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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Aug 09. 2024

한국전은 미‧중전쟁 (제21화)- '밴 플리트' 탄약량

중공군의 5차례 대공세(마지막 기동전)를 드디어 종료시킨 미군의 '화력전'

‘밴 플리트’의 취임 직후인, 1951년 4월 22일, 중공군의 제5차 1단계 공세가 시작되었다. 중공군은 4차 공세대비 2개 병단을 추가로 투입해서 총 4개 병단으로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였다. 중공군은 1950년 10월 25일 한국전 개입이래, 거의 월 1회 주기로 이미 4차례 공세로 청천강에서 서울까지 유엔군을 몰아내는 전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제4차 공세에서 오히려 수세에 몰리고, 유엔군이 위력수색을 통하여 서울을 수복하자, ‘펑더화이’는 이번 공세로 서울을 다시 탈취하여 ‘마오쩌둥’에게 ‘5월 1일 노동절 선물’로 바치려 하였다.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 비록, 국군 6사단은 사단장의 적전 도주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비참하게 참패하였지만, 인접 국군 1사단, 3사단 등 다른 사단은 악전고투 속에서도 책임 지역을 잘 지켰다. 이 문에 중공군의 돌파 기도는 좌절되었다. 그리고 설령, 일부 지역이 돌파 당하더라도 철수하는 유엔군은 각 단계별로 끊임없이 화력으로 때렸다. 중공군으로서는 화력전으로 진격이 저지되고 전과는 적은데, 기동할수록 화력에 의한 피해는 커졌다. 이렇게 해서, 중공군의 제5차 1단계 공세는 피해만 입은 채 무위로 돌아갔다.


중공군 개입이래 연전연패하던 미군은 적의 4차 공세를 지평리 전투에서 막아내며 처음으로 승리하였다. 효율적인 화력전의 결과였다. 그리고, 이 전투로 미 8군은 보급제한이 중공군의 약점이라고 파악하였다. 이후, 미 8군은 적의 공세로 돌파구가 형성되면, 가능한 한 최소의 접촉을 유지하다가, 적의 공세가 약해지는 5 차 이후에 항공과 포병으로 구성된 화력전으로 결정적 타격을 가하는 새로운 작전을 구사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밴 플리트 탄약량이라는 무제한의 화력지원이 동원되었다. 기동전 대응에는 화력전이 답이었다.

  


무제한 ‘화력전’으로 중공군을 제압한 '밴 플리트' 장군 

5월 중순 다시 이어진 제5차 2단계 공세에서 중공군 제9병단은, 한국군을 대량 섬멸시켜 전기(轉機)를 잡겠다며 국군이 방어 중인 동부전선으로 주공을 지향시켰다. 그런데, 중공군은 5차 공세 1단계 작전까지는, 변변치 못한 무기체계와 탄약 부족으로 늘 화력지원이 충분치 않았는데, 왠일인지 5차 공세 2단계 작전 부터는 작전을 바꾸어, 돌파할 지점을 미리 선정하고 모든 가용화력으로 강력한 공격준비사격을 1시간 정도 퍼부은 뒤, 엄청난 병력으로 신속한 야간 돌파를 시도하였다. 이른바, 전형적인 보병+포병 합동 ‘인해전술(?)’로서 중공군이 먼저 화력전을 가해왔다. 국군과 유엔군은 예상치 못한 이런 뜻밖의 전술에 허를 찔렸다. 


또한, 앞서 살펴본대로,  중공군 1개 중대에게 산악침투를 허용하여 퇴로를 차단당한 국군 제3군단 전체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자 중공군의 전술적 목표는 뜻밖으로 너무 쉽게 달성되었다. 6만여 명의 군단병력이 화포, 전차 등 주요 전투 장비를 유기하고 뿔뿔이 흩어져 살길을 찾아 길도 없는 강원도 산악지역으로 숨어들었다. 이른바, '현리 전투'다. 이처럼, 국군 군단 병력이 적 1개 중대의 침투로 녹아내리자, 동부전선에는 약 70여 Km에 달하는 커다란 돌파구가 생기고 이 틈으로 중공군물밀듯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동경에서 날아와 ‘현리 전투’가 벌어졌던 중동부 전선을 시찰한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은,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보았다. 그는 전선에 형성된 적의 돌파구가 너무 과도하여 약점으로 보인다이를 이용하여 중공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자며, 오히려 예비대를 투입하고 전 전선에 걸쳐 적극적인 공세를 지시하였다. 강대강 이랄까? 중공군 대공세를 맞이한 미 8군은, 강력한 화력공격과 엄청난 수적 우세로 돌파를 시도하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섬멸하기 위해, 더욱 강력한 화력(포병+공군)을 운용하였다. 


