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의 군 경력관리에서 흥미로운 것은, 영국과 미국은 1~2년 단위의 잦은 보직 교대로 다양한 경험을 쌓은 자를 우대하고, 미군의 영향은 받은 국군도 1~2년 단위로 보직한다. 하지만, 독일 등 유럽 대륙에서는 장인정신을 존중해서인지 장기간 한 직책에서 근무한 자를 우대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필자가 오스트리아에서 근무할 때 주재국 합참의장 ‘마예첸’ 장군은 무려 10년째 그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런 식의 장기 보직은, 소련도 유사하였고, 소련의 영향을 받은 북한, 중공도 닮았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사령관은 100 일도 안 되어 바뀐 적이 있지만,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는 거의 4년째 전쟁을 지휘하였다. 북한군은 지금까지도 군단장, 사단장 주요 직책을 한 인물이 장기간 보직되어 있다. 각각 장단점이 있겠지만, 논외로 하고….
지휘관이 누구냐? 가 관심의 대상인 것은 예하부대 장악 능력과 구사하는 전법의 차이 때문이다. 전법은 ‘상대가 예측하지 못하도록 의표를 찌르는 것’이다. 물론, 속임수도 그중 하나다. 기만, 위장, 은폐, 엄폐, 양공, 양동 등 대부분 군사적 용어와 전술적 사고는 항상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고, 그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나올 것인가?”를 예측하며 ‘상대가 가장 싫어하고 힘들어하는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을 염두에 둔다.
중공의 한국전 개입 직전, '마오쩌둥'은 '덩화'의 제13병단을 '단둥'에 주둔시키며, 맥아더와 유엔군의 연구에 몰입했다. 그들의 연구중점은 미군 지휘관들의 성향, 경력과 참전한 전투의 전개과정 등을 분석하여 그들이 보인 심리상태, 가치기준, 행동양식, 그리고 판단에 대한 대응책을 찾는 것이었다. 이 같은, 적의 대응책을 예측하는 것은 상대의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으면, 어느 정도 그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아마도, 그런 사례 중의 하나가 '군우리' 전투에서 대패한 미 2 사단장 '카이저' 소장의 '전투지경선과 관련한 일화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1951년 4월 '트루만'의 ‘맥아더’의 해임은 너무 늦은 측면이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평생 동안, 1차, 2차 세계대전 등에 참가하여 엄청난 전쟁경험과 경륜을 갖추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초기에도 ‘인천상륙작전’ 성공 등으로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덩화’를 비롯한 중공군 지휘부는 이미 그를 너무 많이 연구하였다. 중공군은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었지만, ‘맥아더’와 그의 참모들은 전혀 낯선 중공군을 대할 때도, 여전히 '내 방식으로' 구태를 반복하며 잦은 오판으로, 중공군을 상대하기에 벅찬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미국 조야는 여전히 그의 전쟁경험과 과거의 찬란한 전적에 매달렸다. 실기를 하고 낭패를 당한 것이다.
1950년 10월, 국군과 유엔군(미군)이 38도선 이북 지역으로 전진할 때, 유엔군사령부에서 북진 작전에 대한 '전진 한계선'으로 대략 ‘안주‧흥남선’으로 설정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 같은 첩보에 따라 중공군 지휘부가 한때, 청천강 이북의 완충지대 조성 기대로 한국전 개입을 망설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맥아더의 지시로 북진이 계속되자 국경 수호에 위협을 느껴 중공군이 개입하였다는 것인데... 한만국경은 중국의 역린이었다.
어쨌든, 휴전 이후 지금까지도 유엔군이, “한만국경에 너무 접근하여 중국을 자극하지 않겠다”라고 중국의 체제 보장을 의미하는 무언의 약속을 해 온 것은, 유엔군의 오래된 지침이며, 지금껏 한미 연합훈련 연습 시마다 훈련 시나리오의 대전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침은 한미/연합군의 작전적 범위를 한반도, 특히 휴전선 일대로 제한함으로써, 휴전 이후에 한/미 양국군이 수없이 실시하여 온 다양한 형태의 전구급(戰區級) 연합훈련마다 양국 군 지휘관과 참모들의 전쟁수행에 대한 사고를 제한하였던 측면이 있다.
