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국가 주도로 수행하는 것이며, 목적은 ‘승리’하는 것이다. 이런 틀에 비추어 보면, 국가 지도자가 ‘국가 전략’으로 ‘전쟁 목표’를 설정하면, 군부는 지도자의 ‘전쟁 목표’에 맞게 ‘국방(군사) 전략’을 수립하고, 예하 부대들은 ‘군사 전략’으로 결정된 “싸우는 방법(How to fight?)”에 따라 그대로 정교하게 시행하면 된다.
6‧25 전쟁을 돌아보면, 전쟁이 발발하자, 처음부터 소련과의 갈등을 원치 않았던 ‘트루먼’ 대통령이, 서구에 대한 소련의 위협을 내세우며, “유럽방위에 우선하기 위해, 한국에서 국력과 군사력을 낭비하지 않겠다”라며 참전을 주저한 분위기가 역력했다. 그는 한반도 ‘분쟁 당사자’로서 적극 개입하기보다, 그저 유엔의 일원으로 ‘공산주의의 세계 적화전략을 막고 현상 유지’라는 명분에 집착한 정치적 계산으로 전쟁을 수행하였다. 반면에, 스탈린의 계산은 달랐다. 그는 처음부터 미국과 중국을 한국전쟁에 묶어 놓으려, 미국이 북한군 남침을 규탄하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 유엔군 파병안을 제안했을 때,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미국이 주도한 유엔군 파병안 통과를 수수방관하였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남침에 ‘허겁지겁’ 유엔의 깃발 아래 끼어든 미국은, 전쟁 내내 '38선 회복'이라는 ‘현상 유지’에 매달리며 ‘전쟁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수동적 자세로 일관하였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으로,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막강한 육‧해‧공군력의 초강대국이었지만, 정치, 외교, 군사적 우위를 살리지 못하고 허둥대었다. 대통령의 국가전략이, 처음부터 ‘비기는 것’을 ‘전쟁 목표’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런, 대통령의 국가 전략에 따라, 합참 등 한국전 관련 미군 수뇌부의 군사전략도 ‘38도선 회복’이었다. 이들에게는 애시당초, 한국민의 염원인 “군사적 승리와 한국통일”의 목표 따위는 없었다.
한국전쟁에 대해, 미국의 국무, 국방 정책입안자들은,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보다, 이념적 대결 등 ‘정치적 가치’의 평가에 더 주안을 두었다. 그런데, 예상 밖의 엄청난 전력을 가진 중공이 개입하자, ‘맥아더’가 소련이 아닌 중공과 북한과의 싸움에서 쩔쩔매는 바람에 ‘트루먼’ 행정부는, ‘정치적 가치’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결국, '한국전쟁의 성격과 이를 수행하는 방식'에서 현지 지휘관과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견해 차이에, 트루먼이 군사적 승리보다, '명예로운 휴전'으로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기로 결정하며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을 해임했다. 이는 그때까지의 ‘전쟁과 승리에 대한 견해’를 새롭게 갖게 해 준 것으로, 북경의 ‘마오쩌둥’이 현지 사령관 ‘펑더화이’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한반도 적화를 노린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1951년 4월, ‘트루먼’에 의해 전격 해임된 맥아더는 그 특유의 파이프와 검은 선글라스 차림으로 수많은 대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 귀국하였다. 그리고, 미 의회는 맥아더 해임의 정당성 여부를 따지는 ‘상하원 합동청문회’를 열었다. 청문회가 이어지자, 미국의 한국전쟁 목표가 “맥아더가 주장하는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협상을 통한 평화’에 두었다”는 ‘트루먼’의 의도가 노출되었다. 그리고 이로 인한 문제는 그때부터 이어졌다.
중공군의 5차 공세가 끝날 즈음, 미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미국의 적은 소련인데, 참전도 안 한 소련이 뒤에서 조종하는 전쟁에 국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한국전쟁 정전 담판”을 건의했다. 당시, 미군은 육군 18개 사단 중 8개 사단을 한국전에 투입하여, 미국이 우선순위를 두는 유럽에서 소련이 도발하면 감당하기 어려웠다. 또한, 다른 유엔 참전국들도 한국전 병력 증원이 어려웠다. ‘트루먼’의 승인하에, 애치슨 국무장관이 소련과 중립국에게 중국과 정전 의사를 흘렸다.
