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천 전투
한국전쟁 휴전 이후 7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지난 2021년, 한국의 한 영화수입 배급업체가 중국이 제작한 ‘1953 금성(金城) 대전투(원제: 금강천)’라는 영화를 수입하여 전국 영화관에 배포하려 하였고,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금강천(金剛川)은 금성천(金城川)의 중국식 명칭이다. 하지만, 영화 제목과 달리, 이 전투의 우리 측 명칭은 ‘금성(金城) 돌출부 전투’이다. ‘금성(金城) 돌출부’는, 유엔군의 1951년 추계공세 간 국군이 탈환한 곳으로 북쪽 공산 측(금성 방향)으로 10km 정도 반타원형으로 볼록하게 돌출되어 22km에 달하는 접촉선을 가져 서부 전선과 중동부 전선 중에서 중공군으로서는 어떻게든 ‘직선화’해보려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이 전투에는 국군의 진한 아픔이 서려있다. 1953년에 접어들어 휴전이 임박하자, 마지막으로 유리한 지역을 선점하려는 ‘펑더화이’ 중공군 사령관이, “확실하게 준비하고, 호되게 몰아간다”, “유리하면 수비하고, 불리하면 상대 전력을 최대한 소모하고 포기한다”는 등의 ‘살벌한’ 전역 지침을 하달하며, 전 전선에 걸쳐 유엔군과 국군을 압박하는 마지막 공세 작전을 펼쳤는데, 이 전투도 중공군 공세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전투는 2단계로 진행되었다. 중공군의 제1차 공세는 국군 제2군단이 점령하고 있는 ‘금성’ 지역 돌출부 제거를 위하여, 1953년 5월 초순 중대 규모로 전초기지 탈취에 주력하다, 제2차 공세인 5월 말경부터 6월 중순까지 대대 규모 작전으로, 국군 방어거점 탈취 공격으로, 전선의 정세는 그저 '치고받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한‧미‧중‧북한의 정치권에 휴전협정으로 포로교환에 대한 서명이 임박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18일 새벽 기습적으로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하였다. 이 같은, 한국 정부의 전격적인 조치에 대해 분노한 ‘마오쩌둥’은 6월 19일, ‘펑더화이’에게 “반드시 행동으로 중대한 표시를 보이고, 적에게 강력한 압력을 가함으로써 유사한 사건이 다시 발생치 않게 해야 함과 동시에, 아군이 전장 주도권을 장악하라”라는 강력한 지시를 내렸다. ‘펑더화이’는 즉각, “이승만 군대에게 막대한 타격을 가하여 1만 5,000명 이상 섬멸”을 건의하였고, ‘마오’는 “위군(허수아비 군대, 한국군을 지칭) 1만 이상을 섬멸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를 승인하였다.
이처럼, 중공이 국군을 공격 목표로 특정한 것은 ‘휴전을 반대’하는 이승만과 한국민에 대한 ‘응징의 표시’였다. ‘펑더화이’로서는 휴전협정 타결을 앞둔 시점에서 유엔군과의 대규모 전투로 자칫 휴전협상의 판이 깨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미군이나 유엔군에 대한 대규모 공격은 시도하는 대신, ‘해 볼 만하다’고 판단되는 국군을 선택하여 공격하기로 하였다. 여기에 때마침, 한국전선에 교대차 새로이 증원되는 중공군 병사에게도 ‘전투경험’을 쌓게 하는 효과를 노리고, 지금까지 국군이 방어하는 지역 중에서 비교적 성과가 있었고, “휴전 이전에 가장 갖고 싶었던” ‘금성 돌출부’ 지역을 공격목표로 선정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진행된 ‘1953년 하계 반격 전역’이라는 3단계 공격작전의 주역은 중공군 제20 병단 예하 5개군 15만여 명의 병력이었다. 제20 병단은 ‘금성 돌출부’를 3개 방면에서 공격하여, 이를 직선으로 만들며 돌출부 내에 방어 중인 국군 수도, 3, 6, 8사단 등 4개 사단 약 5만여 명을 궤멸시키기 위한 작전목표를 세웠다. 일반적으로, 공격 작전의 경우에 공격자와 방어자의 비율을 3:1로 보기도 한다. 당시, 국군은 잘 구축된 방어진지를 갖고 있었지만, 중공군은 수년간의 국공내전으로 풍부한 전투 경험이 있었고 '신 중국'으로 들떠 있었다.
이 공세는, 휴전 직전에 감행된 중공군의 최후 공세로서 앞서 전초전인 1단계 공세나, 2단계 공세와는 공격 강도가 전혀 달랐다. 병력과 화력이 모두 우세한 중공군은 이미, 1, 2단계 공세에서 ‘금성 돌출부’ 접촉선에서 유리한 전초 고지를 점령하였으므로, 이제 일부 병력이 각 사단 전면의 전초진지를 공격하며 사단 지휘부의 관심을 끄는 동안, 주 병력을 사단, 연대 주 지휘소나 주요 진지로 침투시켜 후방을 차단하는 전형적인 '우회 침투 포위' 전술을 구사하였다. 국군은 적의 공세에 한동안 잘 버티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인접부대 측방이나, 후방이 무너지면 더 깊숙한 후방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 반복되었다.
