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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Aug 12. 2024

한국전은 미‧중전쟁 (제25화)-중공의 신화 '상감령'

상감령 전투의 진실

중국의 ‘신화’, ‘상감령 전투’


'신화 창조'와 '망령' 소환

2019년, 미-중 무역분쟁으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을 반복적,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이에, 시진핑’ 주석이 상감령’ 정신을 본받자며 공개적으로 반발하자, 미국이 '기술 도둑'으로 지목한 중국 최대의 통신업체 ‘화웨이’의 회장 ‘린정페이(任正非)’도 ‘상감령 전투처럼 미국과 맞서겠다’는 의지로  위기돌파를 다졌다. 또한, ‘환구시보’도 홈페이지 환추왕(網)에 ‘중미 양국 무역전쟁은 화해 방식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사설로 항미원조의 상징으로 선전한 ‘상감령 전투’에서 승리를 환호하는 사진까지 싣고 거듭 투쟁을 강조했다.


'상감령 영웅 진지'팻말과 승리에 환호하는 중공군

그런데, 이들이 왜 이렇게 한결같이 '상감령'을 외치고 있을까? ‘상감령 전역(戰役)’은 중국인에겐 큰 의미이지만, 우리에겐 매우 생소하다. 그 이유는, 우리 6.25 전사(戰史)는 강원도 철원군 김화 지역에 있는 '철의 삼각지'(철원―김화―평강을 연결하는 삼각형 지역) 내의 오성산에서 뻗어 내린 능선을 ‘저격능선’과 ‘삼각고지’를 분리하지만, 중국은 오성산 아래의 삼각고지와 저격능선은 물론, 그 두 곳을 연결하는 완만한 고개의 지명인 ‘상감령’까지 포함하여 전체를 ‘상감령(上甘嶺)’으로 부르고, 그 전투를 적극 홍보한 탓이다. 전사를 커버하는 범위가 다르니 당연히, 양측에서 발표하는 각종 전과 등 통계 자료에 큰 차이가 난다. 중부 전선의 ‘저격능선’과 ‘상감령’은 1953년 휴전 당시 전선 조정으로 지금은 북한 지역이 되었다.


DMZ 북쪽의 오성산과 저격능선, 삼각고지(철원 승리전망대 관측) 중국은 양 고지 사이를 ‘상감령’으로 표시


전선에서는 초기의 '기동전'이 마무리되고 휴전 협상이 시작되는 동안, 전쟁의 양상이 '진지전'으로 전환되자 중공군은 기상천외한 ‘갱도전’을 준비했다. 중공군이 화력 열세 속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갱도전’은 미군에게 매우 생소하였다. 미군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비참한 '참호전'을 겪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이오지마’ 등지의 태평양 도서에서 일본군의 '동굴 진지'로 많은 피해와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경험으로 얻은 ‘진지전’이라는 고정관념으로, 중공군의 새로운 ‘갱도 진지’ 전술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이에 비해, 중공군은 국민당군과 국-공내전 시에 이미 '갱도 진지' 전술로 재미를 보았던 군대였다.


물론, 미군은 '상감령' 전투 동안 약 200여만 발 이상의 화력을 쏟아부어 삼각고지를 2m 이상 낮출정도로, 국공내전 당시의 국민당 군과는 화력면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하지만, 공중폭격이나 대규모 포병 사격이 가능한 지표면 위와 달리, 땅속이라면 화력에 의한 지원이나, 각종 장비 운용조차 불가능하니, 화력이 빈약하였던 중공군에게 땅속의 전투는 해볼 만한 전투였다. 다만, 갱도 진지의 약점은, 물은 물론식량 등 보급지원이 큰 문제였다. 그러니, 갱도 전술로 지하에 체류하는 군인들은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중공군 작전을 담당하는 제1 부사령관‘ 천껑’의 강한 건의를 받은 ‘펑더화이’도 갱도를 택했고, ‘마오쩌둥’도 화력의 피해를 감안하면서도 인명피해에는 무심하였던 것 같다. 그는 “‘고지를 지킬 수 있나없나?’ 하는 문제는 해결되었다답은 갱도를 파는 것이다우리가 이 층으로 굴을 파면상대가 공격하면갱도로 들어가고상대가 위층을 점령하면 우린 아래층으로 간다상대가 진지에 들어오면 우리는 반격한다우리는 이처럼 흙을 이용하여 대포에 대항하는 것이다상대는 우리를 어찌할 수 없다며 갱도 공사를 승인했다.


