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제4차 공세(1951년 2월 11일~2월 18일)
서울을 내주고 병력을 보존하며 축차적 지연전을 수행한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의 작전이 성공한 것일까? 중공군은, 3차 공세로 서울을 함락시킨 이후 갑자기 일방적으로 접촉을 끊고 사라져 버렸다. 전장에 대한 통찰력 덕분일까? '리지웨이'는 이 사실에 주목하고, 사라진 중공군의 배치, 규모, 의도 파악에 집중하였다. 공중정찰만으로 적정파악이 힘들자, 제한된 규모의 육‧해‧공 합동작전과 보병‧전차‧포병 협동공격으로 ‘위력수색’을 실시하였다. 적과 접촉을 시도한 초기의 ‘위력수색’은 마치, ‘덤불 속에 숨은 너구리를 찾으려 풀섶 곳곳을 두들겨 보는 식’으로, 수색하다 적정이 파악되면, 제한된 목표 점령에도 전면적인 공격을 가하였다. 서부전선에서 미 8군의 위력수색이 성과를 거두자, 동부전선의 미 10군단도 국군 5, 8사단을 ‘강습 위력수색’ 작전의 선봉에 세우고, 동일한 방식으로 작전에 나섰다. 그런데, 너구리 잡으려다 호랑이를 덮친 셈일까?
그즈음, 중조연합사령부는 3월에 춘계공세를 한다며, 1월 25~29일간 평북 ‘군자리’에서 3차 공세 분석과 차후 작전 회의를 가졌는데, 회의 도중, 지금껏 ‘전력 보존과 철수’만 해 오던 유엔군이 싸움을 걸어오자, 중공군은 이 병참회의를 ‘제4차 공세 준비회의’로 바꾸고, ‘서부전선은 저지, 동부전선에서는 반격’이라는 ‘맞불 공세’를 계획하였다. 동부전선에서 반격에 나선 제13병단 사령관 ‘덩화’는 유엔군 공격 대상으로, 약간 돌출된 지평리와 횡성 두 지역을 고려하다 두 지역 동시 공격은 무리라며, “지평리를 공격하면 서부전선과의 통합은 가능하나, 그 일대의 유엔군이 강하고 쉽게 증원할 수 있는 데 비해, 횡성은 병력은 많으나 주로 한국군이고 돌출된 지역이라 측방 공격이 가능하여 격멸하기 쉽다”라고 보아, 한국군을 우선 공격대상으로 결정했다.
1951년 2월 11일, 강원도 ‘횡성’ 일대에서 ‘덩화’ 제1 부사령관 예하의 중공군 39, 40, 42, 66군 등 수 만여 명이 갑자기 국군 8사단을 기습적으로 덮쳤다. 그리고, 불과 하룻저녁(17~01시) ‘전투’에서 8사단 병력 1만 2,000여 명 중 8,000여 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중과부적, 처절한 참패였다. 장비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살아남은 병력도 거의 모두 사단 본부 및 직할부대원일 정도로 예하 3개 보병연대가 입은 피해는 혹독하였다.
국군 8사단은 3개월 전 북진 시, 중공군의 기습작전에 걸려 사단 전체가 붕괴될 때, 많은 간부와 고참병이 소진되어, 살아남은 병력은 중공군을 두려워하였으며, 보충된 신병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해, 부대의 훈련 수준이나 팀워크, 사기가 매우 낮았다. 그런데도, ‘위력수색’ 작전의 선봉에 세웠다가… 참담하게 당한 것이다.
2월 13일, 이번에는, 중공군 제38, 40, 42군 예하 약 8개 연대가 ‘횡성’에서 8사단을 유린한 여세를 몰아, 미 2사단 23 연대와 프랑스군 1개 대대가 방어 중인 ‘지평리’를 포위하고, 2월 13~15일부터 밤마다 공격을 가해왔다. 미군과 연합군은 인근 '횡성 전투'에서 한국군이 와해된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비록, 병력은 열세하였지만 방어진지를 2중 3중으로 강화하였다. 그리고, 압도적인 항공, 포병의 지원으로 야음을 틈타 공격하는 적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가했다. 2월 15일 아침, 야간 공격에 실패한 중공군은 약 5,000여 구의 시신을 남기고 물러났다. 이로써, ‘지평리 전투’는 고수방어의 대표적 전례로, 중공군 개입 이후 미군 최초의 승리로 기록된다. 이 전투를 계기로, 유엔군의 중공군에 대한 공포심은 잦아들고, 사기도 점차 회복되어 공세 이전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리지웨이’로서는 “철수하지 않고, 싸울 것”이라는 취임 약속을 지켰고, 미 2사단은 지난 2차 공세 시, 평안북도 ‘군우리’에서 중공군 제38군에게 당한 패배의 일부나마 갚은 셈이다.
