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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Aug 10. 2024

한국전은 미‧중전쟁 (제22화)-위군(僞軍)과 각자도생


‘위군’으로 조롱당한 국군


조선 말기, 일제가 침략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며 기세를 떨치는 동안, 멸망의 늪에 빠져들던 조선 왕조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마저 강탈당하자, 곳곳에서 의병들이 봉기하여 일제 침략에 저항하였다. 선비들의 기개와 애국심은 가상하였으나, 이런 봉기는 대부분 실패하였다. 여전히 신분상 반상 제도에 집착하였던 의식 수준으로는 변화하는 환경을 따르지 못한 탓으로 보인다. 의병들은 애국심을 내세웠지만, 양반이나 지휘자라고 해서 가마 위에 가만히 앉아서 상놈이나 아랫사람들에게 지시나 해 댄다면 승산이 있을 턱이 없다. 더구나, 지휘관의 지휘통제력, 조직은 물론, 전술, 훈련이나 무기체계 마저 일본군에 비해 열등하기 짝이 없었으니… 1894년, 의지와 열정만 앞섰던 동학군의 주력이 '우금티'고개에서 일본군에 의해 전멸되지 않았던가?!


정부수립을 앞두고. 우리 국군의 창설은 일본군 무장 해제를 담당한 미 군정이 주도하였다. 미 군정은 광복군 출신과 일본군 출신을 동등하게 대하였다. 어쩌면, 오키나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하였던 미 군정장관 '하지' 중장으로서는 직책이나 계급조차 불명확한 광복군보다 일본군 출신을 더 객관적으로 평가하였을 것이다. 어쨌든, 다수의 광복군 출신은 지금껏 싸워온 일본군 출신과 함께 할 수 없다며 군 창설에 참여를 거부하였다. 반면에, 일본군 대좌이상의 조선인들은 2차 대전 전범자거나 반민족 행위자로서 귀국을 꺼렸다. 그 결과, 일본군 중좌(중령) 출신이 육군참모총장이 될 정도로 군 전문가가 드물어, 젊은 구 일본군 초급 장교 출신들이 대거 군의 주축이 되었다. 태생적으로, 국군은 구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잔재를 안고 출발한 셈이었다.


정부는 정부 수립 이후 광복군 출신을 특별 임관하고 육사 입교생 숫자를 늘려 일본군 출신 비중을 상대적으로 줄이려 노력했지만, 우리 국군 장교 중에서 6‧25전쟁을 치른 주역은 거의 일본군 출신들이었다. 그런데, 군부 등 극우세력이 주도하였던 구 일본 제국주의는, ‘지시와 복종’의 계급주의였고, ‘강압과 욕설, 구타’는 이들의 군대 문화였다. 애국의 일념으로 헌신하신 그 분들의 충정을 폄훼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군을 지휘하였던 그들의 리더십에 의해 국군 내부에는 '계급이 깡패'였던 구 일본군의 부정적 문화가 남아서 이어졌다.


6.25 전쟁 초기,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기습공격에 국군은 화력과 기동력의 열세는 물론, 교육훈련과 전술전기마저 미숙하여 공산군을 감당하기에 벅찼다. 비록, 국군이 애국충정과 사명감으로 전투 의지가 강했다고는 하나, 현실은 노록치 않았다. 국군은 궁여지책으로 미군에게 작전지휘권을 넘겼다. 하지만, 국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감을 되찾고 용맹스럽게 상황을 타개 하여갔지만, 압도적 기세를 보이며 낙동강까지 진출하였던 북한군은 유엔군 참전으로, 숙련된 고참병의 열에 아홉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인천 상륙으로 승기를 잡은 국군과 유엔군은 진공상태인 북한에 파죽지세로 치고 들어가 북한군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 붙혔다.