한국전쟁에서 정전협상이 시작될 즈음, 미국 언론들은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서라며, 트루먼 대통령의 ‘패를 까놓으며’ 미국의 ‘속내 알리기’에 열중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패를 다 읽은’ 공산군과의 정전회담 결과는 참혹했다. “중국의 철저한 비밀주의에 대하여, 미국의 ‘알권리’가 참패한 것일까?” 우여곡절 끝에 상,하원청문회는 ‘트루먼’의 손을 들어 줬지만, 청문회에서 대통령이 기껏 일개 장군 출신 정적에게 승리하는 대가로 미군 수천여 명이 더 희생되었고 수천만 한국민이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한반도 전역이 초토화되었다. 하지만, 전선은 ‘상처만 입은 채’ 도로 38선이었다.
이에 대한, ‘핸리 키신저’의 평가는 날카롭다. “휴전협상이 막 시작되었을 때 (…) 군사작전을 중지함으로써 (…) 미국은 중국인들이 타협을 원하게 만들 수 있는 카드를 스스로 없앴다. 2년 동안 지루한 협상으로 좌절감을 맛본 것은 미국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다”.
한국전쟁에 기습 참전한 중공군은, 자신들의 참전을 알리고 전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1950년 10월부터 1951년 5월까지 5차례에 걸친 대규모 기동전으로 공세를 감행하여 연합군을 한-만 국경에서 몰아내고, 북한군을 재건하는 소기의 성과는 거두었다. 하지만, 한국전 개입이래, ‘기동전’을 전개하며, 전술적으로 승승장구하던 중공군의 발목을 잡은 것은 열악한 보급지원 체계였다. 당시의 중공과 미국은 거의 1,000배에 가까운 경제력 차이가 있었다.
중공군 후방지원 부사령관에 임명된 ‘홍쉐즈’는, 중국과 만주의 지도부에게, 전쟁과 군수의 어려움을 알리며 호소했다. 공산당 지도부는 즉각 중국 전역에 ‘항미원조 총위원회’를 결성하고,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전개하였던 전국민적인 전쟁물자 수탈행위와도 다를 바 없는 애국(?)운동의 미명으로 인민들의 허리띠를 졸라매도록 강요하였다. 인민들에게 중공군을 위한 각종 위문품과 화포 및 비행기를 보내 주자며 독려하여, 비록 1회용이지만, 많은 노동자, 농민들은 봉급 자진반납 등 생활비를 절약한 돈으로 "군용기 등 무기 구입에 써 달라"라며 현금을 헌납하였다. 적어도 항공기 약 3,000여 대를 구입할 금액을 모금했을 정도로 거국적인 지지열풍을 몰고 왔었지만, 가난한 인민의 고혈 짜내기가 어느 정도까지 지속 가능하였을까?
중공 인민의 참여는 강압적으로 윽박질렀다기보다 '외세 트라우마'와 오랜 시간 공산당이 인민에 대한 신뢰를 다져온 결과일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3대 기율, 8항 주의’ 등으로 ‘마오’는 ‘민심을 얻는 법’을 알고 있었다. 중공군은 전투준비를 위해 필요한 인민의 물자를 징발할 때도 ’나중에 돌려드린다’는 전표 등을 발급하여, ‘그저, 빼앗긴다’는 기분이 들지 않도록 노력하였으니까… 하지만, 인민의 헌납에도 불구하고 공세를 가하면 가할 수록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도 뒤따랐다. 이제, 중공군에게도 전략, 전술적 변화가 불가피했다.