연합훈련에서, 한/미 양국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훈련의 목적은, 주어진 국면을 놓고 정보, 작전 판단과 전투지휘, 함께 작전 지속능력을 판단하는 것으로, 지형, 기상, 적군과 아군 상황 등을 고려하여 염출 할 수 있는 각종 사태를 미리 예상하여 그 대비책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양국 군 인사들의 군 경험과 피, 아 전투교리 등에 기초하여 ‘브레인스토밍’식으로 과제목록을 도출하여 토의하고 이를 훈련 작전명령에 반영한다. 그런데, 한반도가 작은(?) 전역이어서 일까? 사람은 매년 바뀌지만 훈련 시나리오는 거의 반복된다.
오랜 역사를 지닌 한/미 연합훈련을 준비하는, 한-미 양국군에게는 대략 1,000여 개 이상의 이미 개발된 과제목록이 있기에, 전임, 후임이 대를 이어 가며 이를 활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새로 보직된 인원들은 훈련의 목적인 자신의 고뇌에 찬 창의력을 내기보다 '적에 대한 기존 정보'까지 포함하여 지난 수년간의 훈련 과제목록 등 자료를 참조하여, 비교적 손쉽게(?) 당해연도에 수행할 과제 목록을 도출하고, 절차훈련에 치중한다. 이렇게 되면, 기존의 틀을 깨는 아이디어는 배척될 것이고,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의 사고로 경직될까 두렵다. 물론, 단지 1년만 한국군과 함께 근무하는 미군 장교에게는 이것 조차 매우 중요한 경험이 되겠지만...
기존 자료 활용과 관련하여, 한국 학생들은 미국 대학(원) 등에 진학하기 위해 요구되는 SAT, GRE 등 영어, 수학 학습능력 평가에서 수학만큼은 미국 아이들을 압도한다. 우리 아이들이 정말로 수학을 잘하기를 바라지만, 혹여 사전 조기교육이나, 상급 과정의 수학 문제 등을 다양한 유형별로 미리 풀어보았기에 '문제풀기' 선수가 되어 좋은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닐까? 그 학생이 정말로 수학적 개념이나 논리를 생각하며 수학문제를 푸는지는 의문이다. 다른 이야기로, 필자의 지인인 A 소령은 위관시절을 거의 유학으로 보냈는데, 귀국후 바로 육군대학에 입교하고,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아니? 야전 현장 근무라곤 위관시절 경험뿐인데 군사학 우등이라니... 어째 그랬을까? 문제는 창의력이나 현장 경험이 아닌 도식화된 전술학 과정때문이었다. 교리, 교범은 그저 기준일 뿐이니, 원칙은 암기하되 원칙만 지킨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 창의적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우리 국군 간부에게는, 훈련 간 지휘관-참모훈련 절차에 익숙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창의력 부분 연마가 더욱 필요해 보인다. 필자는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에 교환교관으로 재직할 때, 학교부설 ‘군사문제연구소’에 자료수집 목적으로 자주 방문하였다. 그곳에는 구 소련의 기갑전략(OMG)은 물론, 각종 전훈(戰訓) 자료가 즐비하였다. 이들 자료는, 군사전략을 위해, 지휘참모대학 졸업자 중에서 군사학에 관심이 많은 자를 선발하여 2년 동안 군사학만 연구하는 ‘고급군사과정(SAMS)’에서 주로 활용되었다. 덕분에, 학생들은, ‘클라우제비츠’, ‘리델하트’, 손자병법은 물론, ‘마오쩌뚱’과 심지어 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Chao Chao)’라는 인물까지 다양한 인물까지도 연구하고 있었다. 책을 통한 간접경험도 창의력에 좋은 스승이다.