특히, ‘밴 플리트’ 장군은 병사 개개인의 전투능력보다 화력지원이 중요하다나는 병사들이 한 포탄 자국에서 다른 포탄 자국으로 한 걸음에 갈 수 있을 만큼 많은 포탄 자국이 만들어지길 바란다며 엄청난 물량 중심의 화력운용을 지시했다. 그는 미군은 물론, 국군 포병에게도 미 육군 규정을 5배나 초과하는 탄약 사용을 승인하여, 평소, 하루 1~4만 발 수준이었던 방어선 전방지역 미군 포병화력의 치열도를 거의 ‘무제한’이랄 수 있는 하루 5만여 발로 올렸다. 이 정도면 화포 1문당 쏠 수 있는 1분당 발사속도를 고려할 때 포신이 달구어질(?) 정도의 양이었다. 또한, 포병 화력과 시너지를 내기 위한 항공지원도 1일 200여 회 이상으로 늘여, 밴 플리트 탄약량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누구도 생각치 못한 엄청난 물량이었다.


이제, 불룩한 주머니처럼 형성된 ‘돌파구 내에 갇힌 적을 신속히 공격하려는’ 유엔군이, ‘돌파구 밖으로 벗어나려고 애쓰는’ 공산군에게 ‘얼마나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을까?’로 승전을 다투게 되었다. 그리고, 돌파구 저지 사격이나 돌파구 내 적 살상을 위해 유엔군이 다시 한번, 밴 플리트 탄약량이라는 무제한의 화력지원을 가동하므로서 중공군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포병사격 후 산처럼 남겨진 폐장약통들 

미군의 화력전으로 중공군은 인명 살상이외에도 보급 조달에도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중공군은 제5차 2단계 공세 시, 국군 제3군단을 궤멸시킨 후, 장거리 종심 기동작전으로 70여 km의 거대한 돌파구를 형성하였지만, 태백산맥의 험난한 지형은 중공군의 체력을 소진시켰고, 유엔군의 엄청난 화력공격은 늘어난 보급로를 절단 시키고 기동로를 제한하였다. 이 때문에, 탄약과 식량이 고갈된 중공군은 최초작전 목표달성에 성공하고도 후퇴해야 하였다. 특히, 5월 초순 ‘보릿고개’ 시기에 중동부 전선의 산속을 기동하던 대부분의 중공군 부대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아사자가 속출하였다.’ 결국, 이번에도 화력에 당한 보급이 공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급기야, 1950년 5월 19일, 중공군 중앙 군사위원회는 후방근무지원이 눈앞의 모든 작전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하였고, 그 이후로 한동안 제대로 된 대규모 공세를 펼치지 못했다. 이처럼, 유엔군은 엄청난 화력전으로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무력화 시키고 전쟁의 주도권을 잡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런데, 이런 화력운용은 막대한 전비 부담으로 이어져 미군 수뇌부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었으나, '밴 플리트'는 '리지웨이'의 동조아래 꿋꿋하게 자신의 방식대로 전투를 수행하여 계속해서 적군에게 막심한 피해를 강요하였다. 


화력 공격의 예를 들면, 제5차 공세에서 유엔군이 반격으로 전환하자, 중공군 제63군은, 2만 9천여 명의 병력과 1개 포병 단(연대급)과 1개 방사포 영(대대급)으로 철원지역을 15일 이상 방어하도록 지시받았다. 하지만, 화포 1,300여 문과 전차 180대, 그리고 항공기의 지원을 받고 있던 미 1기병사와 25사, 영 28여단과 29여단 등 5만여 명이 공격하자 단 3일 만에 제63군은 7천여 명이나 줄어들어(?) 2만 2천여 명만 남았다. 이쯤되면, 재정비가 불가피한 수준이다. 그런데, 이런 부대가 한, 둘이 아니었다.  

(출처: 미8군정보참모부 ‘1951년 6월12일 적군평가보고서’, 렉싱턴, 버지니아.미육군 역사 2012년 겨울판) 


유엔사는 제5차 전역에서 유엔군 2,600여 명 전사에 중공군 6만여 명 전사로 공식 발표하였다. 엄청난 피해를 입은, 중공군 지휘부는, “4월과 5월 공세를 연속하여 실시하는 바람에 병력이 지치고보급품도 바닥났으며, 미군의 견제부대를 격멸하지 못하였기에 미 측의 반격위험이 있다며 공세를 마무리하고 휴식과 정비를 명하였다. 


유엔군의 강력한 화력전은 중공군 지휘부에게 대규모 기동전으로 유엔군을 이길 수 없다는 점을 확실하게 깨우치며, 중공군을 휴전회담장으로 내모는 데 일조하였다. 그리고, 중공군이 다시는 기동전이라는 대규모 공세를 감행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는 전술적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마오쩌둥'은 기동전을 주도한 '덩화' 제1부사령관을 휴전협정 대표로 교체하고, '땅굴전'의 대가인 '천껑'이 부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이제, 38선상에는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었고, 전쟁의 양상은 대규모 '기동전'에서 '화력전'과 '고지전'으로 전개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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