그런데, 북진으로 승승장구하던 국군은 느닷없이 기습 참전한 '전투 프로'인 중공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국군은 중공군의 1차 공세 때부터 매 공세 때마다 중공군에게 유독 약한 모습을 보였다. 국군이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취약하였던 것은 전쟁경험이 일천하였고, 중공군에 대한 공포심 때문이었다. 국군 상급 지휘관들은 광복군이나 일본군 초급 장교, 하사관 경험으로 전쟁 직전에, 기껏 대대, 중대급 지휘관이었다. 당시로서는, 일본 초급장교 출신은 나름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예컨대, 전후 일본 수상을 장기간 역임하였던 '나까소네 야스히로'는 '공직생활 중 가장 기억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망설임없이 '제국 육군 중위 시절'이라고 하여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한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전쟁 발발로 국군이 갑작스레 팽창하자, 사단, 군단급 작전 경험도 없고 중공군에 비해 군사 경험이 짧은 이들이, 팽창된 국군의 고급제대 요직을 맡았으니, 오랜 전투경험으로 다양한 전법을 구사하는 중공군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일반 병사도 ‘신중국’ 건설이라는 열정에 들떠 자원입대한 중공군과 달리, 학생, 직장인, 혹은 농부 등으로 생업에 종사하다, 갑작스러운 전시동원령으로 졸지에 징집되어 제대로 된 훈련도 없이 급하게 전선에 투입된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부대 장비도 일본군이 사용하던 38식, 99식 소총와 일부 미군 경장비가 전부였다. 


‘마오쩌둥’은 이런 국군을 얕잡아 보았다. ‘마오쩌둥’은 국군을 가짜 군대로 군복만 입었지 군인답게 싸울 줄 모르는 군인이라고 평가하며, 국군을 ‘위군(僞軍)’이라 불렀다”. 제대로 싸울 줄도 모르고, 작전권마저 타국군에게 넘긴 ‘가짜군대, 꼭두각시(=괴뢰)’ 군대로 얕본 것이다. ‘마오’ 따라 다른 중공군들도 각종 전쟁기록물이나, 군사정전위원회 등 공식회의에서도 국군을 항상 ‘위군(Puppet Army)’이라 지칭하였다. 심지어 일부, 중공군 기록물은 국군을 ‘부동(浮動)’으로 - ‘둥둥 떠돌아다니는 부유물’로 표현했다. 물이 스며들어 그 물이 지닌 부력으로 이리저리 떠다니는 상황이라는 것인데… 아마도, ‘깃털처럼 가벼운 인간이라는 뜻일 것이다. 당시, 중공군만 만나면 '꽁지를 내빼는' 국군을 얼마나 형편없이 얕잡아 보았는지 짐작케하는 말이다. 참고로, 과거 대영제국 군인들도 ‘비겁한 군인’을 경멸하는 의미로 ‘깃털(Feather)’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었다.           

인민 자원군이라는 ‘항미원조 지원군’이 출병하자, ‘마오쩌둥’은 베이징 근교의 지휘부에서 중공군을 원격지휘 했다. 그는 ‘미군을 목표로 한다’라고 하면서도, '항상 국군을 먼저 노려라'(專打僞軍)라고 지시했다. 화력과 기동력이 우수한 미군보다 국군이 약한 고리였으니까... 그런데, 이런 모습이 좀 딱해(?) 보였을까? 1951년 2월 말, 중공에게 신형 MIG-15 전투기를 제공할 때 ‘스탈린’은 ‘마오’에게, 국군에게는 대규모 공세를 취하면서미군이나 영국군에게는 치고 빠지는(Hit and Run)식의 소규모 공세만 취하지 말라미군이나 영국군은 장제스 군대와는 수준이 달라그런 방식은 비록한두 번 성공할지 모르나추후에는 두 번 다시 당하지 않을 것이니미군이나 영국군에게도 대규모 공세를 가하라!”라고 따끔한(?) 한 수를 충고했다. 아마, ‘마오쩌둥’이 강한 미군은 회피하고약한 국군만을 두들겨라라고 지시한 것을 에둘러 비판한 것이다.



