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공군의 제공권 장악과 '후방차단' 작전
6‧25 전쟁 간 미 공군의 공격 능력은 엄청났다. 당시, 미국의 경제력은 중공의 1,000배 정도였다. 상대적으로 엄청난 전비 조달이 가능했다.
6‧25 개전 당시, 미국 전체 군용기는 약 3만여 대로 200여 대의 중국과 비교할 수 없었고, 불과 3개월 만에, 한국전 참전 공군 전폭기를 1,100여 대에서 1,700여 대로 증강하였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미 공군 조종사 평균 비행시간은 1,000시간 이상으로 미 공군의 전투력과 공습능력은 가히 세계 최강 수준이었다.
이에 비해, 중공 공군은 이제 막 창설 단계로 걸음마 수준이었다. 중공은 6‧25 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10월에야, 신 중국 선포 기념일에 17대의 전투기가 열병식에 최초로 참여하였고, 그로부터 몇 주 후에 공군사령부를 창설하여 조종사 300여 명을 뽑아 막 양성 중이었다. 스탈린의 신중함으로 소련 공군의 직접 엄호가 어려워지자, 중공은 비행시간이 30시간도 채 안 되는 공군을 ‘단동’ 일대에 전개하고, 미그-9 몇 기로 몇 차례 미 공군과 공중전을 벌이기도 하였지만, 전투기 성능이나 조종사 기량 면에서 상대가 안 되었다.
한편, ‘펑더화이’의 긴급 군수지원 보고를 받은 ‘마오’는, ‘스탈린’에게, “30개 사단 중 27개 사단을 교체할 예정”이라며, “병력을 보충할 때, 소련이 무기, 장비를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고, 또한, “미 공군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 공군지원”도 함께 요청하였다. 그야말로, 중공군 “참전의 대가로 약속한 지원을 하라”는 청구서를 내민 것이다. 소련의 호응에 따라, 괄목한 증가를 보인 중공군 공군력은 무엇보다 단연 눈길을 끌었다.
중공 공군은 ‘마오쩌둥’의 염원이기도 한 신형 MIG-15 전투기 372기를 공여받아 낡은 MIG-9 전투기를 대체시키며, 소련이 제공한 수많은 장비와 MIG-15 등 전투기로 17개 항공사단으로 확충되었다. 마오쩌둥의 한국전 개입 대가로 수많은 병사들이 희생되었지만, 중공은 무기체계적인 측면에서 획기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6‧25 전쟁 초기부터 제공권을 장악한 유엔군은 남하하는 적의 전진을 막기 위해 낙동강 전선 상에 B-29 폭격기로 엄청난 융단 폭격을 가하는 등 막대한 공군력을 투입하였다. 하지만, 확전을 경계하던 미 합참이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 없이 “한만 국경 5마일 내 어떠한 목표도 공격하지 말라”라고 지시하여 미 공군은 압록강 이북으로는 진입할 수 없었다. 이에, 중공군 1차 공세에 고전하였던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는, 합참에 건의하여 트루먼을 겨우 설득하여 신의주-안뚱을 연결하는 압록강 상 교량을 폭파하는 등 공중작전 반경을 늘렸다.
그렇지만, 맥아더가 “소련과 중공기가 유엔기를 공격하고 만주로 달아날 때, 이를 추격하도록 월경을 허락해 달라”는 압록강 대안으로의 진출 건의를 트루먼은 거부하였다. “군사적 필요성 때문에 전쟁을 확대하지 않겠다”는 대통령 재선을 앞둔 트루먼의 정치적 고려 탓이었다. 그런데, 비슷한 이유로, ‘마오’에게 공군지원을 약속하였던 스탈린도 정작, “소련 조종사가 포로가 되면, 세계대전으로 비화될까?” 봐 공군지원을 주저하였다.