공세 개시 불과, 이틀 만에 돌파구 내 국군 2군단이 사실상 와해되어, 철수할 정도로 ‘금성 돌출부’ 상황이 악화되자, 미 8군은 국군 4개 사단과 미 3사단 및 일본 주둔 미 육군 예비대마저 긴급 투입하여 저지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엔군 사령부도 한국전쟁 사상 미 공군 전투기의 1일 최고 출격 횟수인 2,143회를 출격할 정도로 중공군의 돌파구 확대와 추격 차단에 집중하였다. 미 측이 전력을 다해 긴박하게 대응하자, 중공군의 공세는 전투력 손실과 보급제한으로 수그러들었고, ‘공세 한계점’에 도달하여 재편성에 들어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국군이 미 8군과 미 5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반격 작전을 감행하여 실지의 일부나마 회복하였다. 결국, 중공군의 공세로 약 4km 남하한 새로운 접촉선이 형성되면서, 북쪽으로 불룩 튀어나왔던 돌출부는 제거되었다. (좌측 요도 참조 시 굵은 실선에서 점선으로 후퇴, 영토 193 평방 km 상실) 그리고, 이 접촉선이 최종 휴전선이 되었다.
이번 3단계 공세의 전투 결과로, 국군 2군단과 중공군 제20 병단은 막상막하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었다. 중공군 발표에 따르면, 국군에게 5만 3천의 피해를 입혔고, ‘자신들도 3만 3,253명의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저들의 발표가 맞다면 국군 제2군단 병력이 '다 죽었다'는 이야기인데..., 어쨌든, 저들의 주장대로, 이 단일 전투에서 쌍방은 크나큰 피해를 입었다. 다만, 전투 결과 상대에 대한 전과는 과장 발표하고 자신의 피해는 축소하는 경향이 있으니, 중공군 피해가 저 정도라면 정확한 수치 여부를 떠나 중공군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며칠 간의 진지전에서 고작, 4km의 전선 변화에 얼마나 많은 병력이 희생되었는지 알 수 있지만, “일 분 일 초를 견디기 어려운 전투 상황에서도, 며칠만 더 버티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절로 갖게 하는 전투였다. 국군의 반격 작전이 종료되던 날, 이승만 대통령은 '화천'에 있는 제2군단 사령부를 방문하여 ‘너무나 아쉬운 결과’에도 국군 용사들의 희생과 용기를 격려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팔순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종종 ‘수복 지역’이나 '격전지'를 직접 방문하여 ‘주민’과 ‘용사’들을 격려하였다. 이는 책임 있는 국군 통수권자의 모습을 보인 셈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1주일 후 한국민이 ‘한반도 분단 영구화’라며, 결사반대한 휴전협정이 유엔 측과 공산 측 간에 서명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협정 서명을 거부하고 휴전 협상장을 박차고 나왔다.
역사적 사실마저 왜곡하는 중국 홍보물
앞서 살펴보았듯이, ‘금성 전투’는 누가 뭐래도 국군 제2군단 (수도, 3, 6, 8사단)과 중공군 제20 병단 (67, 68, 60, 54, 21군 예하 15개 사단)이 맞붙은 전투였다. 그런데, 중국이 2020년 제작한 ‘1953 금성 대전투(원제: 금강천)’라는 영화의 줄거리는 ‘중국 인민지원군 항미원조 70주년을 기념하는 영화로, 의용군 전사들이 적 (미군)과 아군의 전력 격차가 현격한 상황에서 억척같이 싸워나가는 영웅 행위를 담고 있다’고 적었다. 특히, 영화 수입사는, “이 영화에는 미군과 중국군 대결만 나오고, 한국군은 나오지 않는다”라고 강조하였다.
아무리, 중국이 미국과의 분쟁 등 ‘신냉전’ 격화에 대비하는 내부단속용으로서, 중국 쪽의 관점에서 제작된, 진실이 왜곡된 영화라고는 하지만, 국군과의 지상 전투를 미군과의 전투로 둔갑시키면서 한국전쟁의 주역인 국군의 존재를 애써 가리고 있다. 특히, 영화는 미 공군의 대대적인 공지작전 장면을 보여주며, 유엔 공군이 한국전 사상 일일 출격 최고 회수를 기록할 정도로 전력을 다하였음에도 중공군이 용전한 모습을 연출한다. 좌측 영화 포스터에 미 공군기가 등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들은, 이 전투를 억지로 ‘미-중 대결’로 몰아가면서 마치, 미국과 대등한(?)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창작(?) 극이라 하더라도, 의도적으로 한국을 무시한 처사에다가, 우리나라를 도왔던 미군 장병들을 무수히 살상하는 모습을 담은 ‘중공군의 영웅담’을 굳이 우리 청소년들이 관람하게 허용해야 하는 것인지…?!
이런 배경을 이해하면, 국군을 주로 가해한 중국에서 만들었든, 피해를 입은 한국에서 만들었든, 6‧25 전쟁 관련 모든 영화 등의 작품에는 중공으로부터 엄청난 피해를 입은 우리 민족의 진한 아픔이 스며들어 있다.
그러니, 이런 아픈 국민감정을 헤아리지 않고 상업적으로 상영을 하겠다는 업자들이나, 이를 승인한 공무원들은 ‘영혼이 없거나 너무나 순진무구한 모습’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동안 음악, 영화 등의 문화로 한류가 중국에 침투한다며 ‘혐한’으로 꽁꽁 틀어막던 중국 정부에게 변변한 항의조차 못하고 눈치만 보던 우리의 과거 정부였다. 국민의 저항으로 영화관 상영은 취소하였지만, 이게, 일개 말단 공무원의 판단이었을까? 과거 정부가 굳이 앞장서서 중국 ‘국뽕’ 영화를 전 국민에게 소개하려 했던 저의가 뭐였을까?라는 의구심은 지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