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에 개입한 중공군은, 제1 부사령관 ‘덩화’가 발전시킨 ‘기동전 전술’을 구사하며, 제1차 공세부터 5차 공세까지 제2차 세계대전의 승자로서 막강한 화력과 기동력을 보유한 미군을 밀어붙여, 압록강의 목전에서 38도선 이남으로 밀어내었다. 특히, 제1~3차에 걸친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로, 유엔군은 단기간에 청천강에서 철수하여 서울을 다시 내주고 38도선 이남까지 밀리는 등, 장병들의 사기가 급격히 저하되자, 미국의 조야는 물론, 유엔군 16개 참전국도 내부적으로 한반도 철수론까지 고려할 정도였다.
그런데, 참전 이래, 제1차 공세로부터 줄곧 공세를 펼치면서 외형상 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듯이 보였던 중공군도 실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너무 많이 발생하였고 보급은 최악이었다. 이런 문제는 참전 전에 이미 예견되었지만, 한국전에 개입하자마자 바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단적인 예로서, 제1차 공세 시 ‘운산 전투’에 참가하였던 중공군 제66군은 전투 초기에 사단당 6,600명의 병력이 있었는데, 이 중 ⅓만 소총 등 장비를 소지하고, 나머지는 수류탄 투척병이었다. 지원병들은 소총도 없이 방망이 수류탄 2개만 들고 전선으로 뛰어들었고, 어쩌다 운이 좋으면 유엔군이든 중공군이든 누군가 죽거나 도망치며 버린 무기를 획득하여 사용했다.
‘마오쩌둥’이 기습공격으로 중공 개입을 공식적으로 알린 제1차 공세가 끝난 직후, ‘스탈린’에게 보낸 1950년 11월 7일 자 전문을 보면, “준비가 충분치 않은 가운데 실시한 1차 전역이었지만, 결과는 만족스럽다”라는 자화자찬적인 결론을 내리면서도… 그 전문 속에 “… 우리 군은 적으로부터 노획한 각종 무기에 주로 의존하여 전투를 수행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밝히면서 장비, 탄약, 보급 부족의 심각성을 호소하고 있다. 어쨌든, 신 중국의 대대적인 ‘항미원조’ 전쟁참전 독려로, 많은 열정 어린 젊은이가 지원 입대하였으나, 정작, 이들을 맞이한 중공군의 장비와 물자는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이어지는 2차 공세에서 나타난 보급 부족 상황은 더욱 구체적이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자, 중공군은 무기나 장비, 탄약 외에 일반 군수품까지 고갈되어 큰 딜레마에 빠졌다. 예컨대, 10월 하순 제1차 공세 때, 처음 참전한 ‘덩화’의 제13병단 병력은 기후가 온화한 화동과 서북 출신으로, 남방에서 대만 공략을 준비하다 만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11월 하순에 접어들어 점점 겨울철이 다가오자 병사들은 입을 방한복이 제한되었다. 그리고 설령, 후방에서 방한복을 보내더라도 수송도중 유엔 공군의 공습으로 잿더미가 되었다.
중공군은 제2차 공세는, 청천강 선에 머물렀던 제1차 공세와 달리, 유엔군을 청천강 선에서 38도 선상으로 200여 km나 밀어내었다. 하지만, 남진을 계속할수록 보급로가 늘어나, 계속 전진한 전선부대들의 의식주와 탄약, 의약품 부족은 점점 심각해졌다. 미 공군의 끊임없는 공습에 재보급이 어려웠던 탓이다. 이 때문에, 청천강에서 38도선 상으로 급하게 후퇴하던 유엔군을 추격하던 중공군이 갑자기 전과확대를 중지하고 공격을 멈추었다. 이에, 놀란 ‘마오쩌둥’은 “전략적 우위를 점하라!”며 공세 유지를 독촉하였지만, 현지 사령관 ‘펑더화이’는 보급 부족을 이유로 수 차례 ‘마오’의 지시를 거스르면서 까지 공세를 중지하였다.