1951년 6월, 중국 지도부에서도, “이제는 유엔군이 38도선 이남으로 철수했으니, 중앙군사위원회도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 만큼 전쟁을 끝내자”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마오’는 현지 사령관 ‘펑더화이’의 의견을 구했다. ‘펑더화이’는, “지난 8개월간 5차례 공세에서 엄청난 인원, 물자 손실이 있었다. 전쟁이 길어지면 작전, 보급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라고 우려하였다. “미군도 같은 문제에 직면하겠지만 모든 면에서 지원 역량이 우수하니 우리보다 어려움이 덜할 것”으로 판단했다. 또한, “미국은 국제 정치적인 ‘체면’ 때문에, 조금도 양보하지 않을 것이므로, 장기전에 돌입하게 되면 평균 2개월에 한 번꼴로 반격해서 적을 격퇴해야 되는데, 그러려면 매월 3만 명 정도의 보충병과 연 7~8억 달러 전쟁비용이 필요하다”라고 보고했다.
실제, '펑더화이'는 제 3~5차 공세에서 38선 이남으로 남진하다가 군수물자 보급을 이유로 갑자기 공세를 멈춘데서 보듯이, 미국과 한바탕 큰 전쟁을 치를 능력은 애세당초 없었고, 한반도 통일을 위해 부산까지 내려가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질 않은 듯하다. 한편, ‘마오’에게는 3만 정도의 인력 보충이야 충분히 할 수 있지만, 막대한 전비를 감당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마오’는 “지구전을 수행하면서, 담판을 통해 전쟁을 끝낸다”며 “싸우며 대화한다(邊打邊談)”는 방침을 정했고, 김일성도 이에 동의했다.
마오는 ‘저우언라이’를 스탈린에게 보내 '싸우며 대화한다'는 방침을 알리고, 중국이 필요한 비행기, 야포, 탄약 등의 추가적인 지원을 요청하였다. ‘스탈린’은 이를 수락하며, “회담이 계속되는 동안만 싸움을 멈추고, 대화가 멈추면 적극적으로 싸우라”라고 주문하였다. 특히, ‘스탈린’은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는 데 30일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미국이 한국에서 2년 동안 싸우면서도 조그마한 한국조차 확보하지 못하여, 벌써 반전여론이 들끓고 있다”라고 지적하고, “미국은 ‘큰 전쟁(大戰)’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중국이 전쟁을 계속하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라고 전쟁 지속을 계속 독려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1953년 초 스탈린의 죽음은 휴전 회담의 주요 변곡점이 되었다.
미국의 ‘종전 바램’에 대하여 소련의 지원을 확보한 중국이 ‘대화와 전쟁’ 방침으로 답했다. 이에, 양측은 남과 북, 그리고. 미-중 4자 간에 정전회담이라는 설전(舌戰)을 이어 갔고, 상호 입장의 차이로 대화가 막히면, 전투를 압박 수단으로 사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고 다시 대화를 재촉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이른바, 기약없는 지구전으로 병력을 소모시키며 ‘대화는 피의 대가’가 되었다.
미중이 처음 격돌한 중공군의 1차 공세에서, 제일 큰 피해를 입은 유엔군은 미 제1기병사단 예하 8 연대였다. 앞서, 중공군 제1차 공세를 논할 때 이 부분을 언급했다. 기습에 성공한 중공군은 다수의 미군 포로를 수집했다. 북중은 양측 간 합의에 따라 국군 포로는 북한군이, 미군 등 유엔군 포로는 중공군이 관리하기로 하였다.
전장에서는 비록, 서로를 죽이지만 일단, 포로가 되면 ‘제네바 협약’에 의해 신변 보호를 받게 되어있다. 그런데, 1차 공세에 성공한 중공군 지휘부는 포로를 전술적으로 활용할 방법을 모색했다. 당시, ‘맥아더 사령부’는 중공군의 개입을 그저 북한에 대한 단순한 ‘체면치레’ 정도로 과소평가했다. 이를 인지한 중공군 지휘부는, 일부 포로를 풀어 주면 ‘맥아더’ 사령부가 중공군의 차후 공세에 대한 경계심을 갖지 않을 것으로 기대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맥아더’는 필리핀을 침공한 일본군에 밀리며 ‘바탄’ 반도에서 고전하다 그가 이끌던 미군과 필리핀군 8만여 명을 버리고 호주로 도주했던 적이 있다. 일본군은 “자결을 할지언정 포로가 되는 것을 치욕스러운 비겁자”로 간주했다. 포로가 된 8만여 명의 미군과 필리핀군 대부분은 일본군의 혹독한 포로 관리에 견디다 못해 대부분 병사하거나 불구가 되었다. 그런 아픔으로 '맥아더'는 미군 포로에 관심이 각별하였다.
