이 비슷한 소모전은 극력 피해야 한다.
0. 준비 없는 싸움, 적을 알지 못하는 전투는 적극 피하고, 매 전투마다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고, 적의 조건대비 승리를 기하여야 한다.
0. 용감하게 싸우고,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단기간에 휴식하지 말고 연속해서 싸워야 한다.
이 같은 작전지침에 덧붙여, 중공군 지휘관은 ‘마오’의 부대운용 지침인 “3대 기율(紀律), 8항 주의(主意)”또한, 지휘철학으로 삼아야 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은데, 굉장히 엄격하게(?) 따라야 하는 지침이었다.
0. 3대 기율(紀律)’은, “모든 행동은 지휘에 따라야 하고, 인민으로부터 바늘 한 개, 실 한 줄이라도 탈취해서는 안 되며, 반동으로 처리한 지주로부터 노획한 물건은 모두 공적으로 사용한다”.
0. ‘8항 주의(主意)’는, “대화에는 온화함이 있어야 하고, 매매는 공평하게 하며, 빌린 물건은 갚아야 하고, 파손한 물건은 배상하며, 남을 때리거나 욕하지 않고, 농작물을 훼손시키지 않으며, 부녀자를 희롱하지 않고, 포로를 학대하지 않는다”.
이러한 '작전 지침'과 '부대운영 지침'은 '인민을 위한다'는 홍군에게 깊이 먹혀들었고, 그 지침에 충실하였다. 사례로, 홍군이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에게 쫓겨 다니던 ‘대장정’ 시절의 이야기다. 6개월 이상 굶주리던 홍군 몇 명이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 어느 빈집 헛간에서 감자 몇 개를 찾았다. 보고를 받은 분대장이 “이거라도 모두가 똑같이 나누어 먹자”라고 제의하자, 분대원들의 반응은 달랐다. “당신은 우리의 지휘자니 당신이 먹어라. 모두가 나누어 먹으면 모두가 죽지만, 당신이라도 살아남으면 살아남은 동료를 이끌 수 있지 않느냐?”…
홍군의 이런 모습은 향후 항일전쟁에서도 계속 발휘되었다. ‘국공합작’으로 ‘중일전쟁(1937~1945년)’간 일본군과 유격전, 정규전을 벌였다. 일찍이, 미국의 중국학자 ‘오웬 라티모어(중일 전쟁 간 중국 국민당 장제스의 정치고문)’는 “중공군은 일본군과의 작전을 통하여 단련되었다. 이에 비해, 국공내전 기간 중에는, 일본군과 싸우기를 꺼렸던 국민당 주력군은 일본군과의 작전에 적극적이던 중공군 주력군을 당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홍군은 일본 패망 후 ‘국공내전(1945~1948년)’에서 부패 무능한 ‘장제스’의 800만 군대와 500만 국민당 당원을 단시간 내 대륙에서 대만으로 축출한 전투경험 많고 잘 훈련된 군대로 불과 30여만 명에서 1949년 10월, 무려 550여만 명의 대군으로 성장하였고, ‘신 중국’ 건국의 원동력이 되었다. 변화의 중심에 있던 ‘홍군’은, ‘신 중국’의 ‘인민해방군’으로 개칭되었고, 그 일부이지만 '자원군' 형식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중공군은 이미, 홍군, 팔로군 시절을 겪어 온 전쟁 프로였다.
그런데, 이처럼, 비이성적, 비합리적인 상황을 이겨 온 풍부한 전투경험을 가진 지휘관 못지않게 전쟁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싸우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병들이었다. 오랫동안 ‘외세 트라우마’에 짓눌렸던 중국 인민들 가운데, ‘항미원조’와 ‘순망치한’을 내세우는 공산당 정부의 애국 홍보에 ‘조국을 지킨다’며 중공군에 자원입대한 젊은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성취한 ‘통일과 건국’으로 ‘가진 자‘들의 억압에서 해방된 ‘새로운 조국’이라는 열정을 가졌다. 이러한 열정으로 자원입대한 중공군 병사들은 제대로 된 보급도 없이 우세한 미군 등 유엔군과 수많은 전투를 치르는 동안 많은 희생 속에서도, 비교적 엄정한 군기를 유지했고, 미군에게 전술적인 승리를 거두어 만세군 칭호를 받은 부대도 있고, 개인적으로도 전투영웅(?)도 많이 생겨났다.
그렇지만, 이렇게 수많은 전투영웅(?) 중에서 중국 정부가 국가적으로 ‘특급 전투영웅’ 칭호를 부여한 경우는 단, 두 명으로 둘 다 국군과의 전투가 아닌 미군과의 전투에서 나왔다.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하던 미군과의 두 전투가 그만큼 각별했다는 뜻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들 2명은 6‧25 전쟁 초기인 1950년 12월 초, 장진호에서 폭약 5kg을 들고 미군 진지에 뛰어들었다는 ‘양건스(楊根思, 양근사)’와, 1952년 10월 20일, 상감령 전역(戰役)에서 몸으로 기관총 세례를 막았다는 ‘황지광(黃繼光, 황계광)’이다. 이들은 군의 신화가 되었다.
그러나, 중공은 많은 이들 젊은이의 열정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다. 제대로 된 보급지원조차 받지 못한 이들 지원병 상당수가 굶주렸고, 혹한으로 동상을 입거나, 부상당해도 의약품 부족으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였다. 한국전쟁 간 중공군의 인적 피해는 심각하였다. “목적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이라도 정당화된다”는 레닌의 ‘공산주의 신조’ 탓일까? 능력도 안 되는 국가가 지도자의 욕심과 헛된 판단으로 남의 전쟁에 끼어들어, 교묘하게 내세운 ‘애국’이라는 미명하에 애꿎은 젊은이들의 열정과 헌신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