‘마오’의 지시에 항상 충실하였던 ‘평 더화이’였지만, 도저히 전투를 지속할 수 없을 정도로, 탄약과 물자 고갈이 심각하였던 것이다. 만약, 공세를 계속하였으면 유엔군에게 덜미를 잡힐 수도 있었다. 반면에, 제2차 대전 간 '스탈린그라드' 전투도 유사한 상황이었는데, 독일군 지휘관 '파울루스' 원수는 혹독한 기아와 추워 속에서도 '히틀러'의 지시에 맹종하다 수 차례 벗어날 수 있었던 포위망 속에 갇혀 26만 여 명이나 되는 전군이 결국 항복하였다. 기후나 지형에 따라 역사가 뒤집어진 사례가 많은데, 지휘관들의 무지가 화를 키운 사례다.
중공군 공세가 시작되면, 유엔군 전투기는 낮 동안에 수시로 날아들어 밥 하는 연기만 보여도 맹폭을 가했다. 중공군 병사들은 해뜨기 전 밥 한술 뜨고 나면 어둡기 전까지 굶거나, 얼음물로 말린 콩을 갈아 만든 미숫가루를 먹다가 구강염을 앓거나 배앓이를 하는 이들도 많았다. 숙영지도 문제였다. 이들은 미 공군기의 공폭 때문에 고정 건물에 기거하지 못했다. 또, 불을 피울 수 없으니 눈이나 비가 내리면 추위에 떨어야 했다. 이처럼, 장기간 낮에는 활동을 못 하고 습기 찬 동굴이나 ‘유개호’ 속에서 은폐하다 보니, 온몸에 이가 들끓고 피부병에 걸린 이들이 많았다. 어느 부대건 마음껏 먹지도 못하고, 의약품 부족으로 부상자 치료도 어려웠다.
열악한 보급은 모든 중공군에게 매우 괴로운 수준이었지만, 그중에서도 투항군 출신에게는 더욱 심각했다. 예컨대, 중공군 13 병단 중 예하 제50군은 원래 중국 남부 윈난(雲南) 성 국민당 제61 군이었으나 공산당에 투항하여, 만주 지역으로 이동한 뒤 나름 전공도 많이 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국민당 측에 섰다가 투항한 군대의 이미지 때문이었을까? 이들은 항미원조 지원군으로 편입된 이래, 교대는커녕 가장 오랫동안 한반도 작전에 계속 투입되면서, 사망자 열에 여섯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
서부전선에서 뿐만 아니라, 동부전선 장진호 전투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제2차 공세 시, 참전한 중공군 제9병단의 보급상황은 ‘전투는커녕, 생존조차 어려울 정도’로 비참한 수준이었다. 물자부족에 시달린 중공군은 공격 시에도 적 소멸에 주력하기보다 상대 진지의 보급품 집적소나 연료 저장고 등을 탈취하겠다며 그에 대한 공격을 자제할 정도였다. 특히, 장진호 전투에서 많은 중공군은, 미군을 포위하기 위해 사전에 높은 고지와 주요 목진지 등 중요 지형지물을 미리 점령하였지만, 강추위를 견딜 변변한 방한복이 없어 얼어 죽는 자가 속출하는 바람에, 오히려 철수하던 미군이 이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유엔군은 단기전을 예상하고 크리스마스 이전 종전을 목표로 하였지만 그나마 중공군 보다 나은 상황이었다. 반면, 남방에서 올라온 중공군은 하절기 복장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준비 없이 뛰어든 장진호 전투에서 혹한은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가 드물 정도로 혹독한 피해를 주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중공군 약 16만여 명 중 2만여 명이 동사자였다. 이처럼,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현대전이 군수전 상황임을 비로소 깨달은 것일까? 제9병단 사령관 ‘쏭쓰룬’은 후일 ‘장진호 전투상황 보고’에서, 보급품을 ‘현지조달’에 의존하는 중공군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보급체계 전면 개편’을 강하게 거론하였다.
