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은 압도적 전투력을 지닌 미군과 연합군이, 장비와 보급에서 열악한 중공군에게 시달리다 엄청난 피해를 입고 소모전으로 버티다 겨우 정전으로 마무리한 전쟁이었다. 모두의 예상과 달리, 중공군이 선전한 것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외세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국민적 열의에 따라 자원(?)하여 입대한 병사들과, 간부들은 항일 전쟁, 국공내전 등 오랜 전쟁경험으로 전장에서 단련된 인원이었다.
이에 비해, 6‧25 당시, 한국에 참전한 미군 하사관 이상 간부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직업군인도 있었지만, 경험이 많은 장기복무 직업군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부분 전역하였고, 남아 있던 이들은 훈련보다 점령군 행정자로서 일본에서의 호의호식에 길들여져 있었다. 당시, 일본에 주둔하던 미 보병사단들은 모두가 감축된 편성으로 대대급은 중대 2~3개 정도였고, 일반 병사도 21개월 의무 ‘징집 제도(Conscriptive)’로 소집되어 훈련 수준이 매우 낮았다. 뿐만 아니라, 병력이 부족했던 대부분의 미군 부대에는 한국군 증원병력(KATUSA) 이 거의 1/3 정도 투입되었다. 서로 언어와 문화가 달랐다. 전투에서는 화력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특히, 많은 미군 징집병은 개개인의 애국심과 별도로, 의무 복무 기간만 채우면 되기에, ‘나’라는 개인을 주체로 내세우는 개인이었다. 그렇기에, 개성이 강한 이들 각개 병사를 전우애로 엮어 “자신의 생사를 옆 전우에게 맡겨야” 하는 전장으로 내보내려면 많은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들을 훈련시킬만한 숙달된 인력은 대부분 전역하여 버렸고, 설령, 있다고 하리도 급박한 전선 상황으로 훈련시킬 시간적 여유도 제한되었다.
1950년 7월, 최초 미군과 북한군이 맞붙은 ‘오산 전투’는 특이하였다. 미 24사단 스미스 특임대대 인원 중 우월감에 가득한 일부 미군은 “자신들의 존재만 드러내는 것으로 북한군이 지레 겁먹고 도주할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래서 ‘교전 수칙’조차 무시하고. 일부러 ‘자신을 드러내며, 고함을 질러 대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이를 알 길 없는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워 미군 진지를 유린하고 혼비백산한 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어진 ‘대전 전투’에서는, 미 제24사단 사령부의 본부조차 지휘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질 않았다. 결국, 부대는 뿔뿔이 흩어져버렸고 사단장마저 분대원처럼 직접 ‘바주카포’를 쏘며 ‘탱크 사냥’을 하다가 포로가 되는 비극을 겪었다.
하지만 이들과 달리,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큰 희생을 강요하였던 미 해병 1사단은, 장교와 하사관 대부분은 현역과 전시소집 동원 예비역으로,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들이 많았다. 당연히, 징집병 비율이 높은 육군보다 단결심이나 전투력이 뛰어났다.
세계 제2차 대전 승전국이라며 '오만'에 찼던 미군의 모습은,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으로으로 더욱 고조된 듯하다. 예컨대, 38선 너머 북한군을 쫓던 미군은 한때, 중공군 포로의 수집으로 중공군 개입 징후를 알았지만 이를 별로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다. 그러다가, 중공군의 1, 2차 공세를 맞으며 돌파와 포위라는 호된 대가를 치르고 나서는, 그전까지의 ‘오만에 가득 찬’ 모습과는 정반대로 금세 ‘풀이 죽어서’ 연일 패주하였다. 그리고, 급기야 ‘염전사상‘마저 형성되어 전군이 '일본 철수론'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6.25 전쟁에 개입한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내세우며 공산주의와의 대립각을 세웠지만, 정작 중국은 자본주의의 병폐와 부도덕을 경계하며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는 반제국주의로 맞섰다.
미국은 비록 자유 민주국가라지만 서구 기독교 문화에 뿌리를 둔 주류 백인들이 이끌어 가는 다민족 이민 사회여서, 유색인종에 대한 인종차별은 미군 내에서도 만연하였다. 그러니, 흑인 차별 등 내부적인 인종차별은 차치하고라도, 중공군이나 북한군에 대해 ‘인종적 우월감’으로 상황을 가볍고 보고 판단하다가 당한 측면이 있다. 반면에, 신생 중국은 공산주의를 국가이념으로 사상 체계를 갖추었지만, 오랜 유교적 전통으로 제왕적 지배 체제하의 단일 국가의식으로 복종과 헌신을 강요받는 사회였다. 하지만, 100년 이상 각종 외세에 시달린 아픈 경험으로 인하여 '외세를 배격하고, 새로운 중국을 건설한다'는 희망과 애국충정이 가득한 분위기였다.