중공 공군이 확충되자, ‘스탈린’은 중공군을 지원하기위해 만주 지역 ‘방공’ 임무를 대신 수행해 오던 소련 공군 2개 비행사단을 1951년 3월 15일까지 만주에서 철수시켰다. 당시, 소령 공군 조종사들은 미군기와의 접전을 최대한 제한받았으며, 만약, 출전하더라도 교신시에는 러시아어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 비행기에도 소련 표시를 지웠다. 그리고, 추락당할 경우 미군행세를 하며, 만약 공산군에게 체포될 경우 같은 편인걸 알리도록 마오쩌뚱이나 스탈린 메달만 조종복 일부에 달았을 정도로 철저히 위장하였다. 미 공군을 의식한 결과였다.
미 공군은 한국전쟁 내내 작전지원에 크게 기여하였지만, 결정적으로 적에게 타격을 준 것은,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이 미 8군 사령관으로 재임 약 100여 일 간 중공군의 제4차 공세를 분석한 결과였다. 그가, 중공군의 약점이 ‘길게 신장된 병참선’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중공군 병참선 차단에 집중적으로 나서게 된 게 ‘군수전’이었다. 이후, 미 8군 사령관에서 유엔군 사령관으로 옮긴 ‘리지웨이’는, 미 해‧공군기 500여 대로 ‘합동 특수기동군’을 편성하여, 북한 내 정치, 군사 목표에 대한 폭격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 1951년 말부터 ‘후방차단작전(스트랭글 작전)’, ‘집중폭격(새츄레이터 작전)’은 적의 전력을 파쇄하고 전의를 분쇄하는 압박 작전으로, 나진항과, 수풍, 부전, 장진, 허천 발전소 등을 공폭하였다. 그리고, 52년 7월의 '평양 대폭격'에는 무려 822대의 항공기로, 11시간 동안 1,400여 톤의 폭탄과 2만 3천여 톤의 네이팜탄을 투하하여 평양 지도부를 압박했다.
또한, B-26 폭격기를 이용하여 적 보급물자 저장소, 수송수단, 철도와 도로는 물론, 야간에도 은밀히 보급을 추진하는 공산군 수송수단까지 탐색, 폭격하여 전방보급 지원체계를 마비시킴으로써, 공산군의 작전지속 능력을 약화시켰고, 미‧해군도 함포와 항모 함재기로 미 8군의 지상 작전을 지원하고 후방차단과 보급수송 파괴 작전에도 참여하였다.
해상으로 유엔군 보급을 담당하는 해군과 함께, 미 공군도 공중작전 이외에, 수송기에 의한 환자수송과 보급품 투하 작전을 전개하였다. 예컨대, 1950년 11월 28일부터 12월 11일까지 장진호 전투에서 미공군의 C-47, C-117 등 수송기가 무려 1,600여 회 이상 출격하여, 중공군 병사의 코앞에서 식량, 탄약과 무게가 1.3톤에 이르는 조립교 부품 등 총 5,280여 톤의 물자를 공수하였고, 약 1만 5,000여 명의 부상병 등을 후송하는 등 수송 작전으로 중공군의 기를 꺾었다.
이런 식으로, 한국전에서 경험한 미군의 엄청난 포격과 폭격은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는 국‧공내전 간 포격에는 “음악보다 포성을 더 즐겨한다”라고 말하였지만, 미군의 폭격은 “너무나 무서워서 혼이 다 나갔다”라고 술회하였다. 참고로, 중공군의 제2차 공세를 앞두고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도 미 공군의 공습으로 폭사하였다.