기습적인 대규모 공세로 화려하게 등장한 ‘펑더화이’였지만, 병력 보충이나 물자 재보급 없이는 공세 유지가 불가하여, 1차 공세나 2차 공세도 서둘러 중지하고, 보급을 기다리며, 전열을 재정비하고, 공세 간 도출된 문제점 보완에 주력할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1951년 초에 개시된 제3차 공세(신정 공세)의 상황은 약간 달랐다. 보급은 여전히 최악이었으나, 무기체계가 획기적으로 향상된 것이다. 단기간에 화력이 급격히 증강된 것은, 스탈린이 약속한 무기들이 중공군에게 지급된 걸로 보인다. 미 8군의 분석에 따르면 중공군의 지상군 무기체계개선은 1951년 초 3차 공세(신정공세) 때부터 급격히 향상되었다. 예컨대, ‘임진강’ 전선에 투입되었던 중공군 제63군은, 총병력 6만여 중 3만여 명이 원형 탄창 ‘따발총’으로 알려진 소련제 자동소총 ‘페페샤’로 무장하였다. 또한, 각 중대급까지 중기관총 2정과 경기관총 3정이 지급되었다.
이 정도 장비라면 1, 2차 대전 당시의 장비를 가진 영국군은 상대도 안 되었고, 8발들이 삽탄식 반자동 소총 M1을 보유한 미군에게 결코 뒤지지 않았다. 또한, 대전차포가 없어서 미군의 ‘셔먼’이나 ‘센추리온’ 전차가 출현하면 속수무책으로, 대전차 지뢰 작전이나 수제폭탄으로 대응하였던 중공군에게 많은 대전차 무기가 지급되었다. 다만, 장비는 보강되었으나, 열악한 군수지원 능력으로 각종 보급품과 탄약은 늘 부족하였다.
제3차 공세로, 38도선 이남과 서울 재확보는 물론, 한강선 이남까지 순식간에 진출한 중공군이 1월 8일 갑자기 공세를 멈추었다. 김일성은 ‘펑더화이’에게 화를 내며 공세 지속을 재촉하였다. 하지만, ‘펑더화이’는 초조해하는 김일성에게, 보급지원의 어려움과 전선 지역의 엄청난 피해를 상기시켰다. “지원군의 손실이 심각하다. 세 번 모두 이겼다고 우쭐하지만, 사망자와 부상자가 너무 많다. 전쟁은 보급이 중요하다. 용맹이나 정신력은 몇 시간 지나면 쓸모가 없다. 지금 우리는 휴식이 필요하다. 적은 아직도 20만이 멀쩡하다. 부산에 내몰렸을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평택―삼척―이남에서 우리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은 중요한 시점이다. 준비 없이 싸울 수 없다. 그리고 미군을 한반도에서 퇴출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1927년 ‘남창(南昌) 봉기’를 계기로 창설된 중국 ‘홍 군(인민해방군)’은 공산당 군대로 대부분 평민으로 이루어진 보병부대로, 통일된 군복도 없이 그저 간단한 개인화기와 소량의 탄약, 식량이 전부였다. 말이 정규군이지 ‘좁쌀과 소총’으로 상징되는 열악한 장비로 혁명투쟁을 전개했었다. 특히, 차량 등 기동력 제한으로, 병력 이동은 늘 뛰어다녀야 했고, 국지전에서 승리하더라도 전과확대가 어려웠다. 보급수송은, 지게, 말, 소달구지 등에 의존하여 19세기 수준이었다. 통신장비 또한, 전 근대식으로 뿔피리, 꽹과리나 나팔, 피리 등 자신들의 악기를 사용하였고, 대부대 기동에도, 통신수단 제한으로 파발을 운영하였으니, 입체적인 제병협동공격 작전은커녕 효과적인 산악작전조차 제한되었다.
