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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Aug 11. 2024

한국전은 미‧중전쟁 (제24화)-휴전회담과 고지쟁탈전

휴전 회담과 진지전

한국전쟁에서 “미‧중 양국 지도부는 비기길 바랐을까?”     

‘승리’와 ‘명예’의 가치를 저울질하였던 미국

전쟁은 국가의 총력전이며, 그 목적은 ‘승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 지도자가 ‘국가 전략’으로 ‘전쟁목표’를 설정하면, 군부는 지도자의 ‘전쟁목표’에 맞게 ‘국방(군사) 전략’을 수립하고, 예하 부대들은 ‘군사전략’에 따라 싸우는 방법(How to fight?)”을 결정하고 그대로 정교하게 시행하면 된다. 그런데, 6‧25 전쟁을 돌아보면, 미국 지도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마지못해 참전한 분위기가 역력했다. 이는, 애초부터 소련과의 갈등을 원치 않았던 ‘트루먼’ 대통령이, 서구에 대한 소련의 위협을 내세우며, 유럽방위에 우선하기 위해한국에서 국력과 군사력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견지한 탓이다. 


그는 한반도 ‘분쟁 당사자’로서 적극 개입보다, 그저 유엔의 일원으로 ‘공산주의의 세계 적화전략을 막고 현상 유지’라는 명분에 집착한 정치적 계산으로 전쟁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스탈린의 계산은 달랐다. 그는 처음부터 미국과 중국을 한국전쟁에 묶어 놓으려 했다. 그 실례는, 미국이 북한군 남침을 규탄하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 유엔군 파병 안을 제안했을 때,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미국이 주도한 유엔군 파병 안 통과까지도 수수방관(?)하였다.


결과적으로, '트루만'은 북한의 남침에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며 동맹들과 함께 ‘허겁지겁’ 유엔의 깃발 아래 끼어들었지만, 전쟁 내내 '38선 회복'이라는 ‘현상 유지’에만 매달리며, 비록, 맥아더의 북진을 용인하기 했지만 ‘전쟁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수동적인 자세로 일관하였다. 당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으로,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막강한 육‧해‧공군력의 초강대국이었지만, 정치, 외교, 군사적 우위를 살리지 못하고 허둥대었다. 대통령의 국가전략이처음부터 비기는 것이 전쟁 목표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전쟁에 관한 한, 미국의 국무, 국방 정책입안자들은,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보다, 이념적 대결 등 ‘정치적 가치’의 평가에 더 주안을 두었다. 자연스레, 대통령의 국가 전략에 기초하여, 합참 등 한국전 관련 미군 수뇌부의 군사전략은 ‘38도선 회복이었다. 애당초, 한국민의 염원인 “군사적 승리와 한국통일”의 목표 따위는 없었다. 단지, 현지 사령관 맥아더만, 한국전쟁의 군사적 승리가 바로 유럽 방위라며, 적극적 공세 입장을 주장하긴 하였지만… 


그런데, 예상 밖의 엄청난 전력을 가진 중공이 개입하자, 맥아더는 즉각 '트루만'에게 “유엔이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하였고, 미국도 ‘침략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유지한다’고 발표하였으니, 이에 맞추어 ‘만주 폭격’ 등 강력한 대응”을 촉구하였다. 하지만, ‘트루먼’과 합참은 중국 본토 공격을 포함한 군사적 승리를 추구하기에는 '그 대가가 너무 크다'라며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다. 이에, 맥아더는 대통령이 비기는 전쟁을 위하여 미군 병사들을 희생시키는(Die for Tie)’ 이상한 전략을 취하고 있다”라고 비판하면서 둘 사이는 틀어졌다.