마오의 승인을 받은 제1부 사령관 ‘천껑’은 즉각 갱도 건설을 전 중공군에게 지시하여, 정전회담이 시작된 1951년 여름부터 1952년 중순까지 1년여 동안 전방 각 고지에서 그야말로 엄청난 갱도용 진지 공사를 벌였다. 중공군 지휘부는 전 전선에 걸쳐 은밀한 대규모 진지 공사를 구축하는 동안, 스스로를 만리장성을 구축한 민족이라며 중공군 병사들에게 강한 자부심을 안기면서, 갱도를 진지로 진화시켰다. 


중공군이 선전용으로 게재한 지하갱도 속 연대도서관

중공군의 갱도 진지는 보통의 참호선 공사와 달랐다. 어차피, 장기간 체류를 위한 공간이었기에, 중공군 사령부는 갱도 건설의 목적을, 방공, 방포, 방독, 방우, 방조, 방화, 방한의 7대 목표를 두었다. 특히, 폭 1.2m, 높이 1.7m의 갱도에 군데군데 갱도 입구와 출구는 물론, 지휘 통신실과 주방, 화장실, 목욕 시설까지 완비토록 하였다. 또한, 체류진지의 참호 속에 또 다른 갱도를 은밀히 구축하여, 새로운 갱도 공간 속에 병력을 잔류하다가 역습 시 협공에 참여하는 등 전술적 변화를 도모하였다. 이제, 이 변화는 교묘한 화력 대 갱도의 전투로서 진지전의 또 다른 모습으로, ‘고지 쟁탈전’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화력전'에 대응하는 '갱도전'

1952년 10월, 미 8군 등 유엔군은, 전선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중공군의 공세를 수세로 전환시키고, 향후 작전에 유리한 몇몇 전초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강원도 철원군 김화 북방 오성산 일대의 중공군 전초 중에 삼각고지와 저격능선 일대를 공격하였다. 국군과 미군이 우세한 화력으로 맹공을 퍼붓자 중공군도 ‘오성산’ 사수를 외치며, 일대 고지들에 미리 준비된 갱도 진지에서 지구전을 벌이며, 6‧25 전쟁 3년간 전투 중에서도 가장 참혹했다는 저격능선’ 전투가 시작되었다.


중공군은 미군과 국군이 항공, 포병 사격을 가하며 고지를 점령당한 이후에도, 낮에는 동굴 진지에 은거해 있다가밤이면 땅굴에서 나와 진지를 점령한 아군을 공격했다. 이처럼, 야간에만 출몰하여 미군과 국군에게 조용한 역습이라는 고통을 가하고 사라지는 갱도 진지 전술은 교묘하기만 했다. 당시, 국군 제2사단장(정일권 중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 밤마다 근거리에서 총탄이 날고 수류탄이 터졌다총검과 야전삽으로 맞붙는 백병전이 다반사였다27번 빼앗기고 28번 탈취했다그런데그 과정에서중공군의 역습 전환 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일부 중공군이 바로 동굴진지에 숨어 있다가 나와 역습부대와 합류하였다”라고 술회하였다.


국군은 혼전 중에 이상함을 느끼고, 포로를 심문하여 갱도 전략의 실체를 파악했기에, 갱도 입구를 막은 뒤 갱도 내로 기름을 붓고, 폭약, 유황탄이나 유독가스를 주입하고, 화염방사기를 사용하는 등 갖은 공격으로 갱도 내 중공군 소탕 작전을 펴며, 저격능선의 고지 셋(A‧Y‧돌바위) 중 두 곳(80%)을 확보하며, 승리를 지켰다.