이런 점을 이용한 중공군은 ‘마오’의 승인을 얻어, 제1차 공세에서 확보한 일부 포로를 풀어주는 술책을 구사하였다. 이런 간계는 오랜 전쟁의 역사에서 물려받은 유물이었다. 하지만, 유엔군은 여러 면에서 중공군의 전법이나 간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미군의 X-mas 공세를 약한 줄만 알았던 중공군이 역공세로 되받아친 제2차 공세로, 유엔군은 큰 혼란에 빠져 엄청난 피해를 입고 급하게 38도선까지 패주 했다. 외국의 일부 군사 전문가는 이 청천강 전역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비견할 만큼 크게 전사적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데, 중공군이 제 1~5차 공세를 가할 때마다, 매번 미군, 영국군, 터키군 등 16개 유엔 참전국 포로들이 점점 증가하자, 중공군 지휘부는 본국에 이들을 심문할 요원들을 요청하였다. 외교역량이 부족하였던 신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장차 필요한 외교관 확보전략과 포로 심문을 연계하여 차세대 외교관 요원들을 유엔군 포로수용소의 심문관이나 판문점 회담장의 속기사 요원으로 파견했다.
주목할 점은, 중공군은 ‘홍군’ 시절부터 포로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이는 1928년 이래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하달된 ‘8항 주의’의 8번째 항에 “포로를 학대하지 말라”는 표현이 있어서다. 게다가, ‘마오쩌둥’은 ‘항미원조’ 직전, “유엔 포로는 전쟁이 끝나면 돌려보내야 한다. 나중에 우리 중국을 홍보할 선전원으로 생각하고 잘 대우하라. 특별히, 중국 전통문화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 이들을 관리하라”라고 강조했다.
중공군 지휘부는 ‘마오’의 지시대로 중공군 부사령관 다음 서열인 정치부 주임 ‘두핑’에게 관리업무를 맡겼다. 중공군 정치부는 포로 관리를 전쟁터 못지않은 ‘공작(工作)’의 일환으로 보았다. 그만큼, 세뇌의 방법이 교묘했다. “포로정책은 잘 먹이고, 마음 편하게 해 주면 세뇌는 저절로 된다”며, 중공 심문관은 포로들과 음식을 같이 먹으며 인간적으로 다가갔다. 군사적 심문보다는 추위, 가족, 군생활 등 평범한 대화로, 풍속이나 습성이 다른 여러 나라 군인의 심성과 문화를 이해하려 했다. 이때, 미군들의 인종차별에 대한 흑인들의 감정도 놓치지 않았다. 이런 경험은, 후일 신중국 외교관으로서 국제외교 활동을 전개할 때에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중공군이 관리하던 유엔군 포로수용소는 ‘강계’와 ‘벽동’ 지역에 있었다. 둘 다 압록강 주변 지역이라 지리적으로 중국에 근접하여, 중공군 지휘부로서는 부담스럽지 않은 곳이었다. 그중, ‘강계’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어서 주민들도 친북한 성향이었고, ‘벽동’은 3면이 압록강으로 둘러싸인 반도 지형이라 경계에 용이했다. 포로수용소에는 구타나 괴롭힘도 거의 없었고, 심지어 담장이나 철책도 없었다. 이런 점이 국군 포로를 가혹하게 대했던 북한군 포로 관리와는 다른 방식이었다. 한국식 ‘축사’와 미국식 ‘방목’처럼...
하지만, 포로수용소에서는 가끔씩,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거나 죽일지도 모른다”며 도망친 포로도 있었다. 그러나, 중국 접경 압록강변이라 진입진출로도 제한되고 도주할 곳도 없는 데다, 외국인의 외모여서 금방 눈에 띄어 주민 신고로 붙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는 ‘뛰어야 벼룩’이었다.