그런데, '맥아더'가 지휘하던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는 미군이 중공군의 수차례 기동전이 끝날 때까지 승리는커녕, 전투력 보존에만 급급했다. 이처럼, ‘맥아더’가 소련이 아닌 중공과 북한과의 싸움에서 쩔쩔매는 바람에 ‘트루먼’ 행정부는, ‘정치적 가치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결국,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해임은, “한국전쟁의 성격과 이를 수행하는 방식”에서 현지 지휘관과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의도를 따르는 미 합참과 전략적인 견해 차이에, 트루먼 행정부가 '군사적 승리'보다, “명예로운 휴전”으로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기로 한 결정에 따른 것이다. 이는 ‘전쟁과 승리에 대한 견해’를 새롭게 갖게 해 준 것으로, 북경의 ‘마오쩌둥’이 현지 사령관 ‘펑더화이’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한반도 적화를 노린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중공군의 5차 공세가 끝날 즈음, 미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한국전쟁 정전 담판”을 ‘트루먼’ 미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미국의 적은 소련인데참전도 안 한 소련이 뒤에서 조종하는 전쟁에 국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다. 당시, 미군은 육군 18개 사단 중 8개 사단을 한국전에 투입했다. 미국에게는 유럽이 우선인데, 만약 유럽에서 소련이 도발하면 감당하기 어려웠고, 다른 유엔 참전국도 한국전에 병력 증원이 어려웠던 점도 고려했다. ‘트루먼’의 승인하에, '애치슨' 국무장관이 소련과 중립국에게 중국과 정전 의사를 흘렸다.     



중국의 자신 없는 전쟁 지속능력

한편, 1950년 10월, 한국전쟁에 기습 참전한 중공군은, 자신들의 참전을 알리고 전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1950년 10월부터 1951년 5월까지 5차례에 걸쳐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여 소기의 성과는 거두었다. 그러나, 공세가 성공한 것 이상으로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도 뒤따랐다. 이제, 중공군에게도 전략, 전술적 변화가 불가피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1951년 6월, 중국 지도부에도, 이제 유엔군이 38도선 이남으로 철수했으니중앙군사위원회도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 만큼 전쟁을 끝내자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마오’는 현지 사령관 ‘펑더화이’의 의견을 구했다.


‘펑더화이’는, 지난 8개월간 5차례 공세에서 엄청난 인원물자 손실이 있었다전쟁이 길어지면 작전보급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라고 우려하였다. 미군도 같은 문제에 직면하겠지만 모든 면에서 지원 역량이 우수하니 우리보다 어려움이 덜할 것으로 판단했다. 또한, 미국은 국제 정치적인 체면’ 때문에조금도 양보하지 않을 것으로장기전에 돌입하게 되면 평균 2개월에 한 번꼴로 반격해서 적을 격퇴해야 되는데그러려면 매월 3 명 정도의 보충병과 연 7~8 달러 전쟁비용이 필요하다”라고 보고했다.


‘마오’에게는 인력이야 충분하지만, 수억 달러의 전비를 감당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마오’는 지구전을 수행하면서담판을 통해 전쟁을 끝낸다며 싸우며 대화한다(邊打邊談)”는 방침을 정했고, 김일성도 이에 동의했다. 마오는 ‘저우언라이’를 스탈린에게 보내 이를 설명하고, 중국이 필요한 비행기, 야포, 탄약 등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스탈린’은 이를 수락하며, 회담이 계속되는 동안만 싸움을 멈추고대화가 멈추면 적극적으로 싸우라라고 주문하였다.


그러면서, ‘스탈린’은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는 데 30일밖에 걸리지 않았는데미국이 한국에서 2년 동안 싸우면서도 조그마한 한국조차 확보하지 못하여벌써 반전여론이 들끓고 있다”라고 지적하고미국은 큰 전쟁(大戰)’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중국이 전쟁을 계속하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라고 전쟁 지속을 계속 독려하였다. 1953년 스탈린의 죽음 때까지 소련의 눈치보기에 급급했던 중공은 이를 수용했다. 


제5차 공세가 종료된 1951년 중반, 미국의 ‘종전 바람’에 대하여, 소련의 지원을 확보한 중국이 ‘대화와 전쟁’ 방침으로 답했다. 이에, 양측은 남과 북, 미‧중 4자 간에 정전회담이라는 설전(舌戰)을 이어 갔고, 입장 차이로 대화가 막히면, 양측 군 수뇌부는, 전선의 모든 고지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지역을 확보하고자, 방어진지를 확보하고, 탈취당한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이 고지를 확보하고저 고지를 탈취하라!”는 명령을 남발(?)하였다. 양측은 '고지 쟁탈전' 등 전투를 압박 수단으로 사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고, 다시 대화를 재촉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매 전투는 휴전 회담의 주요 변곡점이 되었다. 이제부터 대화는 피의 대가’가 되었다.     


