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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Aug 24. 2024

한국전은 미‧중전쟁 (제30화)-문화차이, 전법차이

낯선 싸움터(戰場), 낯선 상대 

1942년 12월 7일, 진주만이 기습을 당할 때까지, 미국은 일본이라는 상대에 대해 별로 잘 알지 못하였다. 단지, ‘체구가 왜소한 일본인은 먹는 음식이나, 먹는 방식조차 다른,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인종적으로 다소 열등한 집단’으로서 일종의 외계인 모습이었을 것이다. 미군은 태평양 전쟁을 통하여 일본군과 남태평양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몇 년간 싸우며 동양의 고유한 문화와 유교적 사고방식을 많이 경험하였고, 많은 놀라운 부분도 알게 되어, 동양인을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하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행하는 ‘반자이’ 공격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하였고, 그들에게 '포로'가 된다는 것이 상대의 군사문화에서 무슨 의미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자신들의 가치기준과는 전혀 다른 의미라는 것조차 몰랐다. 결과는 경악의 연속이었다.


일본의 도박, 태평양 전쟁

그렇다면,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에서 맞붙은 미‧중 전쟁은 어땠을까? 미국은 전통적으로 전장자료와 전장 교훈 수집에 공을 들인 국가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발발한 태평양 전쟁 동안 중국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끌어들여 중국의 국민당 군대는 물론, 중국 공산군 근거지 ‘옌안’에도 ‘옵서버(관찰조)’ 로 많은 군인과 종군 기자를 주재시킨 적이 있다. 이들은, 중공의 중앙군과 팔로군, 그리고 국민당 신 4군 지휘관들과 같은 밥을 먹고, 노래하며 훈련과 군사정보를 공유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평가한 보고서에는 미국이 중국 국민당에게 지원한 물자의 일부만이라도 중국 공산당에게 제공하면 이들은 언제든 중국 전역을 장악할 능력이 있다”라고 할 정도로 공산군의 의지나 능력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전장 지휘관들이 구사하는 전법에 대한 정보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내용이었다. 


미‧중 전쟁을 되돌아보면, 미국은 중국의 낯선 전법에 허둥대었고, 중국은 미국의 엄청난 물자와 화력에 압도되었다. 미‧중 전쟁은 서로에게 그저 찌르고, 베어 버리고, 화력으로 제압하는 그런 단순한 살상의 의미와는 전혀 양상이 다른 전쟁이었다. 문화적 뿌리가 깊고 광대한 대륙 중국은 섬나라 일본과 전혀 달랐다. 미국은 일본과 중국의 차이가 프랑스와 독일의 차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다른 문화적 가치 기준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전쟁을 치르기 전까지 잘 알지 못하였다. 적국인 중국의 역사, 문화 그리고 전쟁터인 한국에 대한 정확한 인식 결여는 6‧25 전쟁을 수행한 ‘트루먼’ 정부나, 전투 현장의 지휘관과 병사들에게 엄청난 고통이었다. 


미국과 중국은 세계 최강의 군사 강국답게, 수많은 전쟁을 연구하고, 발전시킨 전법들을 전수받았다. 서구의 ‘전쟁론’과 중국의 ‘손자병법’이 대표적인데, 공통점은 ‘전쟁과 정치’의 조화에 있지만, 방법상의 주안은 다르다. ‘전쟁론’이 적을 궤멸시키고, 적 영토를 탈취하는 ‘양의학적 외과수술’이라면, ‘손자병법’은 ‘싸우면 이기되’, ‘싸우지 않고도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니, 기와 혈을 북돋우는 ‘한의학’과도 같은 맥락이라 할까…. 


