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다. 오늘날 세계 최고의 군대로 성장한 국군이지만, 당시에는 중공군만 만나면 “왜, 그토록 등을 보이고 꽁지를 내뺐는지…?” 와신상담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1951년 4월 ‘리지웨이’에 이어 미 8군 사령관이 된 ‘밴 플리트’는 부임 후, 맞이한 중공군의 4월과 5월의 제5차 공세를 화력전으로 저지하였지만, 중동부 전선에서 국군 3군단이 무참하게 와해되는 등 전 전선에서 연전연패하는 국군의 전투력 부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밴 플리트’는 평소, 국군이 미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방어를 하다가도 중공군만 만나면 어느 순간 뿔뿔이 흩어지는 국군의 모습을 보며, 도대체 “어떻게 훈련을 시켜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가졌다. 그런데, 미군이 강한 이유는, 장비의 우수성도 있지만, 훈련과 전투경험이 많은 군대로서 문제점이 있으면,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하기 때문일 것이다.
중공군의 5차 공세 종료 이후, 양 진영 간 힘의 균형으로 38선 일대를 중심으로 전선이 안정되고, 휴전 논의가 이어졌다. 이에,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기다렸다'는 듯이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 승인과, 한국 정부의 동의로, 국군 10개 사단 재교육 계획을 발표하였다. 전선에서 한창 전투 중이더라도, 순서에 의거 1개 전투 사단을 빼내어 사단장 이하 전원을 완전히 재교육시키고, 교육을 마친 사단에게는 전차와 포병으로 무장시켜 다시 전선으로 내보내는 구상이었다.
그의 재교육 해법은 당시로서는 다소 독특하였다. 그는 먼저, 국군의 전투능력, 즉 “어떻게(How) 싸우는 것인지?”로 전투 환경별 대응에 고민했고, 다음으로는, “왜(Why) 싸워야 하는지?” 즉, 명예와 책임이라는 국가, 사회적 요소에 대한 일깨움을 강조하였고, 마지막으로 “무엇으로(What) 싸우는지?”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다. 마치, 2020년도 회사 경영의 최고 화두로 떠오른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와 얼핏 보면 유사하다.
먼저, 다양한 전투 환경에 “어떻게(How) 싸우는 것인지?”를 훈련하기 위해, 미 8군은 예하 미 9군단에 야전훈련센터(FTC)를 설립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 간부 150여 명을 교관으로 임명하여, 군단의 예비로 전환되는 국군 1개 보병사단씩을 교대로 9주간 입소시켜 사단장 이하 이등병까지 미군 장비 조작 교육, 개인훈련부터 대대 훈련까지 미군 전술훈련기법을 가르치고, 국군을 미국식으로 교육시켰다.
이 프로그램으로, 국군병사들은 비로소 ‘미군 장비로 미군식으로 싸우는 법’을 훈련받았고, 위관급 장교에게는 미군의 지휘자 양성체계를 모방하여, 6.25 전쟁 초기 ‘작전상 후퇴’할 때 와해된 보병, 포병, 전차 등 각급 병과학교를 정비하여 병과의 기능, 역할, 상하좌우 관계를 이해하도록 교육시켰다. 또한, 영관급 참모들의 역량 강화로 상하급 제대와 각 기능 간 유기적인 전투력 운용능력을 배양하려 했다. 하지만, 작전참모 등 당장, 전투 수행에 필수적인 인원들을 단기 코스로 교육을 이수시켜 전선으로 내보내는 한편, 전쟁 기간 중에도 약 2,200여 명의 국군장교를 선발, 미국 보병학교와 포병학교 위탁교육 등 미국내 군 교육기관에 파견하였다. 덕분에, 국군은 전세계에서 지금까지 누적 기준으로 미국에 가장 많은 군 교육생을 파견한 국가로 남아 있다.