'휴전'의 수단으로 바뀐 '고지 쟁탈전'     

힘의 균형에 따라 38도 선에서 전선이 교착되고, 휴전 회담이 시작되자, 회담장의 말싸움 못지않게 동해안에서 서해안까지 230여 km (155마일)의 접촉선 어디에서나 밤낮으로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전개되었다. 전투의 양상은 주간에 국군과 유엔군이 막강한 화력지원하에 정면 공격하여 목표를 탈취하고 재편성과 방어진지를 구축하면, 야간에는 중공군이 주도권을 가지고. 우회기동과 역습으로 다시 뺏는 양상으로 이런 모습이 정전시까지 무려 2년 동안 반복하였다. 이 모습은, 제1차 세계대전 시의 비참한 ‘참호전’의 ‘데자뷔’였다.   

       

1차 대전 시 프랑스군의 참호

역사상 가장 참혹한 진지전(참호전)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6년 2월부터 12월까지, 10개월 동안 프랑스군과 독일군이 격전을 벌인 ‘베르당 전투’로 무려 70여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서부전선 이상없다! (Im Western nichts Neuues)'라는 독일 영화가 있다. 독일의 입장에서 서부는 프랑스 전선인데, 이상이 없다는 게 아무 이상이 없는 게 아니라 전선의 변화가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전선이 정체되었으니, 양측 모두 동일한 공격과 후퇴를 무한 반복하였고, 남는 것은 낭자한 유혈이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이 희생된 비참한 전쟁이었다. 


 1951년 부터 휴전회담 기간 1년 동안, 대부분의 휴전 이슈는 합의 되었으나, 1952년 들어, ‘포로교환’ 문제로 설전(舌戰)이 교착되자, 전선에서는 이를 풀기 위해 '혈전(血戰)'이 가동되었다. 한국전에서 '기동전'이 고착된 '진지전'으로 전쟁의 양상이 바뀌자, 자유와 공산 진영의 군인들은,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공격!”을 외치며 몸을 던졌다. 1952년 여름부터 이미 진지를 강화하고 병력을 대폭 증강한 공산군은 서부전선 베티고지, 벙커고지, 중부전선 불모고지, 백마고지, 수도고지와 지형능선, 동부전선 351고지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고지, 모든 전선에서 일제히 공세를 재개하였다.


유엔공군기의 공중 폭격과 포격으로 민둥산이 된 백마고지 모습

이 중에서도, 대표적인 전투는 '백마고지' 전투였는데...국군 9사단이 확보하고 있던 ‘백마고지(395고지)’는 광활한 철원평야를 감제할 수 있는 중요한 전초진지였다. 공산측은 아군의 관측에 완전히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려 이 고지를 탈취하고자, 중공군 제38군이 1952년 10월 6일부터 10일간 밤낮으로 공격하였다. 그리고 이에 맞선, 국군 9사단은 12차례 이 고지를 빼앗기고, 다시 빼앗는 치열한 공방전으로 끝까지 고지를 고수하였다. 전투가 얼마나 치열하였던지, 유엔군은 10월 9일 하루에만 1만 8,000여 발의 포탄과 항공화력으로 고지를 폭격하여, 고지의 높이가 몇 m 낮아져 속살이 하얗게 들어나고 마치 ‘백마’처럼 변하여 ‘백마고지’라고 불리게 되었다. 양측의 피해도 엄청나, 중공군 약 1만여 명(추정), 국군도 3,500여 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 때 유독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 중공군의 조롱과 미군의 불신까지 샀던 국군이, ‘밴 플리트’의 재교육과 장비 보강으로 더욱 정예화되어, 휴전협정 간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전 전선에 걸쳐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전개되자, 국군의 용전분투는 그 빛을 발하였다. 국군은, ‘용문산’, ‘백마고지’ 등의 수많은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결사항전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중, 백마고지’ 전투는 중공군이 기술한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경험 총결에서도 국군에게 받은 유일한 패배로 인정하였다.         


투항하는 중공군 포로들

사실, 웬만한 전투에서 서로 이겼다고 주장하는 속성상 패배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만큼 큰 피해를 입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전투를 높게 평가한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전승 교훈집’을 만들어 전군에 배포하는 등 전쟁 장기화로 피로감을 보이는 미군들에게 불굴의 투쟁 정신의 귀감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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