그러나, 중공군의 ‘갱도 작전’에 말려든 미 7사단은 고전했다. 낮에 미군이 진지를 점령하면 갱도 속에 숨었다가, 밤이면 유령처럼 나타나 자신들을 덮치는 중공군의 갱도 전술에 미군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물과 식량도 없이 갱도 속에서 견딜 수 있었을까?’ 미군의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극단적인 전법이어서 악전고투를 면치 못하였다. 낯선 전장에서 중공군이 전투력, 지형, 생존성 향상 등에 최적화한 전법이, ‘화력과 기동으로 적을 제압한다’는 정형화된 공식에 집착하던 미군을 압도하였다. 기공이 정공을 압도했다. 


공격 개시 전, 5일 정도 작전으로 전초진지를 점령한다며 200여 명의 피해를 예상하였지만, '공격은 지지부진하고 인명 피해가 속출한다'는 종군 기자들의 전언이 쏟아지자, 미국 본토에는 “무의미한 전쟁에 병사들을 희생시킨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결국, 10월 25일 미 9 군단장은 미 7사단의 ‘삼각고지’ 공격을 포기하고 그 임무를 국군에게 넘겼다. 임무를 전환받은 제2사단은, 며칠간 ‘삼각고지’를 공격하다가 고지의 가치는 낮은 데 비해희생이 많다며 ‘삼각고지’ 작전을 중단했다. 만약, 중공군이라면 사상자가 많다고 철수했을까? 실제, '장진호 전투'에서 수만 명의 중공군이 동상으로 사상되어도 마오쩌둥은 "마지막에 우리 편이 한 명이라도 살아 있으면, 우리가 승리한 것이다"라고 독려한 적도 있는데...


40여 일간의 격전 끝에 미군이 철수하자, ‘오성산’ 일대 지하갱도 진지는 단숨에 중공군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전쟁 내내 미군의 압도적인 포격과 항공폭격에 혼쭐이 난,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와 그 부하들의 주 관심사는 미군 화력으로부터 ‘생존성 극대화’였는데, 갱도를 구축한 ‘상감령’에서 그 결실을 맺었다고 의기양양하였다. 중공은 기장 비인간적인 '상감령' 전투를 6.25 전쟁에서 가장 승리한 전투라며 이를 자랑하였다. 


덩달아 일반 중국인도, 몸서리치게 시달려 온 미국의 무시무시한 공중폭격이나 포병 공격을 그들이 만든 갱도 진지에서 극복하고 미군을 물리쳤다는 사실에 흥분하였다. 그러니, 중국이 갖는 ‘상감령 전투’ 승전의 의미는 단순히, 전과가 얼마냐?” 지역을 얼마나 확보하였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중국인들은 ‘상감령 전투’를 신화화하였다. 이게, ‘항미원조’ 전쟁의 상징으로 선전해 온 ‘상감령 전투’의 개략적인 모습이다.


휴전 후인 1956년 ‘마오쩌둥’의 지시로, 중국은 상감령 전투는 신 중국이 최강 미국과 싸워 이긴 스토리라며, 이 전투를 미국 공포증을 가진 중국인에게 미국에 승리한 기념비적 존재로 부각하며, 홍보영화 제작으로 신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천안문 광장에 위치한 국가박물관에는 탄피 반흙 반인 오성산 흙을 뜨다가 그 치열함을 전시하고 있다. ‘마오쩌둥’은, 중공군이 압도적인 미군 화력을 극복하기 위해 오랜 기간 엄청난 희생과 노력으로 전선의 고지들에 지하갱도 진지를 구축하여마침내 미군을 이긴 승리라며, ‘미국 극복’의 계기로 보는 관점에 큰 의미를 부여하였으며, 또한, 미국과의 휴전협정은 미국의 콧대를 꺾은 사건으로이후 미국 사회가 중국을 전략적으로 존중하게 만들었다고 강조하였다. 죽의 장막 속의 중국인은 세뇌되었다.