참고로, 많은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 심지어, 각종 컴퓨터 게임조차도 새로운 전법이나 무기체계 발전의 좋은 힌트가 될 수 있다. 사고의 폭을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이다. 이런 상황이니, '관찰관'이라며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멘토'자격으로 훈련에 참가한 예비역 고급 장성들은 “나 때는 말이야..”하며 과거 자신의 과거 이야기나 경험담을 추가하기보다, 국군 후배들에게 필요한 창의적 사고를 북돋워주었으면하는 생각이다. 경험이 부족한 후배에게, 자신의 과거애 축적된 경험을 토대로 우러나온 미래를 향한 어떤 통찰력을 보이는 일, 바로 이게 '멘토'의 임무이고, ‘온고이지신’의 정확한 말뜻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백전백승을 기록한 군대는 없다. 무력으로 대제국을 건설한 많은 왕조들은 기껏해야 2~3백년 정도의 수명을 가졌다. 싸움 기술은 싸움을 통하여 성장한다. 아무리 참신하고 획기적인 전법이라도 자꾸 노출되면, 그 전법에 당하던 상대가 어느덧 그 전법을 배우고, 더 나은 전법으로 달려든다. 나폴레옹은, 어떤 경우든 상대적인 병력 우세를 유지한 뒤 접전을 치뤘다. 상대의 무거운 중보병들은 허우적 거리다가 측면이나 후방이 무너져 내리면서 패배를 당했다. 하지만, 나폴레옹도 마지막 전투에서 그런 전법을 익힌 상대에게 당했다. 한국전이 휴전으로 멈춰어도 쌍방의 전술적 고민은 그칠 줄 몰랐다. 재미있는 것은 과거를 잘 살펴보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한다면서, 과거에 집착하여, 불필요한 '삽질'로 물질과 노력을 낭비하다 망한 사례가 많다.
6.25 전쟁 이전, 한국에 온 미군 군사고문단은 한반도에 그저 산악이 많다는 이유로, “한반도는 전차가 기동 하기에 부적합한 지형”이라고 평가하고, 미국은 한국군에 단 한 대의 전차도 주지 않았다. 그 바람에, ‘스탈린’으로부터 250여 대의 전차를 제공받은 김일성 군대가 전쟁 초기에 한국군 전선을 종횡무진 헤집으며 궤멸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육탄 돌격 등 소련제 북한군 전차에 고전하였던 국군은 휴전 이후 1980년대까지, 적 전차 접근을 분쇄하기 위한 대책에 골몰하며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덕분에, 국군은 전차가 접근할만한 공간이 있으면 산이나 들녘, 하천까지 예상되는 적의 전차 접근로 상에 화력, 장벽을 계획하고, 대전차 방벽과, 용치 장애물을 설치하는 등 화력과 장벽으로 꽁꽁 틀어막았다. 그러나, 전차의 시대는 저물었다.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미 전차는 대전차 미사일로 무력화되었고, A-10 등 공중 공격기가 개발됨에 따라 그들의 먹잇감에 불과한 상황이 되었다. 그럼에도 국군이 유독 전차 방어에 집중하였던 것을 보면, 국군 고위 간부들의 전차에 대한 인식이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격이었을까?
이런 '트라우마'는 북한도 다를 바 없었다. 6.25 전쟁 내내 미 공군 등 연합 공군의 엄청난 공중공격과 폭격에 혼쭐이 난 북한군은 '전 국토의 요새화'를 부르짖으며, 온 지역에서 지하요새와 땅굴 파기에 몰두하였으며, 전, 후방 구분 없이 엄청난 숫자의 고사총을 돌리느라 '노농적위대'라는 조직으로 여념집 아녀자까지 군복을 입히고 훈련시켰다. 최근에도, 핵이나 장거리 미사일 실험 등으로 위협을 느낀 미국이 '죽음의 백조'라는 미 공군 폭격기를 한반도 상공에 전개하면 '호떡집 불난 것'처럼 북한 전역이 소란스러워진다.