위군(?)’의 잔재

누가 뭐라든 군인은, ‘싸울 의지를 갖고 싸울 줄 아는’ 집단이다. 설령, 군복을 안 입은 어린아이라도 적개심을 가지고 상대를 쏘면 군인이 아니라고 하기 어렵다. 그런데, 군복만 입었지 싸울 줄 모르는 군대도 많다. 임진왜란 전, 일본 사절단이 조선을 방문하자, 군사력이 허약한 조선은 군세를 과시하려고 젊은 농군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창을 쥐게 하여 그들을 맞았다. 그런데, 사절단 중 하나가 창을 쥔 농민의 손바닥에 박힌 군살을 만지면서, 이건 창을 다룬 손이 아니다이러다가 다 죽는다고, 조선 측에 말해 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임진왜란 초, 조선군 ‘신립’ 도원수는, 적은 병력으로도 적을 물리치기 용이한 ‘조령’에서 왜군을 격퇴하기보다, 남한강을 등진 드넓은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왜군과 마주 싸우다 전멸했다. 조총과 기병이 주축인 일본군에게 보병위주로 창칼만 가진 군대가 강변 허허벌판에서 붙자고 하였으니... 누구는 병법의 기본도 모르는 무식한 소치였다고 비난한다. 공감하는 필자의 생각 한켠에는 비록 졌지만, 왜군만 보면 도망치는 훈련이 부족한’ 군대를 데리고 ‘퇴로를 막고’ 악착같이 싸우려던 지휘관의 고뇌에 찬 결단이라고 본다.


군 생활 중에 느낀 것은 군복을 입은 군인들은 거의 ‘전투군인’이지만 걔 중에는 일부, ‘정치군인’도 있고 ‘가짜군인’도 있었다. ‘정치군인’의 폐해는 군부 독재 시절을 겪으며 익히 경험하였다. 하지만, 정작 더 무서운 군인은 군인답지 못한 군인으로서 이른바, ‘가짜군인’이었다. 가짜군인은 훈련을 하지 않고도 했다고 허위로 보고하는 간 큰 행위로, 별다른 군 경험도 없이 눈치껏 어영부영하는 부류들이다. 어쩌면, 그들은 급여나 승진만 바라보고 입대한 군인들이었지, 진정한 투사는 아닐 거다. 이른바, ‘위군’의 대표적인 사례라고나 할까…?


1983년 신모라는 북한군 대위 1명이 귀순하였다. ‘김일성 대학’을 나온 군 엘리트였는데 개인적인 사생활 문제로 월남했다. 그는 귀순 후, 땅굴관련 정보 제공, 북한군 대대의 작전 등 전술적 지식, 박격포 등 공용화기, 각종 통신장비 등 병사들이 다루는 장비까지도 능숙하게 다루어 한국군 간부들을 놀라게 했다. 군사적 측면에서 그의 군사지식은 자신의 계급 이상의 전문성이어서, 국군 장교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자유와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우리 국군 장교들에게는 전술전기를 연마하기에는 다른 할 일과 신경쓸 일이 너무 많았나 보다.



알아서 살길을 찾아 나서는 '각자도생(各自圖生)'

2015년, ‘MERS(중동 호흡기질환 증후군)’라는 질병이 전국을 휩쓸었다. 이때, ‘질병관리 본부’ 등 보건 당국이 허둥거리며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SNS상에 소위 ‘각자도생(各者圖生)’이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이는, 어느 영남 출신 전직 대통령 말처럼, 우짜든지 살아남아야지!”라는 뜻으로, 정부나 지휘관, 윗사람이 무능하여, 아랫사람들이나 조직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생명을 맡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각자 알아서 살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건데…. 상급자 무능에 대한 불신이 나은 산물일 것이다.


세월을 거슬러, 6‧25 전쟁 초기에 한국군은 유독, 중공군에게 호되게 당했다. 한창 북진 중이던 1950년 11월, 국군 2군단의 6, 7, 8사단, 그리고 1951년 4, 5월의 공세에서 6사단, 3군단이나 예하 3, 9사단은 중공군의 공세에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특히, ‘사창리 전투’나 ‘현리 전투’에서는 전장을 지휘하던 사단장, 군단장 등 주요 지휘관이 먼저 도주하였다. 당연히, 전투 결과는 참담하였고…. 그런데, 지휘관이 도망치면 남은 병사는 누구 통제하에 어떻게 살길을 찾겠는가?” 이들 전투의 공통점은, 비교적 상황을 빨리 판단할 수 있었던 지휘관이 ‘하나같이’ 먼저 살자고 꽁지를 내뺐다는 것이다. 당시, 국군 장군들의 군인정신 모습이라니...!?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제일 먼저 탈출하는 세월호 선장

‘세월호’ 침몰 사건 시, 상황을 가장 먼저 아는 선장이 배를 버리고 도망치는 모습이 언론에 나왔다. 세월호 선장의 비겁한 모습과, 전투에서 도망치는 지휘관의 모습이 그것과 서로 다를 바가 없지 않나…?