‘상감령’은 미국에 승전했다는 자부심으로 이른바, ‘굴기’의 원조가 되었다. 미국이 미중 무역분쟁 등으로 중국의 핵심 이익에 충격을 줄 때마다, 중국은 이 과거의 전쟁 망령을 오늘에 소환하여,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대가 없는 기개로 중국의 근본이익을 수호하기 위해결연한 의지로 중국 사회를 응집시키며 결속을 다지자이제과거와 달리 무기와 탄약이 충분하니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항하자라는 결의를 다진다. 뿐만 아니라, 앞서 '오바마'가 국빈 방문한 '후진타오'를 위해 베푼 국빈 만찬에서 초청된 피아니스트 '랑랑'은, 가사 내용이 '미군을 때려잡자!"는 영화 '상감령 전투'의 주제가인 '나의 조국'을 보란 듯이 연주하였다. 중국 '제2의 애국가'로 불리며 애창되는 이 노래의 이면에는 '마오쩌뚱'의 '신화화' 노력이 있었다.    



절반의 진실인 ‘상감령’ 신화 

1958년, 북한에서 철수하는 중공군이 1951~1952년간에 38선 전역의 전략적 요충지에 구축한 '오성산' 등 모든 갱도 진지를 북한에 넘겼다. 진지 인수 시에 김일성은, 특별히, ‘오성산’을 언급하며, 국군 수 개 사단과도 바꾸지 않겠다”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만큼 ‘오성산’은 전략적 가치가 큰 지역이 이었다. 그렇지만, ‘상감령’ 신화는 절반의 진실이다. 그 속에는 많은 과장과 거짓이 섞여 있다. 백선엽은 회고록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에서 ‘저격능선’ 전투에 관해 아래 내용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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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한반도에서 벌였던 이 전투를 ‘상감령(上甘嶺) 전역(戰役)’으로 부른다. 미국에 대항하며 북한을 지원하기 위한 전투, 즉 ‘항미원조(抗美援朝)’라고 중국이 적고 있는 한반도 참전 전투 중에서 ‘최고의 승리’를 거둔 싸움이라고 스스로 선전하고 있다.

나는 저들이 왜 그러는지 의문이다. 저들은 싸움에서 졌고, 희생 또한 아군의 2배에 이를 정도로 막대했다. 그래도 결국 휴전 직전에 이곳을 차지했기 때문에 그렇게 적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싸움의 승패는 분명했다. 1952년 늦가을에 벌어진 ‘저격능선’ 전투에서 중공군은 패퇴했고, 고지를 아군에 넘겨주고 말았다. 분명한 패전이면서 왜 승전(勝戰)으로 적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종의 자체 선전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내용도 계속 우기면 진실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자체는 영원히 숨길 수 없는 법이다. 공산주의 국가들이 제 입맛에 맞게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항상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늘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이다. 자신의 입맛에 따라 현상과 사실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우기는 버릇이 있는 편이다.

당시, 고지전에서 중공군과 북한군은 결코 뚜렷한 승세(勝勢)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아군에 밀리는 편이었다. 중국 측은 그런 상황 속에서 ‘상감령 전역’이라는 거짓 신화를 만들어 냄으로써 자신들의 전과(戰果)를 부풀리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8개월이 지난, 1953년 7월 휴전 직전, 상황이 재역전됐다. “휴전 직전 중공군의 최후 공세에 국군은 저격능선에서 전술적으로 후퇴싸워 보지도 않은 채 적에게 넘겨줬다. 1952년 10월에 확보한 고지를, 1953년 7월, 휴전선 확정동안 들쑥날쑥한 전선을 조정하기 위해 ‘거저’ 내어 주며, 상황은 종료되었다.


38도선 전역에서 갱도전을 펼친 중국은 비록엄청난 희생이 있었지만 실패는 아니다라고 자평한다. 그들은 물과 식량이 부족하고 모자라는 가운데서도 잘 준비한 진지에서 압도적인 미군 공격을 격퇴한 정신력을, 이런 식의 승전을 통하여 과시하고자 덧칠된 신화를 창조했다. 상감령 전투는 어느덧, 전 중국적인 신화로 미화되었다. 하지만, 불멸의 투혼으로 그들과 대등하게 싸웠던 우리 군의 기억은 그들의 교묘함에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 이런 상태라면, 우리 후손은 우리들을 선대의 역사를 망각한 세대로 기록할지도 모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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