냉전시대, 영국 정보원으로 소련의 이중간첩이 되어 400여 명의 서방 첩자를 희생케 했던 ‘조지 블레이크’라는 스파이가 있었다. 그가 공산주의자가 된 이유도, “6‧25 당시 주한 영국 대사관에 근무하다 북한군에 체포되어 끌려갈 때, 미 공군기들이 조그마한 산간 마을조차 무차별적으로 폭격하는 ‘비인간적인’ 모습에 분노하여 자진 전향하였다”는 것이다. 병참 능력이 부족한 공산군들이 민간인 집이나 학교, 사찰 등지를 숙영지로 사용한다고 판단한, 미 공군기가 이른바 청야전술(淸野戰術)로 사용가능한 모든 시설을 파괴한다며, ‘얼마나 치열하게 공습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가혹한 미 공군의 후방차단 작전은 중공군에게 큰 위협이었다. 참전과 동시에 기동전을 전개한 중공군은 청천강 선에 머물렀던 제1차 공세 이후에, 제2차 공세를 전개하며 유엔군을 청천강 선에서 38도선 상으로 200여 km나 밀어내었다. 하지만, 중공군은 남진을 계속할수록 보급로가 늘어나, 만주 일대에서 지원되는 보급품은 한반도 남쪽으로 갈수록 미 공군의 공폭을 받아 거의 잿더미가 되었다. 미 공군의 끊임없는 공습에 재보급이 갈수록 어려워져서, 계속 전진한 전선부대들의 의식주와 탄약, 의약품 부족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공지합동 ‘근접항공지원' 작전
유엔사는 미 해‧공군의 공중 폭격, 후방차단 작전과 더불어, 웬만한 지상 작전에도 반드시 해‧공군의 ‘근접항공지원(CAS: Close Air Support)’을 제공하여 지상‧공중 입체작전을 펼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근접항공지원은 적군의 주간 작전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고, 엄청난 부가적인 노력을 강요하였으며, 항공정찰을 통한 상황판단은 전반적인 작전에 기여하였다.
‘근접항공지원’의 몇, 몇 사례를 보면, 1950년 11월, 제2차 공세 시, ‘군우리’에서 중공군의 ‘애로 지역’ 포위망에 걸려 고전하는 미 2사단을 쉴 새 없이 근접지원하였고, ‘장진호’에서도 포위위기에 직면한 미 해병 제1사단을 위해 동해상 항모에서 발진한 미 해군 함재기 F4U가 계속하여 상공을 맴돌며 미 해병의 철수대열을 근접 엄호하였다. 또한, 중공군의 5차 공세 시 38선 일대 작전 간 지연전으로 중공군에게 출혈을 강요하는 미 1군단에게 미 제5공군과 해군 함재기가 하루에만 340여 회 출격하여 지상군 포병화력과 합동작전을 벌였다. 이러한 미 공군기의 위협 때문에 중공군 포병은 적시에 기동 할 수 없었고, 후방차단 병력도 부족하여, 엄청난 포병‧공중 화력전을 구사하는 ‘밴 플리트’의 작전에 말려 중공군 8만여 명 이상이 살상되었다.
이처럼, 미 공군의 육군 전방부대에 대한 근접항공지원은 전쟁 내내 이어졌다. 특히, 1951~1953년까지 2년간의 각종 치열한 고지 쟁탈전에도 매달 2,000~4,000여 회 이상 출격하였다. 한국전쟁 기간 중 가장 많은 출격 횟수를 기록한 전투는 1953년 휴전회담 조인을 앞둔 7월의 '금성 대전투'로서, 미 공군은 기간 중 어느 날 하루에만 무려 2,143회나 출격했다. 이처럼, 미 공군은 지상군 작전 지원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보병 사단급에는 공군 연락장교가 상주하였고, 보병 중대 전투부대까지 공중지원을 받을 만큼 다양한 지상 작전을 지속적으로 지원하였다. 이 같은 적극적인 근접항공지원은 유엔군의 지상작전 목표달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처럼 막강한 전력 때문에 공산군은 지금껏 미 공군의 공폭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최근까지도 북한이 핵실험 등 도발을 감행하면, 동해상에 미 항공모함이 진입하고 괌에서 ‘죽음의 백조’라는 B2 폭격기가 날아가는데 그럴 때마다, 북한은 전시 상태를 선포하며 고사총을 돌리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거나, 항공유 제한으로 항공기가 뜰 형편조차 안 되는 데도 수십여 기의 전투기를 띄우기도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