서구는 어땠을까?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비참한 '참호전'을 수행하느라 엄청난 전력을 희생시켰던 프랑스는 엄청난 비용을 들여 전쟁 이후 국경선을 따라 난공불락의 엄청난 요새 진지인 '마지노'라인을 구축했다. 하지만, 누가 대비하고 있는 상대에게 철없이 다가갈까...? 독일군이 이를 우회하여 ‘아르덴느’ 산악을 돌파하자 ‘마지노’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덕분에,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하고 그 안에 들어앉아 편안하게 전투를 하려던 수동적 사고의 프랑스군은 공세적인 독일군의 대 우회 전략에 진지를 사용도 못해보고 몇 주만에 항복하였다.
독일은 프랑스와 똑같이, 처절한 '참호전'을 수행하다가 비록 항복하였지만, 요새를 만들기보다 보다 창의적인 공세 전략을 구상하였다. 특히, 패전국의 어려운 여건에서도 군 총참모장 ‘칼스 폰 젝트’는 재군비 계획을 세우고, 장차 전쟁을 수행할 인재를 양성하고 장비를 개발하였다. 장비 개발의 경우, 독일군이 '솜므' 전투에서 출현한 영국군 전차로부터 받은 충격으로 독일은 전차개발에 열중하였고, 우수한 전차를 개발하였다. 그리고, '구데리안' 등 젊은 장교 중 일부는, 영국의 전술학자 ‘풀러(J. F. C. Fuller)’의 ‘전격전 이론’ 등을 차용하여 향후 전차와 포병, 그리고 급강하 폭격기를 이용한 '전격전'을 구상하였고, 전쟁이 발발하자 전차와 항공기로 적의 중추 신경을 기동과 화력으로 마비시키는 '마비전략'으로 프랑스를 조기에 항복시켰다.
지난 세기, 미국은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등 지구상 수많은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그 어떤 나라보다도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적들과 싸우며 많은 경험을 축적하였다. 그중에서도 독일이나 프랑스의 교훈 못지않게 6.25 전쟁 때 중공군에게 혼이 난 미군에게는 중공군과의 전투가 충분한 학습이 되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한때, 그토록 무시하던 중국의 전법 연구에도 열을 올렸다. 그럼에도, 베트남전 마저 패퇴하자 미군은 징집제를 버리고 모병제로 바뀐 뒤 절치부심하여, 더욱 고도화·전문화되었고, 상대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도록 늘 훈련하고 있다.
이제, 세계를 상대로 전쟁하는 미군은 '공부하지 않는 군인은 국가와 국민에게 죄를 짓는다'라고 간주할 정도다. 어찌, 치열하게 고뇌하지 않고, 그저 “뻔한 논리, 뻔한 전법으로 상대의 의표를 찌를 수 있을까?” 모두가 '누가 더 창의적이냐?'에 따라 전쟁의 승부가 갈렸다. 창의력은, 평화 시에도 정공과 기공의 배합을 고민하며 조용히 전쟁을 구상한 결과물이다. 생사결단에서 거저 얻는 것은 없다.
1983년 신모라는 북한군 대위 1명이 귀순하였다. ‘김일성 대학’을 나온 군 엘리트로 개인의 사생활 문제로 월남했다. 그는 귀순 후, 땅굴정보를 제공하고 북한군 대대 작전 등 전술적 지식은 물론, 박격포 등 공용화기와 각종 통신장비 등 각종 장비까지도 능숙하게 다루어 한국군 간부를 놀라게 했다. 그의 군사 지식이 자신의 계급 이상의 전문성이어서, 국군 장교에게 경종을 울렸다. 국군에게 충분한 학습이 되었다. 비록,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지휘관은 늘 적의 지휘관이 무슨 궁리를 하고 있을까?를 생각하며, 훈련하고 공부해야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