19세기 초까지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절대 왕정국가였고, 이들 전제군주 국가는 사회적 신분과 계급에 따라, 계급과 계층 간에 수탈과 착취가 이어졌다. ‘칼 막스’나 ‘엥겔스’ 같은, 공산주의자들은 영악했다. ‘함께 생산하고 함께 소유하는’ 평등한 사회를 위해, 절대다수가 핍박받는 노동자, 농민들인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이 자신들을 착취하고 지배하는 소수의 귀족, 자본가인 ‘유산 계급(부르즈아)’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무산계급 혁명론(프롤레탈리아 혁명론)’과 무산계급이 유산 계급을 타도해야 한다는 ‘계급 투쟁론’을 주창했다.
이들의 이념은, ‘부르즈아’를 타도하면 ‘프롤레타리아’는 모두 ‘동무(Comrade)’라는 같은 계급으로 ‘평등’하다는 것이다. 1918년, 이들은 마침내 계급 평등을 원하는 민중들의 거대한 욕구를 폭발시켜, 절대 군주로 군림하던 제정 러시아 황족들을 몰살하고 혁명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혁명으로 ‘짜르’ 제국을 무너뜨린 레닌은, 한동안 ‘백군(White Army)’ 등 우파 제거에 ‘적군(Red Army)’을 운영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군에는 직책만 있고 계급장은 없었다. 계급 투쟁론으로 모두 평등한 ‘동무’들이었다.
1912년, 청조를 무너뜨리고, 신해(辛亥) 혁명을 이룬 중국의 ‘쑨원(孫文)’은 1924년, ‘황푸군관학교’ 설립 등 국민당 군 건설과정에서 소련의 지원을 받았다. 덕분에 한동안 ‘쑨원’을 계승한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에도 계급이 없었고(하지만, 장제스 군은 불과 몇 년 후 계급제도를 도입하였다), 당연히, ‘모택동’의 중국 홍 군(紅軍)에도 계급장도 없고 훈장이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동무'라고 하지만, '상명하복'이 생명인 군대에서 계급 없이 평등을 내세우는 건 모순이다. 그냥,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도 평등을 지키기는 어려운데 하물며 정치판에서랴! 평등은 곧 새로운 계급을 낳았다. 계급투쟁에 익숙한 공산주의자들은 자기들끼리 다시 ‘계급투쟁’을 거치며 독재자 스탈린, 마오쩌뚱, 김일성이 등장하였다. 이들이 가졌던 직책은 일종의 계급장이었다.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시, 중공에서는 1955년 한국전 이후에 직책만 있던 군에 다시 계급장이 부활하였다.)
그런데, 한국전에 참전한 중공은 25개 야전군과 16개 포병사단, 10개 수송사단, 12개 공군 사단 등 대규모 부대로서 이를 교대로 한국전에 투입했다. 그 과정에서, 직책만 있었던 수많은 중공군 부대가 서로 다른 여러 지역출신 부대와 섞이게 되자, 서로 간의 위상 문제로 지휘, 통제에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상명하복’의 군대에서 수평적인 ‘동무’들의 직책만으로 임무 수행이 될까? 그러다 보니, ‘정치위원’이라는 감시제도가 필요했다. 공산군은 지휘관으로 '정치부 지휘관'과 '군사부 지휘관'이 함께 존재하는 이원화 체제이다. 공산당원인 '정치부 지휘관'은 부대원들의 당성과 사상을 검열하는 권한이 있어 순수한 '군사부 지휘관'보다 우위에 있다. 전투 수행을 작전이나 전술전기에 의존하기보다, 정신전력에 더 치중하는 구조였다.
북한군도 정치부와 군사부 지휘관을 가진 이원화 체제라는 점은 유사하다. 그런데, 북한 정권을 수립한, 김일성은 소련군 계급장 부활 이후에 소련군 소좌(소령급)로 복무하였다. 그 때문에 소련군을 모방한 북한군은 군창설 처음부터 계급장이 있었으니, 이들에게 ‘평등’은 애초 없었던 셈이다. 이런 부분은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당의 군대라는 점을 내세우는 군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유사했다. 북한의 공산당도 여타 공산당처럼 “혁명을 위해 함께 싸우는” 동료에게, ‘벗’이라는 뜻의 ‘동무(Comrade)’로 호칭하였다. 다만, 북한에서 ‘동무’는 동료나 아랫사람에게 사용하며, 윗사람은 ‘동지’라고 불렀다. 호칭을 보더라도 평등을 내세우나 평등치 않은 모습이다. 그들의 논리대로 라면, 공산주의자가 ‘계급’을 다시 갖는 것은 자기모순이고, 자가당착인데...