1951년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가 ‘적성’ 일대에서 벌인 전투는 여러 가지 시사점을 준다. 중공군의 공세에 포위되어 끝까지 저항하다가 마지막 순간, 대대장은, 나는 부상병과 여기에 남을 터이니 각 중대는 살길을 찾아 떠나라!”라고 지시한다. '어디서 많이 보았던 장면 같지 않은가?' 영국군의 모습은 영화 ‘타이타닉’에서, ‘배가 침몰할 때, 배와 운명을 같이하는’ 선장의 모습을 떠올린다. 영국은 그런 나라일까(?) 물론, 그들도 흩어져 도주하다가 대부분이 포로가 되었지만, 그 과정이나 지휘관이 책임지는 모습이 우리 국군과 조금 달랐다.


1951년 2월, ‘횡성 전투’에서, 중공군의 기습공격에 초저녁 짧은 전투에서 보병사단의 주축인 보병 3개 연대가 사라지고 사단 본부와 본부대만 남았다. 누구든 이런 황당한 상황을 보았다면, 전투병보다 그나마 지휘관 가까이 있는 행정병이 되길 원할는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휴전 이후에도 국군에 사병으로 입대하는 이들 가운데 한동안 ‘야전 기피, 행정 선호’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죽도록 행군하는 것보다 밤을 새우면서 행정 일을 보는 게 더 편하거나(?), 쉽다(?)기보다, “여차하면 꽁지를 내빼는 지휘관 옆에 있어야 우짜든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지휘관에 대한 신뢰 아닌 불신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나마, 이런 행정병도 못하는 이들에게는, 군에 가면 적당히 요령을 피워라는 말이 금과옥조였다. 다 큰 자식이 군에 입대할 때, 부모님이 '걱정스레' 꼭 해 주시는 말이었다. 이 말은  대충대충 눈치껏 잘 처신해라는 뜻인데…. 어쩌다가, 일본군에서 ‘해야 할 일을 잘 정리해 놓은’ ‘요령(要領)’이라는 말이, 우리 군에서는 적당히 알아서 잘 헤쳐 나가라는 뜻으로 변질된 건지? “훈련을 잘해서 유사시 적을 물리치겠다"는 생각보다, "군에서 열심히 해 봐야, 용감해 봐야, 적극적 이어 봐야…” 결과는 ‘손해 보거나 고통스럽다’로 느껴진다면? 그리고 불신이 낳은 이런 전통이 계속 이어진다면, 그런 군대는 ‘있으나 마나 한 군대’ 일 것이다.


우리는 군복을 입고 어영부영하는 군데를 '당나라' 군대라고 비하한다. 최근,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 직면하자, 고위직 모두가 도망치고 아무도 남지 않는 황당한 상황을, 아프간이나 이라크 정부군에서, 그리고 월남(베트남) 민병대에서 '역사의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반면에, 어떤 군대는 상대가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위기에서도 당당하게 맞서는 모습도 보았다. 굳이 이스라엘이  제3차 중동전에서 승리할 때 내건 '마사다 요새'를 기억하자는 슬로건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과거 일본군은 소위 '전진훈'이라는 정신적 강압으로 옥쇄를 마다하지 않았고, 중공군도 영웅적 혁명이념을 부추겼으며, 미군과 영군은 각자의 '명예심'에 호소하며 어떻게 '전투의지'를 가져야 하는지?의 문제를 해결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의, 우리 국군 장병들이 이들보다 못할까? 아니다, 어느 정치인이 비아냥 거렸던 목함지뢰 폭발 사고 부상병들이 취했던 성숙한 모습을 보고도 알 수 있듯이, 우리 젊은 이들은 제대로 된 교육과 인성으로 '공정과 공평'의 가치관에 익숙하여, 눈치껏 요령이나 피우며 우짜든지 살 방도를 찾았던' 과거 세대와는 다르다. 그들은, 자존감 (Self Esteem)에 충실하여 더 나은 가치’를 찾아가는 성숙한 자세로 넘어선 지 오래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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