중공군의 군수지원 체계는, 국공내전 이래 전통적으로 ‘보급은 적에게서 구한다’는 ‘현지조달’에 의존하였다. 이런 중공군의 기본 방침은, 국민당군과의 국공내전 시부터 이어온 전통이었다. 한국전에 참전한 일부 중공군은 국공내전 때 국민당군으로부터 노획한 톰슨 기관단총, M1 개런드, 브라우닝 자동소총, 바주카, M2 박격포 등 미국제 소화기도 갖고 있었다.
이처럼 총이나 탄약, 장비, 물자 등 노획품을 최대한 잘 활용하던 중공군도 한국전쟁 중에 획득한 유엔군의 공용화기, 차량, 기타 보급품 운용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미군 장비는 중국군이나 일본군 장비와 달리, 설사 노획해도 기술력 차이로 사용법을 몰랐거나, 곧바로 미군 전폭기가 몰려와 노획품을 파괴해 버렸다. 미군 보병사단은 다양한 기동, 화력, 통신 및 각종 장비를 운영하였는데, 이들 장비를 정비, 운용하는 지원 장비조차 기술적으로 너무 복잡다단하여 농민군인 중공군으로서는 활용능력 밖이었다.
한국전 개입 초기 중공군의 화력은 빈약했다. 곡사포와 야포를 만주 지역에 두고 온 탓에, 지원 화력은 박격포가 전부였다. 뿐만 아니라, 식량과 탄약 부족도 심각하여, 5차례에 걸친 공세에 평균 작전지속 기간이 한 번에 7~8일이 고작이었다. 각개 병사는 1일분, 연대 및 대대는 5일 치의 식량, 탄약만 배급받았고, 이마저도 전장을 돌아다니며 재보급을 하니, 보급품이 고갈되면, 공세를 중지하고 안전지대로 철수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따라서 작전한계는 기간적으로는 5~10일, 작전거리상으로는 50~100km에 불과하였다.
전쟁터인 북한에서 자체적인 의식주 조달이 힘들어지자, 중공군 수십만 명의 군수지원을 본토(만주)에서 받아와야 했다. 그런데, 물량확보도 어려웠지만, 설령 확보를 한다 해도, 병참선이 늘어나 미 공군의 공격을 받으니, 이를 전선으로 보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중공군이 편찬한 『조선전쟁사』에서도, ‘청천강 일대에서 벌인 제1차 공세 때는 중국본토에서 불과 170여 km이던 수송로가, 38선 이남까지 가장 남쪽으로 진출한 제3차 공세 때는 500~700km(북한 내 통과 거리 만 400여 km)로 연장되어, 유엔군의 공습을 피할 수 없었다’고 보급로 신장으로 인한 어려움을 묘사했다.
제3차 공세를 중단하고 재정비하는 동안, 중조연합사는 1951년 1월 25~29일간 평북 ‘군자리’에서 ‘3차 공세 분석과 차후 작전 회의’를 하고, 중국 ‘선양’에서도 1월 22~30일간 ‘저우언라이(周恩來)’ 군사위 부주석 주관으로 ‘미군공습으로 인한 피해 최소화를 위한 후방지원과 수송대책’을 강조하는 회의를 가졌다. '전략급' 회의와 '국가급' 회의를 동시에 개최해야 할 만큼 미군의 공습은 심각한 문제였다. ‘선양’ 회의에서 군사위 부주석 ‘저우언라이’는 수송수단으로 ‘철도’를 제시하고, 각 역(驛) 간의 통신수단과 열차와 철도, 철교 등에 대한 중공군의 방공대책을 주문하였다.
미군의 능력은 대단했다. 6‧25 전쟁 동안 북한의 철도수송 파괴에 출격한 미 공군기가 연 5만 9,000대였고, 투하한 폭탄이 19만여 발로 대략 철로 7m에 폭탄 한 개씩 투하한 셈으로, 미 공군은 중공군의 보급지원 차량과 철도, 교량 등을 집중타격하여, 중공군 수송 차량은 거의 90% 이상, 열차는 1,000량 이상이 파괴되었고, 교량은 1,600여 개소가 끊겼으며, 만주에서 보낸 식량, 탄약의 75% 정도가 수송 도중에 잿더미가 되었다.
