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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Aug 08. 2024

한국전은 미‧중전쟁 (제20화)-중대에게 대패한 군단

중공군 제5차 공세 2단계(1951년 5월 16~21일)

중공군 중대에게 퇴로를 차단당해 '독 안에든 쥐' 신세가 된 국군 제3군단

중공군은 비록, 5차 공세 1단계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여전히, 중공군 54만, 북한군 19만 등과 만주에 약 75만의 예비 병력으로, 미군과 유엔군 27만, 국군 23만 등 연합군보다 수적 우위를 점하여 언제든 공격을 재개할 수 있었다. 한편, 유엔군은 공산군의 공세가 멈추자, ‘전장 주도권’ 장악과 ‘적의 기도’를 탐지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정찰 활동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차후 적의 주공이 서부와 중부로 지향할 것으로 판단하여 미군을 중, 서부에, 국군을 동부에 배치하여 전초진지, 주진지, 저지진지 등 방어진지를 강화하였다.


그런데, 이어진 5월 중순의 중공군 5차 공세 2단계에서 ‘펑더화이’의 중공군 지휘부는, 미 8군의 판단과 달리, 한국군을 대량 섬멸하여 미군을 고립시킴으로써 이를 격멸시킬 수 있는 전기(轉機)를 잡겠다는 의도로 국군이 방어하고 있는 동부전선으로 주공을 지향시키는 한편, 공격의도를 위장하려 한강 도하 등 양동작전과 소양강 도하 등 기만작전을 병행 실시하였다. 동시에, 공격 작전 주공부대인 중공군 제9병단은, 동부전선에서 국군 4개 사단을 섬멸할 목적으로 다중 양익 포위망을 형성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이제 국군 제3군단과 예하 3사단과 9사단이 현리 전투(‘오마치 고개 전투’)’에서 커다란 참패를 당하게 된다. 


전술적으로 대대급 이하의 소부대 전투는 ‘사격과 기동’의 연결이 중요하다. 한국전 참전 당시, 중공군은 변변한 기동수단이 없어 급속행군(달리기)이 주요 기동력이었다. 1951년, 5월 ‘현리 전투’에서 중공군 제60사 178단(연대) 2영(대대) 1개 중대는 야간 13시간 동안 무려 25km의 길도 없는 산악을 달리다시피 하여 ‘오마치 고개’를 확보하고 국군 3군단의 퇴로를 차단했다. 지도에서 보듯, 수림이 울창한 700~900m의 험준한 강원도 산악지대인데, 여기를 200여 명 병력이 야간에 13시간 동안에 걸쳐 무려 25km를 전진하다니,,,. (현지인의 조력 여부는 미확인) 길도 없는 산악지역을 비록 경무장(소총과 탄약, 휴대 식량 등 약 20kg 정도 군장)이라지만 야간에 시간당 약 2km로 이동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능력이었다.      


그만큼, 중공군 제20군이 ‘오마치’ 고개 점령에 작전의 승패를 걸었다는 뜻이겠지만, 이 침투로 인해, 퇴로차단 공포에 질린 3 군단장(유재흥 소장)이 항공기로 도주하자, 각 사단포함 군단 6만여 병력이 대부분 장비를 유기하고 뿔뿔이 흩어져 도주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 중공군 1개 중대는 침투하는 동안, 휴식도 없이 오로지 ‘오마치’라는 목표만 보고 내달렸다. 대단한 집중력이었다. 이들은 전투영웅(?)이 되었다.   


중공군의 ‘오마치’ 고개 침투 시간대별 종심 기동 (중국인민지원군 ‘항미원조전쟁경험적총결 3(하)' 보병단 도전례선집(1956년) 143쪽 및 4, 대적군연구(1956년), 147

당시, 중공군의 행군속도는 국군의 2배 이상 빠른 것으로 각종 포로 증언에서 나온다. 2배 이상의 행군속도는 상대가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엄청난 기습효과를 발휘한다. 


예컨대, 나폴레옹 전쟁은 일반 시민군들이 여러 왕정국가의 ‘프로 용병’을 격파한 전례로 유명하다. 비결은 농노나 시민군에게 ‘프랑스’라는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일깨워주고, 장비와 보급지원의 경량화로 기동성을 배가하여 집중과 분산을 효율적으로 수행한 것이었다. 당시, 상대인 오스트리아 군은 중무장으로 분당 70보를 기동 하였는데 비하여, 나폴레옹 군은 분당 120보를 기동하였다. 항상, 결정적인 지점에서 적보다 많은 군사력을 집중하여 수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처럼, 우세한 기동력은 공격작전 간 많은 융통성을 부여한다. 