또한, ‘밴 플리트’는 무엇보다도, 각 병과학교에 개설한 군사학 과정에서 간부들이 “왜(Why) 싸워야 하는지?” 등 국가와 민족, 명예심 배양 등 국가관과 군인정신을 강조하였다. 이는, 중공군의 공세 때마다 ‘꽁지를 내빼던’ 국군 간부들의 전투의지를 고양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또한, 이승만 대통령에게 장기적인 정규군 간부양성을 건의하여, 국가, 임무, 명예 등에 중점을 둔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본뜬 4년제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하여 군인정신과 군사지식을 함양한 인재를 양성하도록 지원하였다(1951년 10월, 4년제 육사 개교).
마지막으로, '밴 플리트'는 지휘관과 참모들이 “무엇으로(What) 싸우는지?”를 알게 하려 하였다. “전장에서 부하들을 내버려 두고, 혼자만 살려고 도망치는 지휘관들에게 국민들이 신뢰와 지지를 보낼까? 국민의 지지가 없는 국가나 군이 어떻게 지속가능할까?” 지속가능성의 문제는 철저한 자기희생과 헌신이 바탕이었다. 전장에서 “나 혼자 살겠다”며 도망치는 모습은 개인적인 불명예는 물론, 국민과 국가 모두를 공멸케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명예가 더 크게 와닿는 이유다. 또한, “무엇으로 싸우는지?”는, 일본 군대의 잔재로서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진 지휘관의 의사 결정 과정을 ‘지휘 및 참모활동’ 절차에 따르게, 합리적으로 개선하였다. 지휘관 독단보다 참모와의 합리적인 의사결정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였다.
이처럼, 사단 전원이 야전훈련센터(FTC)에 입소하여, 9주간 전투훈련을 실시한 후, 일정 수준에 합격하면, 미군은 국군이 갖고 싶어 하던 전차와 105밀리 곡사포 등 화력 장비와 전투차량은 물론, 막대한 양의 탄약까지 지원한 뒤 전방으로 다시 배치하였다. (다만, 155밀리 포와 같은 신형 중화기는 작은 체구의 한국군이 다룰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과, 적에게 탈취당할 우려로 보급에 신중을 기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미군이라지만, 단시간에 한국군 10개 보병 사단 - 약 12만여 명을 훈련하고 장비하는 지원책은, 그야말로 엄청난 물동량과 예산이 요구되어, 미군 내부적으로도 이견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군을 훈련시키고 장비시켜 전장의 주역으로 활용한다”는 대명제에 모두 동의하자, ‘밴 플리트’는 국군 사단의 병력 증강은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았으나, 전쟁 수행에 필요한 총포류, 공병장비, 통신장비, 피복류 및 차량과 탄약, 유류 등은 군사 물자는, 일본에 있는 미 극동군사령부를 통하여 한국군에게 직접 지원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밴 플리트'에 의한 국군 전면 재교육 효과는 엄청났다. 사실, 1950년 10월 ~ 1951년 5월까지 중공군의 5차례 대규모 공세 때, 국군은 중공군에게 유독 취약한 모습을 보여 중공군의 조롱을 받았고, 미군의 불신까지 샀었다. 하지만, 싸움은 얻어터지며 배운다고 했던가? 국군도 중공군과 전투를 거듭하는 동안 점차 실력이 늘어 중공군의 우회, 침투, 포위 등 정규전과 비정규전의 배합 전술에 점차 적응하였고, 무기 또한 세계 최강이라는 미군의 첨단 장비로 무장하여, 양측이 휴전협정 간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전 전선에 걸쳐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전개할 때, ‘용문산’, ‘백마고지’ 등의 여러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결사항전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는 등, 어느덧, 많은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고 대등하게 싸울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국군이 성장해 가는 동안, 중공군의 고참병이 전투를 거듭하는 동안 소진된 탓도 있지만, 더 큰 요인은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교육훈련, 무기, 장비에 대한 강력한 지원이었다. 1951년 7월, 휴전협상이 시작되자, 미 8군은 국군 10개 사단에 대한 재교육과 미국식 장비로 국군을 ‘잘 싸우는’ 정예 군대로 거듭나게 지원하였다. 그 결과, 국군은 중공군 공포증을 넘어선 것이다. 특히, 여러 전투 중에서도, ‘백마고지’ 전투는 중공군이 기술한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경험 총결’에서도 국군에게 받은 크나큰 패배로 인정하였다.