예컨대, 미국인이 익숙한 양의 병원 치료는, 아픈 부위를 째거나 도려내거나 화학 약품으로 원인을 제거하는 직접적인 치료지만, 중국의 한방은 기와, 혈, 맥 등 인체의 조화와 균형을 다스리는 침이나 한약 등 간접적인 방법으로 환자를 치료하였다. 어떤 의사가 환자를 잘 치료했다는 것은 결과로 알 수 있지만, 그가 ‘어떻게’ 치료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미‧중 국교 수립 이후, 양국 인사들이 왕래하자 에피소드가 많았다. 그중 하나로, 미국인은 심한 두통이 있는 환자에게 머리에 큰 침을 놓겠다는 한의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를 보듯, 동양과 서양도 싸우는 방법이 서로 달랐다. 각자의 군사교리는 전술적 사고의 기준일 뿐, 실제로 운용되는 전법은 정공법과 기공법이 배합된 리더의 아이디어에서 나오는데, 이런 전술전법의 아이디어에는 서로의 능력과 전쟁 환경 차이에 의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발전되는 것이다. 미국은 애당초 영국이나 프랑스, 일본 등과의 전쟁에서 형편없이 패한 중국(청) 군의 정규전 따위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이들의 관심은 광활한 유럽 대평원 지역에서 대규모 병력과 전차 등 기동력, 그리고 화력의 효과적인 운용과 배합에 있었다. 미군은 우수한 군대였지만 이들이 처한 한국의 전장환경은 좁고 산악 지형이었고, 맞붙은 상대인 중공군은 비록 병력은 많다 하나 전투기조차 거의 없이 소총과 박격포 정도의 화력에다가 걸어 다니는 군대였다. 



‘문화 차이’ 이해와 전투의 승패

사상 처음으로, 세계 최강 미군과 맞붙은 전쟁에서 중공군이 취한 1~5차 공세의 ‘기동전’은, 작전기지 확보와 유엔군 소멸이라는, '덩화'의 전술개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덩화'는, 미군의 전투력은 세계 최강이 정면공격은 승산이 없다밝은 대낮에는 잠복하고어두울 때 공격하되과감한 침투 전술을 써야 한다. 약점은 측면과 후면이다전방과 후방의 연락 단절로분할 포위한 뒤 중심을 섬멸하자”는 맞춤형 전술을 제시했다.


한반도에 기습 개입한 ‘덩화’의 중공군은 이미 국공내전에서 '장제스'의 국부군을 무찌른 강력한 군대였다. 잘 훈련된 엄청난 병력이 야간에, 산악지형으로 침투, 우회하여 후방을 노리는 대규모 ‘기동전’을 구사하자, 중공군을 난생처음 접한 미군은 중공군에 대한 무지와 다른 잣대로 생각과 행동이 얼어붙었다. 누가 감히 신생 중국이 제2차 세계 대전 최대의 승전국인 미국을 공격하리라고 생각했겠는가? 때문에, 미군은 야간전투, 위장, 매복, 침투, 우회, 유인 격멸 등 각종 기공법을 구사하는 상대에 대한 연구도 없었고, 이질적인 문화 차이로 인하여 상대의 전술적 의도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 전혀 모르는 적으로부터 '완벽한 기습’을 당한 셈이었다.  


한국전에 참전한 중공군(출처: 연합뉴스)

중공군은 허둥대는 미군에게 같은 전법을 반복해서 구사하며 전과를 확대했다. 제1차 공세의, ‘운산 전투’도 매복과 기습, 우회침투, 포위격멸이었다. 미 8군이 분석한 제1차 공세의 결과는 상대에 대한 재평가였는데, '8자 전법'에 당했다는 평가가 많다. '8자 전법'은 흔히 말하는 '매복된 장소로 적을 유인하여 격멸'하는 방식이다. 이어진, 제2차 공세 때에도 서부와 동부전선에서 미군 1개 사단씩이 '8자 전법'으로 곤욕을 치렀다. '군우리 전투'와 '장진호 전투'도 모두 매복과 기습, 우회침투, 포위격멸 때문이었다. 


제2차 공세에서 특이한 것은, 공세에 앞서 교묘한 '심리전'을 전개하였다는 것이다. 중공군은 유엔군의 전략상 오판과 오만 심리를 유도하기 위해, 1차 공세에서 포획한 포로들을 풀어 주며 중공군이 불과 6~7만여 명에 불과하다거나,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여 본국으로 철수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유엔군의 북진을 계속 유도하는 교활함을 보였고, 유엔군이 공세를 가해오자 하루, 이틀 ‘밀리는 척’ 중공군을 가볍게 보도록 유인한 뒤, 대담한 우회포위 실시로 예상보다 큰 전과를 올렸다. 