중공군은 상대적 숫자도 많았지만, 산악지형 기동력마저 뛰어났다. 이에 비해, 국군의 훈련 부족은 심각한 문제였다. 청천강에서 38선까지 후퇴하던 제2차 전역에서, 산악지역에서 ‘걷기’에 익숙한 중공군은 국군과 유엔군을 연이어 돌파하며, 후퇴를 거듭하던 유엔군 방어부대들이 협조된 방어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수많은 침투공간을 계속 허용한 끝에 간신히 ‘어깨 대 어깨’로 맞닿은 방어선을 구축하여, 제3차 공세 직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적의 진격을 저지하였다.   


‘현리 전투’는 중공군 제20군 예하 1개 중대가 미군과 국군의 간격으로 우회, 종심 기동하여 급속 침투하여, 3군단이 춘천으로 철수하는 유일한 길목인 ‘오마치’ 고개를 확보하고 퇴로를 차단하는 바람에 3군단은 속수무책이 되었다. 당시, ‘오마치’ 고개 정상에 국군 60여 명이 있었으나 중공군이 출현하자 모두가 저항도 못하고 도주하여 버렸다. 그런데, 이 사실을 먼저 인지한(?) 군단장이 군단 정찰기로 어디론가로 가버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외친 적의 침투로 군단의 퇴로를 차단당했다고 생각한 군단장이 항공기로 도주하였다는 소문이 급속히 퍼지면서 3군단 전체를 ‘심리적으로 마비’시켰다. 물론, 일부 부대의 ‘오마치’ 고개 탈환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지형적 여건과 중공군의 증원으로 이마저, 실패하자, 수많은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던 예하부대들은 장비를 유기하고, 각자 흩어진 채 장태산을 넘어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태백산맥의 5월 달은, 여전히 춥고, 먹을 것도 없었다. 군단이 적 공격을 받은 지 3일 후, 후방 재집결지에 나타난 병력은, 군단 병력의 40% 정도로, 다수가 생환하지 못했다. 그리고, 유엔 공군은 국군이 유기하여 도로상에 널브러진 채 있는 차량, 화포 등 각종 장비를 중공군이 사용치 못하도록 며칠 동안이나 출격하여 파괴해야 했다.    

     

중공군의 제5차 2단계 공세 요도

그런데, 이 패전을 연구하다 보면 사전에 이상한 조짐이 있었다. 1951년 4월 25일, 중공군 공세를 예상한 미 8군이 하달한 작전명령 상에, 제3군단의 유일한 ‘주 보급로’의 일부(오마치 고개 일대)가 인접 미 제10군단 지역 전투지경선 내에 들어 있었다. 이에, 제3군단은 군단 작전의 승패가 걸린 주 보급로의 안전 보장을 인접 군단의 작전 결과에 의존할 수 없다며 군단장은 ‘오마치’ 고개를 확보하도록 보병 1개 대대를 배치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미 10군단과 사전 협의가 전혀 없었다. 이에, 분노한 미 10 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미 8군에 이를 보고하고, 제3군단장에게 이 부대를 철수하도록 요구하였다. 3군단은 미 8군의 지시로 부대를 철수시켰지만, 정작 미 10군단은 이 지역을 커버하는 아무런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를 보면 ‘현리 전투’라는 전대미문의 대참패는 미 8군의 무능과 한, 미 군단장 간의 감정대립으로 비극이 시작되었다. 6 사단장 도주 건에서 보듯, 당시 ‘알몬드’ 소장의 국군에 대한 비협조와 불신은 상당하였다. 이 같은, 상호불신과 상대에 대한 공포가 이 전투의 참패 원인으로, 이와 유사한 사례는 세계전쟁사에서 매우 많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러시아의 전투에서 독일의 ‘힌덴부르크’ 장군은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러시아의 ‘삼소노프’와 ‘레넨캄프’ 두 사령관의 개인감정과 불화로 상호지원이 전혀 없었던 러시아군을 각개 섬멸하였다. 타격을 입은 러시아는 엄청난 영토를 독일에 할양하고 전선에서 이탈하였고, 얼마 후 러시아 제국마저 멸망하였다. 군사령관 등 고위지휘관은 물론, 여느 지휘관 사이의 불화는 국기를 뒤흔드는 커다란 불행이 된다.


