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제5차 1단계 공세 (1951년 4월 22~29일)
‘리지웨이’ 재임 간 미 8군의 작전계획은, “중공군이 공격해 오면 방어선 고수로 출혈을 감내하기보다, ‘서울도 포기’하는 등 축차적으로 지역을 내주고 철수하며, 따라오는 중공군에게 최대한 피해를 강요하여, 전력을 약화시킨 후에, 다시 반격으로 전환하여 최초 방어선을 회복해 나간다”는 것이었다. 반면, 중공군은 “작전 준비는 길게 하되, 실시는 단기간에” 수행한다는 ‘마오’의 지침대로, ‘종심을 얕게 한 채, 횡적협조만 하고’ 있는 유엔군을 동서로 분할하여 2개의 덩어리로 나누고, 정면 공격과 전역 우회로 선정된 지역에 돌파구를 형성하여, 다시 몇 개의 작은 덩어리로 나눈 후, 이를 우세한 병력과 화력으로 하나하나 분할, 격멸한다는 것으로 “전역분할(戰役分割)과 전술분할(戰術分割)로 잘게 나눈 뒤, ‘포위 우회’를 결합시킨다”는 작전이었다.
그런데, ‘리지웨이’가 유엔군 사령관으로 영전하자 이어서, 후임 미 8군 사령관(1951년 4월 14일~1953년 2월)으로 부임‘밴 플리트’의 취임일( 1951년 4월 14일)로부터 1주일 후인, 1951년 4월 22일, 중공군은 미 8군이 지휘권 인수인계라는 혼란을 틈타 2개 병단을 추가로 더 투입해서 총 4개 병단으로 제5차 1단계 공세를 감행하였다. 특히, ‘펑더화이’는 이번에도 한국군 부대를 먼저 노렸다. 그의 의도는 '마오'의 원대로 다시 서울을 탈취하여 ‘5월 1일 노동절 선물’로 바치려는 것이었다.
한국군을 노린 중공군이 동부전선으로 지향되자, 중동부 전선 ‘사창리’ 지역을 방어하던 국군 6사단이 최대의 희생물이 되었다. 이른바, '사창리' 전투다. 국군 6사단은 압록강에 가장 먼저 도달하였던 부대였지만, 1950년 10월 중공군 1차 공세 시 ‘온정리’ 일대에서 포위당하여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가, 이번에도 또다시 중공군의 공격에 밀려 사단 전체가 야포 등 장비를 유기하고 지리멸렬한 상태로 패하며, 참담한 고통을 당하였다. 지난번과 똑같은 방식으로… 국군 6사단의 와해로 방어선의 측면이 노출되어 중공군이 모여들자, 6사단에 화력을 지원하던 미 포병부대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며칠 후에, 사단 병력의 절반 정도인 6,300여 명을 수습했지만, 사단은 이미 재기불능 상태였다.
그런데, 6사단의 결정적인 패착은 적이 공격하자, 사단장이 제일 먼저 혼자만 도주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국군의 작전지휘력 취약점이 여실히 노출된 패배였다. 당시, 사단장(장도영 준장)은 1944년 일본군 소위로 임관하고 독립 후 한국군에 투신하여 6.25 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육군 준장으로 승진, 약관 28세에 사단장이 되었다. 경험이 없어서 노련한 중공군에게 공포심을 느껴서일까...? 며칠 후, 혼자 도망쳤다가 돌아온 사단장(장도영 준장)은 미군 군단장(알몬드 소장)으로부터 “당신, 군인 맞아?”라는 굴욕스러운 핀잔을 들었다. 국군 6사단은, 사단장이 먼저 도주한 데다가, 이를 감당할 예하부대 지휘관들의 지휘능력도 부족하여, 간부들마저 사기저하되니, 병사들은 거의 전의를 상실한 상황이었다.
군인은 ‘전술 전기’ 면에서 전문가여야 한다. “강한 장수 밑에 약졸 없고, 약한 장수 밑에 강졸 없다”는 말이 있다. 너무 빠른 국군의 팽창 탓에 몇 계급씩 순식간에 뛰어오른 당시 국군 지휘관, 참모 중 일부는 군단이든, 사단이든 자신들이 지휘하는 제대급에 걸맞은 임무수행 능력이 부족하였다. 언어조차 다른 미 8군 사령관이나 미 군단장의 작전의도나 전투명령이 하달되면, 부여받은 작전지대에 대한 방어계획이나 기동계획은 물론, 화력지원 통합, 전투근무지원, 장애물, 경계, 방호, 통신, 우발사항조치 등 각종 계획 수립과 공세이전에 대한 계획, 포위 시 대책, 인접부대와의 협조사항 등등을 수립하고, 관련 지휘관 참모들의 협조 및 숙지와 예하 부대원들에 대한 사전 훈련도 시켜야 했지만, 이런 입체적, 다각적인 계획을 세우고 이끌 인원이 부족하였다.
그 결과, 총체적으로 사단장에 대한 문책 사유는 차고도 넘쳤지만, 그나마 당장 '사단을 지휘할 능력'을 갖춘 이들이 드물다며 ‘적전에서 도주하였던 자’에게 ‘처벌보다는 관용’이 주어져 곧바로 다시 기용되는 일이 생긴 것이다. 무슨 높은 사람과의 연줄 때문이라기보다, “그나마 그들만큼 군사지식이나 경험이 있는 군인이 없어서…”가 이유였다. 전쟁은 이어지고, 부대는 팽창하고, 일손은 부족하고…. 진주만 기습이후, 일본과 전쟁하던 미군은 많은 일본어 숙달자를 양성, 배치하였고, 이들은 일본 항복이후에는 일본의 미 군정에서 근무하였다. 하지만, 6.25전쟁 당시에 한국어를 구사하는 미군은 거의 전무하였다. 미군으로서는 어설픈(?) 영어를 구사하는 한국군 장교보다, 차라리 일본어를 구사하는 일본군 출신 한국군 장교와의 소통이 더 용이하였을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일본군 출신으로 당시로서는 몇 안 되는 군 엘리트였다(몇몇은 후에 국방장관이 되었다).
하지만, 지휘관 탈영으로 형편없이 당한 6사단과 달리, 국군 1사단, 3사단 등 다른 사단들은 악전고투하는 속에서도 책임 지역을 잘 방어하였다. 예상외로 국군이 선방하자, 중공군으로서는 유엔군의 배치 밀집으로 돌파가 쉽지 않아 전역분할이나 전술분할이 어려웠다. 게다가, 유엔군은 비록 철수를 하더라도 각 단계별로 화력으로 적을 때렸다. 중공군으로서는 전과는 적은데, 화력전으로 진격이 저지되고 기동 할수록 화력에 의한 피해는 점점 커졌다. 이는, 미 8군이 4차 공세 이후부터 적의 보급제한 약점을 파악한 탓이다. 미 8군은 적의 공세로 약간의 돌파구라도 형성되면, 가능한 한 적과 최소한의 접촉을 유지하다가, 적의 공세가 약해지는 5일 차 작전 이후에 항공과 포병으로 구성된 ‘화력전’으로 맹반격을 실시하여 결정적 타격을 가하는 작전을 구사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밴 플리트 탄약량’이라는 무제한의 화력지원이 동원되었다.
4월 29일, ‘펑더화이’는 공세가 모든 면에서 준비가 불충분하였다는 사실을 시인하였다. 결과적으로 1951년 4월, 중공군의 제5차 1단계 공세는 미군의 엄청난 물량 공세에 의한 화력전으로 중공군이 엄청난 인명손실을 입은 전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