2월 17일, 제4차 공세를 감행한 북중 연합사령부는, 계속되는 전투로 인한 병력 고갈과, 물자 부족으로 더 이상 공세가 어려워지자, 전 전선에서 “운동방어”로 전환하여 약 2개월 간 전열을 재정비한 후, 다시 공세를 가하기로 했다. 적이 공세를 멈추자, 이번에는 ‘리지웨이’가 적에게 새로운 공세를 준비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며 계속적인 공격작전으로 밀어붙여, 서울을 탈환하고 38선 부근까지 적을 다시 몰아내는 전과를 거두었다. 지평리 전투로 중공군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회복한 것이다.
그렇지만, ‘리지웨이’는 무엇보다 중공군의 3차와 4차 공세를 겪으며, “어느 순간 나타나 전장을 유린하다, 어느 순간 공세를 멈추고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이민족 중공군의 낯선 ‘전법’ 실체 파악에 고심하였다. “전술적으로 공세의 주도권을 쥐게 되면 적을 계속 몰아붙여 전과확대를 해나가는 것이 전쟁원칙인데… 도중에 슬그머니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상대에게 전세를 만회할 기회를 준다? 왜, 그럴까!?” 수없이 자문하였다.
‘리지웨이’는 개인적 의문과 군사적 호기심으로 중공군의 공세 패턴을 살펴보다가, 어느 순간 중공군의 공세가 10월, 11월, 12월 등 매 1개 월마다 반복되었고, 작전 기간은 거의 8일이라는 공통점을 찾아내었다. 모두가 눈앞의 전투에만 매달리느라 분주히 움직이는 통에 무심코 지나쳤던 통계적 패턴을 찾은 것인데… 그런데, 이 패턴에 대한 분석결과가, 다시 전선의 큰 흐름을 바꾸게 된다. 그는 포로 심문과 각종 정보 분석으로, ‘전쟁물자가 중국 본토로부터 철도나 도로로 전선부대에 도달하는 데 무려 1개월 걸리고, 최전선의 중공군은 단 8일분의 식량과 탄약만으로 대규모 공세작전을 수행한다’는 사실과, 중공군이 장비, 보급지원이 열악하다는 치명적인 약점과 야간작전 시 인접부대 간 협조를 위한 통신대책이 매우 취약하다는 점도 파악하였다. 그동안 유엔군이 수도 없이 패배하며 시달렸던 '뿔피리' 소리가 저들의 구시대적 통신 연락대책이었던 것이다.
적의 약점을 간파한 리지웨이는, “…‘영토회복’보다 적의 ‘역량파괴’에 주력하라”라고 지시하였다. 굳이 38선 이북까지 밀고 올라가 북한 영토를 회복하는 것보다, 오히려 38도 선까지 신장된 적의 병참선을 끊임없이 공중폭격하여 물자 부족을 유도하고, 수시로, ‘강습 위력작전(위력수색)’으로 전장을 초토화시키고, 파상공세를 펼치는 중공군을 강력한 포병 화력으로 타격하여 인원, 장비의 피해를 강요하려 하였다. 그는 이런 전술로, 적 수뇌부로 하여금 “미국과 전쟁을 마냥 지속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하려 하였는데, 그의 전술은 대성공이었다. ‘리지웨이’는 유엔군의 사기 회복과 전술적 승리를 이루어, 결과적으로, ‘트루먼’ 대통령의 지시인 ‘38도선 이남 수복지침’을 지키면서 중공군에게 휴전에 임하도록 강하게 강요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제4차 공세가 끝난 1951년 2월 말, ‘펑더화이’와 김일성은 ‘마오쩌둥’을 찾아가 “우리는 공세를 종료하였으나, 유엔군이 지상공격을 계속하고, 함상 포격, 공중전력으로 후방보급로 차단 폭격을 계속하고 있어, 만주에서 추진되는 보급품의 60~70%만이 전선에 도달하여 작전지속 능력이 위협받고 있다”라고 보고하였다. 보고를 접한, ‘마오’는 스탈린’에게, “유엔 측이 우세한 화력과 장비로 우리 군의 휴식과 재정비를 허락지 않고 소모전을 강요하고 있다. 유엔군의 이런 전쟁 수행 전략은, 향후 2년 정도 더 전쟁이 지속될 것으로 보이니, 소련의 적극적인 지원 특히, 공중엄호가 필요하다”며, 공세로 전환하기 위한 전술적 방책의 모색과 전력보강을 위해 과거 “소련이 약속한 지원을 제공해 달라”라고 간청하였다. 그때부터, 소련은 중공에게 신형 MIG-15 전투기는 물론, 각종 화포와 장비, 물자 등을 서둘러 지원하였다.