이에, 중공군은 만주로부터 38도선 전방부대까지 원활한 보급지원을 위해 경의선과 만포선 철로, 각종 도로 및 교량 보수 등 가능한 수송수단을 확보하기 위해 즉각, ‘철도운수 사령부’를 창설하고, 3개 고사포 사단을 지원하며, 단절된 철도 복구에 나섰다. 그 결과, 1951년 4월부터 1952년 4월까지, 1년간 미군의 엄청난 공습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의 물자지원은 철도 수송능력 향상과 함께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
1951년 2월, 제4차 공세 이후, ‘리지웨이’가 군수전으로 반격하고 보급로 차단폭격을 가해 오자, 중공군 전선 지역의 보급상황은 더욱 심각하였다. 앞서, 4차례에 걸친 공격에서 공산군은 10여만 명의 병력 손실을 입어, 이런 식으로 공격을 계속하면, 차후 1년간 손실이 30여만 명이상으로 추산할 만큼 피해가 극심하였다. 중공군은 보급품 확충에 사활을 걸었다.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는 1951년 4월, 제5차 공세 직전, 제2 부사령관 ‘홍쉐즈’를 북경으로 파견하여 ‘저우언라이’ 군사위 부주석과 ‘마오쩌둥’을 만나 전쟁 상황을 보고하며, “4차 공세까지 그럭저럭 견디어 냈지만, 당장 보급을 전담할 후방근무사령부 설치가 필요하다”라고 건의하였다.
‘마오’의 승인으로, ‘펑더화이’는 제2 부사령관 ‘홍쉐즈’를 장비와 물자로 전방부대를 지원하는 ‘후방근무 전담’ 부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홍쉐즈’는, ‘중앙군사위원회’에 참석하여 중국과 만주의 공산당 지도부에게, 전쟁 상황과 군수의 어려움을 알리며, “미군 공포증이 만연될까 걱정이다. 대적 공포증에 사로잡히면 반드시 패하고 만다”며 전선부대의 어려운 군수 상황을 호소했다. 하지만, 5차 공세 때도 충분한 보급지원은 어려웠다. 전방부대에 대한 보급은, ‘휴전 회담’이라는 ‘숨 돌리기’ 시간을 가진 1952년 중반 이후, 서서히 나아졌다.
전면전으로 치달은 전쟁에서, 미군이 장악한 제공권이 중공군의 군수지원 역량에 치명타를 가하자, 중공군의 작전지속 능력은 크게 제한을 받았다. 열악한 장비와 제대로 된 보급체계 없이 미국과의 전쟁에 뛰어든 중공은, 미국의 제공권 장악과 신무기 등장, 엄청난 군수지원 능력 그리고 각종 기술력 차이로 큰 곤욕을 치렀다. , 한국전에 개입한 중공군의 최대 약점은 보급으로, 처음부터 중공의 열악한 경제사정으로 원활한 보급이 어려웠지만, 그나마, 조달한 각종 보급품도 미 항공기의 끊임없는 후방차단 폭격으로 전선부대까지 가지 못했다.
현대전에서는, 군수지원 능력의 중요성이 전술적 운용기법을 넘어서는데 한국전쟁을 치르며 중공군의 군수지원능력 향상속도가 매우 빨라졌다. 한국전쟁에서 보급부족으로 겪은 아픔에 한이 맺혀서일까? 한국전 휴전 10여 년 후 1965년, 미국과 전쟁하던 북베트남이 중공의 지원을 요청하자, ‘마오쩌둥’은 그들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줘라!”라고 지시했다. 이후, 각종 화포류와 탄약은 물론, 3만여 대의 차량과 500만 톤의 양식과 200만 톤의 연료 등등 1980년대 중반 중국 국방비의 4년 치에 해당하는 당시 약 200억 달러 규모의 무상으로 원조로미군과 싸우는 북베트남군에게 장비와 탄약은 ‘아무리 소모해도 고갈되지 않게’ 지원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