‘밴 플리트’는 그 이후에도 국군의 병력과 화력 증강을 계속 진행하여, 1952년 말에 국군은 46만 3,000명으로 증강되었는데, 1953년 1월, 때마침 출범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전 조기 종결’, ‘주한 미군 감축’과 ‘국군 강화’를 주요 정책으로 하여, ‘밴 플리트’의 정책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덕분에 국군의 기동력과 화력은 급격히 향상되었다. 그 후, 국군은 휴전을 전후하여, 정규 18개 사단으로 증강되어 오늘날과 같은 군구조로 자리 잡았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갓난아이’ 같은 국군을 세계 최강의 군으로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밴 플리트’ 장군을 “대한민국 육군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극찬했다.
‘밴 플리트’는 한국을 위해 공헌하였지만, 외아들을 한국전쟁에서 잃었다. 그의 아들은 B-26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하여 1952년 4월 격추되어 실종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1992년, ‘코리아 소사이어티’라는 한미친선단체가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밴 플리트’상을 제정하여, 한미 양국관계 증진에 기여한 인사들을 찾아 수상하고 있다. 지금까지,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 ‘헨리 키신저’와 김대중 전 대통령, BTS 등이 수상하였다.
당시, 국군은 통수권자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로 ‘북진통일’이 전쟁의 목표였다. 국군은 미군으로부터 훈련과 장비를 보강받으면서도 계속해서 북진을 주장하고 기동전을 구상하였다. 반면에, 38도선 회복에 만족하고 더이상 확전을 원하지 않는 미국은 이를 철저히 말렸다. 결국, 1953년 휴전 협정이 막바지에 이르러 한국 측은 분단을 기정사실화하는 ‘휴전’ 자체를 거부하였고, 한국은 협상 당사자에서 제외되었다. 뿐만아니라, 한국에 대한 불신으로 인하여 미국의 군사원조는 한동안 방어용 무기체계 제공에 국한하였다.
전쟁을 치르면서 성장한 남, 북한의 군사력 발전과정도 매우 이채롭다. 1951년 7월, 휴전 회담이 진행된 이후, 공산군은 ‘갱도 진지’로 생존성 향상에 치중하였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강력한 화력을 가진 미군은 국군의 교육 훈련 향상에 중점을 두었다. 이로 인해 종전 후에도 양측이 군사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이 달라져서, 북한은 땅굴, 재래식 무기부터 핵 개발까지 나아간 반면, 한국은 교육훈련에 치중하여, 미국이 개발한 첨단 전투기법을 이용한 각종 전쟁연습 등 연합훈련을 실시하며 싸우지 않고도 전술전기를 연마하였다.
쉽게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신생 독립국이 강한 전투력을 지닌 강군을 육성하려면 많은 비용과 오랜 시간에 걸친 엄청난 국가적 노력이 필요하다. 비록 한국은 뜻밖의 전쟁으로 고통을 받았지만, 당시 군사적으로 세계 최강국인 미군으로부터 미국식 군 편제와 무기, 물자 그리고 군사 전술 교리 등을 직접 훈련받고, 미군 장비로 새롭게 무장하였다. 그리고 연일 계속되는, 전투를 통하여 ‘전쟁 프로’ 중공군과 교전하며 중공군 전술교리도 덩달아 익혔다. 미‧중이 싸우는 통에 ‘졸지’에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의 군대가 된 것이다.
국군의 전투력은 베트남 전쟁 참여로도 확인된 바 있다. 이 같은, 국군의 증강 사례는, 미국의 글로벌 군사전략에서 ‘자국군 능력강화’로 미국의 부담을 덜려는 구상의 모범적인 모델로 자주 소개된다. 베트남 패망이나 아프간 항복사례에서 보듯, 부정부패한 군이나 무능한 정권에게 수십 년간 수백조 원을 투자하더라도 결코 강군이 될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하게 경제와 군사적 발전을 이룬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