제3차 공세가 끝날 즈음인 1월 초순, ‘트루먼’ 참모들은 ‘현 방어선에서 중공군의 출혈을 최대한 강요하는 “군사적 응징”으로 “정치적 협상”을 모색한다’며, “휴전”으로 전쟁을 명예롭게 마무리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에, ‘맥아더’가 “한국에 있으라는 건지? 일본으로 철수하라는 건지? 분명치 않다”라고 불만을 토로하였지만, 합참은 “미 8군이나 일본의 안전이 위험하지 않는 한 한국 작전은 계속한다”며, 현지 지휘관의 상황판단을 강조하였다. 이는, “유엔군 사령관이 전선을 안정시키고, 현실적으로 평화적 해결책을 찾으라”는 지시였다.
그런데, 제4차 공세에서 '리지웨이'가 반격의 전환점을 마련한 후, 미군의 반격으로 다시 38선을 회복하자, 회색이 만연한 워싱턴은 중공에게 “유엔군은 휴전을 논의할 의사가 있다”는 점을 밝히려 하였다. 하지만, 맥아더가 이보다 한발 먼저, “중국의 군사적 취약점을 지적하며, 유엔 대표권 등 한국전쟁과 무관한 이슈로 군사적 패배를 자초하지 말고, 유엔의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군사령관 간 대화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내놓았다. 그런데, 국가주석 '마오'가 아닌 군사령관 '펑더화이'와의 대화가 전쟁 종식에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미 국방부는,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높게 보지 않았지만, 국무부는 동서 이념대결에서 한국전쟁의 ‘정치적 가치’를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미군이 소련이 아니라 2~3류 정도인 중공과 북한에게 밀린다는 사실이 곤혹스러웠다. 중공이 개입하고 패배가 이어져도 '맥아더'가 “승리에 대신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주장하였으나, 워싱턴은 ‘승리의 대신’을 모색하며, “한국에서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를 갖는 것도 어렵고, 또, 그럴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 결국, 트루면 행정부는 ‘결정적인 승리’가 아닌, ‘명예로운 휴전’ 정도로 전쟁을 종식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트루먼'은 조금씩 승리를 이어가는 '리지웨이'를 대안으로 삼았다. '토사구팽'... 새로운 전장환경에 적응치 못한 ‘맥아더’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1951년 4월 11일,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하였다. 이는, “전쟁은 조건 없는 승리로 끝나야 한다”는 전통적 견해에 반하여, “전쟁은 조건 있는 휴전으로 끝날 수 있다”는 새로운 ‘전쟁과 승리에 대한 견해’를 갖게해 준 사건이었다.
1951년 4월 14일, ‘리지웨이’는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후임으로 곧 일본으로 떠났다. 약 100여 일간 미 8군 사령관으로 재직하며, 전쟁 주도권 장악의 계기를 마련하며 휴전협정의 단초를 찾았다. 반면에, 전술적 승리를 위해 수도 서울도 포기하는 등 수도 서울에 민감한 한국인의 정서는 전혀 고려치 않아, 전략적인 측면에서 한국과 한국민에 대해 ‘다소 무심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지만, 군인일 뿐인 ‘리지웨이’는 ‘오직, 적의 격멸’에만 주력한 미군 지휘관으로서, 유엔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뒤에도, 해‧공군 전력을 적극 활용한 '군수전'으로 한국전 승리를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아쉬운 점은, 북진통일을 염원하던 국군의 ‘38선 이북으로 전진을 제한’하며, ‘트루먼’ 정권의 의도대로 ‘현 전선에서 휴전’으로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아픔도 남겼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