북한군과 달리, 홍 군의 일부로 한국전에 참전한 중공군 하급제대에는 고참병과 지원병이 뒤섞여 있었지만 계급장이 없었기에 상, 하를 구분하기보다, ‘각개 병사 모두에게 작전계획을 고지할 정도로’ 아래, 위가 한결 강한 동료의식으로 묶였다. 이런 면에서, 단일한 명령체계와 기율, ‘가정과 나를 지킨다’는 식의 단순한 목적의식으로 뭉치게 만든 ‘마오’는 대단한 전략가였다. 그는 명분을 만들고, 집행할 세부적 틀을 조작할 줄 알았다.
한반도는 오밀조밀한 산악지형이 전 국토의 70% 이상인데, ‘지형 윤회설’의 노년기에 해당하는 한국의 산악은 미국과 유럽과 달리, 찌를 듯이 가파른 큰 산이라기보다는 높고 낮게 이어지는 능선들이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맨 처음 왔던 미군 군사고문단은 이런 산악을 보고 그저 산악이라는 이유만으로, “한국은 전차가 기동 하기에 부적합한 지형”이라며 한국에 단 한 대의 전차도 주지 않았다. (한국군이 '북진통일!'을 너무 크게 외쳐 '트루만' 정부가 이를 경계한 탓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물론, 한반도의 산악이 횡적으로 발달하여 도로 인프라가 제한된 측면이 있지만, 대륙 공략에 집착하던 일본이 건설한 이른바, ‘신작로’라는 남북간 종적인 도로가 일부 발달되어 있었는데.., 6.25 전쟁 초, 남침하는 적의 주요 접근로로 이용되어 ‘스탈린’이 북한에 제공한 250여 대의 전차가, 전쟁 초기 국군의 방어전선을 종횡무진 헤집으며 승승장구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지역에 산재한 제한된 도로망은 좁고 구불구불하여 차나 마차 등 ‘탈것’에 익숙하던 미군에게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미군은 그나마 가용한 도로를 따라 평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고, 웬만한 산악 지역 방어는 국군에게 맡겼다. 미군이 얼마나 산악작전에서 취약하였는지는 앞서,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이 부임하자마자 자신의 부하들이 산악을 기피하고 탈 것에 의존하여 평지에서만 싸우려는 태도에 분노한 부분을 보면 짐작이 간다. 작전지휘권을 가진 미군 자신이 산악지형에 취약하다 보니, 화력과 기동력이 약한 국군을 항상 산악지형에 배치하였다. 하지만, 국군은 중공군에 비해 심각할 정도로 훈련이 부족하였다.
반면에, 기동력이나 화력이 부족한 중공군은 전투 의지나 정신 전력 고양으로 열세를 만회한 것일까? 수년에 걸친 국공내전에 승리한 중공군은 산악 지형에서도 거의 달리다시피 기동하여, 미군이나 국군에 비해 기동력이 더 뛰어났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우세한 기동력은 공격작전 간 더 많은 융통성을 가질 수 있다. 상대적 숫자도 많은 데다, 산악지역 ‘걷기’에도 익숙한 중공군은 제1~2차에 걸친 기동전 에서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과 유엔군의 간격을 앞질러 돌파하며, 방어부대들이 협조된 방어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국군이나 유엔군으로서는 수많은 침투공간을 공간을 허용한 끝에 간신히 ‘어깨 대 어깨’로 맞닿은 방어선을 구축한 3차 공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적의 진격을 저지하였다.
그런데, 산악전투 못지않게 야간전투도 국군과 유엔군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전쟁 내내 밤마다 야음을 틈타 공격을 가하는 중공군의 야간작전은 미군과 국군을 엄청나게 괴롭혔다. “누군들, 밤에 편안히 자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화력과 기동력이 약한 중공군으로서는 주간에는 미 공군기가 시도 때도 없이 공폭을 퍼부으니, 백주 대낮에는 공격은커녕 차라리, 숨어있는 게 생존의 수단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낮에는 잠자고, 밤에만 활동해야 했으나, 이것이 오히려 산악전투처럼 상대가 싫어할 야간 전투 환경을 만들었다.
앞선 글에서, 중공군 하급제대의 근거리 부대 간 통신수단이던 뿔피리 소리가 야간에 미군에게 미친 심리적 공포감으로 미군이나 국군이 전장을 이탈하게 만든 모습을 나열하였다. 그런데, 이 같은 문화적 차이로 인해 생긴 여러 가지 현상 중에 또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달구지나 우마, 인력에 의존하던 원시적이고 열악한 군수지원체계로 중공군은 어쩔 수 없이 야간 공격과 침투에 크게 의존하며 거친 산지로 기동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기동으로 오히려 항공정찰에 발각되지 않고 유엔군 방어시설을 통과하거나 유엔군의 거점을 포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전투는 모든 요소들의 다차원적 방정식이라는 말에 새삼 공감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