불화에 이어 공포도 군을 마비시킨다. 제2차 세계대전 초 일본의 ‘싱가포르’ 공략 시, 일본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예상을 뒤엎고 자전거를 이용하여 ‘말레이’ 반도의 밀림을 지나 싱가포르를 배후에서 공격하였다. 자전거로 정글의 밀림을 지나는 게 쉽지 않았지만, 승리에 대한 일념으로 내달린 기습효과는 대단하였다. 포위를 당했다고 당황한 영국군은 우월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항복하였다. 심리적 충격의 결과였다.


현리 전투에서, 패배했던 3 군단장 유재흥 소장은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로부터 보직해임을 당하고 3군단은 해체되었다. 더불어, 3군단의 직속 작전 지휘부대였던 한국 육군본부도 미 8군에게 작전지휘권을 박탈당하여 한국 육군의 자존심에 치명타를 입었다. 그 이후로 지금껏, 우리 육군 본부는 작전 기능이 없고 인사, 군수 위주의 행정 지원 업무만 담당한다. (현재, 육군 본부는  정보 및 교육훈련과 부대 편제 등을 담당하는 정보작전참모부가 있긴 하다) 일부 전쟁사 전문가들은, ‘현리 전투’는 임진왜란 시의 ‘칠천량’ 해전과 병자호란 시의 ‘쌍령 전투’와 함께 한민족이 겪은 ‘3대 패전사’로 꼽기도 하지만, 이들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유재흥 소장은 일본군 대위 출신으로 한국말을 잘 몰랐지만 독립 이후 육군에 투신하여 29살의 나이에 군단장이 되었다. 그는 2 군단장이었을 때, 중공군 제1차 공세로 '온정리'에서 군단이 와해되었고, 얼마 후 다시 3 군단장으로 임명되었지만 '현리 전투'에서 다시 대패하였다. 그의 패배로 육본의 작전권마저 타국군에게 넘기게 만들었지만, 한참 뒤인 1971년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승장(勝將)이라면 몰라도, 역사에 남을 패장(敗將)이 국방부 장관이 된 것에 대해 말이 많았다… 이에 비해, 중국은, 1952년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미군에게 이겼다고 인민적 신화로 만들어진 ‘상감령 전투’를 지휘했던 중공군 제15군장(군단장급) ‘친지웨이’는 1980년대에야 중국 국방부장(장관)을 역임하였다. 양국 국방부 장관의 무게감이 달랐던 걸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대반전이 일어났다. ‘현리 전투’에서 3군단이 너무 쉽게, 빨리 무너져 내리면서 뒤따라온 중공군 중, 대대급 부대는 뿔뿔이 흩어진 국군보다도 앞서 기동하고 있었고, 국군의 뒤쪽에는 중공군 사단이나 연대급 등 상급부대가 따라와 국군은 사방으로 포위된 형국이었다. 국군이 적에게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무계획적으로 산개하여 철수하는 바람에 의도치 않은 ‘비선형’ 전투가 되었다.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전선이 엉키고 예상치 못한 각종 돌발사태가 발생하자, 국군도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중공군도 황당한 상황에 직면하였다. 초기에 작성된 엉성한 작전계획은 상황이 급변하자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고 (중공군은 각개 병사에게까지 1~2일 분의 작전계획을 숙지시켰다), 태백산맥의 높고 깊은 산악지형에서 열악한 중공군의 통신체계로는 지시, 명령이 어려워져, 지휘계통에 혼란마저 가중되자 자신들이 비선형화시킨 전투에서 자신들도 방향유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체력 소진에다 식량과 탄약마저 바닥나자, 점점, 상황이 나빠진 중공군은 나중에는 계곡을 따라 무조건 북으로 철수하게 된다.


한편, ‘현리 전투’가 벌어졌던 중동부 전선을 시찰한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은, 이런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보았다. 그는 전선에 형성된 적의 돌파구가 너무 과도하여 약점으로 보인다이를 이용하여 중공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자며, 예비대를 투입하고 전 전선에 적극적 공세를 지시하였다. 이제는 오히려, 불룩한 주머니처럼 형성된 돌파구 내에 갇힌 적을 신속히 공격하려는 유엔군이, 돌파구 밖으로 벗어나려고 애쓰는 공산군에게 얼마나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을까?로 승전을 다투게 되었다.


그리고 돌파구 저지 사격이나 돌파구 내 적 살상을 위해 유엔군은 다시 한번, 밴 플리트 탄약량이라는 무제한의 화력지원으로 엄청난 피해를 가하여 중공군이 다시는 기동전을 감행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중공군 공세에 의한 ‘기동전’의 시간은 저물고, 38 선상에서는 ‘고지전’이라는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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