'군우리' 전투에서 널브러진 미군 장비(출처: 미국가기록원)

특히, 제2차 공세시 이런 혼란을 겪는 동안, 서부전선 ‘군우리’ 지역의 미 2 사단이 중공군의 기만전술에 넘어가 잘못된 상황판단으로, 미군 역사상 가장 처절하게 눈뜨고 볼 수 없는 패배를 당하였다. 


당시, 청천강 선에서 철수를 강요받던, 미 2 사단장 ‘카이저’ 소장에게는 2개의 철수로가 있었으나, 철수에 양호한 도로는 그 일부가 인접부대 관할이었다. 군사작전에서 ‘전투지경선’의 의미에 충실한 ‘카이저’는 양호한 도로보다 자신이 관할하는 ‘애로’ 지역으로 철수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미 2사단을 파멸로 이끈 패착이었다. 미군은 작전 간 전투지경선의 의미에 충실한다는 속성을 아는 중공군이 미리 국군 복장으로 위장하여 애로지역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계곡 속으로 들어온 미군을 가두고, 고지대에서 내려다보며 난타하였다. 미군의 적정파악은 미숙하였고, 중공군은 ‘나의 의도를 간파하고’ 대응하였고... 상대의 전법에 휘말린데 더하여 상대에게 '지휘관의 의도'마저 읽힌 결과결과는 참담한 패전이었다. 


중공군의 낯선 전법에 전혀 대비하지 못한 미군에게는 중공군의 기습은 새로운 충격이었으며, 그 결과 미육군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참패를 당하면서, 미 8군은 청천강에서 38도선 상으로 최단시간 내에 대후퇴를 초래했다. 중공군에게 ‘수세에서 공세’로 국면을 전환하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전사학자들은 이 전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세 전환의 모멘텀이 되었던 ‘미드웨이’ 해전이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필적할만한 대사건으로 평가하였다. 그 주인공은 중공군 부사령관 '덩화'였다.


'장진호' 전투의 미군 병사들(출처: 미국가기록원)

또한, 동부전선의 ‘장진호’ 전투에서도, 나중에 비록 전세를 뒤집기는 했지만, 초기에는 중공군의 은폐와 위장 전술에 완전히 당한 꼴이었다. 맥아더 사령부나 미 10군단은 항공정찰에만 의존한 결과, 중공군의 포위망 시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영하 30도의 날씨에 수만 명의 중공군이 눈 덮인 산악지형에서 포위망을 형성하고 매복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 미군 장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미군의 상식과 가치 기준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중공군은 이런 상식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전장에서 상대에게 작전 의도를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무수한 비상식을 여과 없이 감행하였다. 그렇지만, 이런 비상식의 결과는 참혹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6만여 명 이상이 동상 등 여러 이유로 사상당했다.


그런데, 중국인의 특성을 알고 잘 대비한 사례도 있다. 예컨대, 미 해병 1 사단장은 어릴 적 부모와 중국에서 생활하여 중국 문화와 중국인에 대한 어느 정도 감각이 있었다. 그가 받은 인상은 중국인은 음흉한 면이 있어 조용하면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스미스’ 해병 1 사단장은 적이 공격하기 바로 직전의 소강상태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장진호 남단의 야지에 공중보급과 환자수송을 위한 임시활주로를 건설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런데, 이게 미군의 체면을 살렸다. 이곳에서 수천 명의 부상병을 일본으로 이송하였다.


이어지는 다른 공세에서도 예상을 뛰어넘는 중공군의 침투 전술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1951년, 5월 ‘현리 전투’에서 중공군 1개 중대는 야간 13시간 동안 무려 25km의 길도 없는 산악을 달리다시피 하여 ‘오마치 고개’를 확보하고 국군 3군단의 퇴로를 차단했다. 퇴로차단 공포에 질린 3 군단장이 항공기로 탈출하자, 군단 6만여 병력이 대부분 장비를 유기하고 뿔뿔이 흩어져 도주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 중공군 1개 중대는 침투하는 동안, 휴식도 없이 오로지 ‘오마치’라는 목표만 보고 내달렸다. 이들의 행군속도는 국군의 2배 이상 빠른 것으로 각종 포로 증언에서 나온다. 2배 이상의 행군속도는 상대가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엄청난 기습효과를 발휘한다. 전 부대원이 개인을 희생하고 내어달 린 대단한 집중력이었다. 이들은 전투영웅(?)이 되었다.



적변아변(敵變我變): '적의 변함에 맞게 나도 변한다'

 1950년 10월 중공군의 참전 이후, 중공군은 '미군을 공격한다'면서도 과감한 침투전술의 대상은 항상 국군이었다. 1951년 5월 제5차 공세까지 중공군에 무참하게 당한 국군의 부대는 2군단, 3군단, 3, 6, 7, 8, 9사단 말고도 숱한 부대가 있다. 최근까지도 중공군(홍 군)은 1~5차 공세 당시의 여러 전승 기록을 국영 CCTV 방송 연례행사용 자료 화면에 담아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리로 대대적으로 홍보한다. 반면에, 국군으로서는 이들과의 전투가 6‧25 전쟁 최대의 패전이었고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불편한 기록이다.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다. 오늘날의 국군과 달리, 당시에는 중공군만 만나면 그토록 등을 보이고 꽁지를 내뺐는지?” 


무제한 화력지원으로 산더미처럼 쌓인 사용한 장약통(포사격 후에 남은 폐자재)

그런데, 신출기묘하던 중공군도 약발이 떨어진 것일까? 중공군 제5차 2단계 공세에서 작전초기 대승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던 중공군은 어느 순간 골짜기를 따라 북쪽만 바라보며 철수하는 신세가 되었다. 


중공군의 공세 실패는, 아사 직전에 몰릴 정도로 고질적인 군수지원 제한 이외에, 유엔군이 밴 플리트 탄약량이라는 무제한 화력전으로 반격을 실시하여 결정적 타격을 가하자,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는 획일적이고 정형화된 전법에 따른 것이 문제였다. 전선이 예상외로 확대되자 깊은 산속으로 흩어진 중공군 말단 부대들은 통신의 제한으로 서로 간 연락이 두절되었고, 그들이 그토록 강조했던 ‘적변아변(敵變我變)’ 융통성 강조 원칙은 지켜지지 못했다.


국군도 ‘적변아변’과 같은 융통성의 의미로, 선조치후보고를 항상 강조하였다. 그런데, 훈련이 덜된 군대일수록 선조치하며 주도적으로 상황을 이끌어 가기보다, 그저 상급자의 ‘지시를 받고 시키는 대로만’ 하려고 하는 보신주의가 판친다. 욕만 안 들어 먹으면 되지 뭐더 잘할 필요가 있나?”라는 건데…. 의욕 없는 군대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한때, 국군을 ‘폄훼하는 말’로, 상황이 다급해도 쏠까요말까요?”라는 보고형 질문이 있었다. 그러면, 보고받은 상급자가 어서 쏴!” 하면 적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서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버린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은 절대로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한국 전쟁은 창과 방패랄까? 중공군이 ‘기동전’이라는 새로운 전술로 단숨에 38도선 이남까지 진출하는 등 전략적 성과를 확대하자, 염전사상과 패전론에 노심초사하던 미군은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에 의한 새로운 개념의 '위력 수색'을 전개하여 적을 찾아 나섰고, 이에 맞선, 중공군이 엄청난 병력으로 동시다발적으로 남하를 시도하자 '리지웨이'의 후임인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무제한적인 공중 폭격과 포병 사격으로 엄청난 ‘화력전’을 전개하여, 승승장구하며 남하하던 중공군을 일거에 소멸시켰다. 중공군이 미처 예상치 못한 미군의 반격에, 전선은 '휴전 회담'이라는 의제로 다시 극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그리고, 전선이 교착되자 이번에는 ‘갱도전’이 뒤를 이었다. 이처럼 항상, 상대를 바라보고 적변아변 하는 것이 지휘자의 책무다. 이 과정에서, 적의 변화를 상대의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로 바라보면, 어느 정도 적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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