후일 포로송환에서 미군 20여 명과 영국군 1명이 중공행을 선택했다. 그들은, “포로의 관리방법이 매우 인간적이었고, 원만한 보급과 문화, 오락, 체육 활동 등을 보장하며 포로관리에 전심을 다했다”는 선전 문구도 외쳐댔다. 하지만, 이들도 감시 대상이었다. 인프라가 열악한 중국 생활은 고달팠다. 일부는 중국 여인과 결혼하였지만, 대부분 몇 년 뒤 본국으로 돌아갔다. 귀국하자 이번에 자국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고 가족, 친지에게 외면당하거나, '공산주의자' 딱지를 달고 감시받으며 평생을 보냈다.
한국전쟁 중, 미군의 중공군 포로 관리는 매우 서툴렀다. 중공군 포로는 약 2만 2,000여 명으로 유엔군 포로의 7배 이상이었다. 전쟁포로는 포로가 되기 이전의 계급으로 대우해야 하나, 중공군은 직책만 있었지 계급이 없었다. 미군은 할 수 없이 국‧공 내전 시절 국민당군 장교로 있다가 중공군에 투항하여 중공군 병사로 복무하다 다시 유엔군 포로가 된 자들을 찾아내어, 특수교육을 시킨 후에 '포로수용소 관리인'으로 활용했다.
포로들은 미국이 주장한 ‘자유의사에 따른 송환’ 결정으로 자신이 갈 곳을 택하였다. 중공군 포로 2만 2,000여 명 중 1만 4,000여 명은 대만행을, 6,000여 명은 중공을, 그리고 나머지는 제3국을 택하였다. 대만행이 유별나게 많은 데 대해, 중공 측이 국민당군 출신 '포로수용소 관리인'에 의한 회유나 억압 등 중공군 포로 관리에 국제법 상 위반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중국으로 복귀한 6,000여 명의 중공군 포로들은 한동안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잠시 후부터 중공 당국에 의한 혹독한 사상검증 작업이 이어졌다. 중공군 당국자들은, 전쟁포로 송환자에 대해, “식량과 탄약이 떨어져 죽을 지경이 되더라도, 항복이라는 치욕을 택한 자들은 인간도 아니다”라고 몰아붙였다. 불과 몇 년 전인 태평양 전쟁에서 유행(?)하였던 구 일본군의 ‘옥쇄 전략’과 비교하며 살아남은 자를 ‘비겁자’로 몰아붙였던 것일까? 이들 중, ‘전공이 있는 자’나, ‘적과의 투쟁을 인정받은 자’는 소속부대로 복귀시켰지만, 우경화되었거나 변절자로 낙인찍힌 대부분은 당적을 박탈당하고 군에서 제적되었다.
이들은 집에 돌아가서도 가족과 친지로부터 “차라리 죽지, 왜 살아왔냐?”며 냉대를 받았다. 젊은이 중 약혼을 하였으나 신중국 건설 열망에 들떠, '결혼을 미루고 자원입대'한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청년의 꿈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결혼을 미루고 자원입대한 자 중 열에 아홉이 파혼을 당했다. 열악한 군대에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르다가 포로 신세가 되었지만, 천신만고 끝에 고향에 돌아오니, 포로 출신 딱지가 평생을 따라다녔다. 온갖 냉대 속에 젊은 청춘을 다 보낸 30여 년간, 이들은 버려진 존재였다. 비록, ‘일자리’가 주어지더라도, 직장에서도 ‘자아비판’을 강요당하였고, 특히 문화혁명 기간 중에는 ‘변절자’로 죽을 고비도 수없이 넘겨야 했다. 이들은 1982년 ‘덩샤오핑’ 시대가 되어서야 복권되었다.
한편, 대만의 국민당 정부로 갔던 1만 4,000여 명의 전쟁 포로들의 운명도 이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처음에는, 대만 정부는 이들을 ‘반공 의사’로 추켜세우며 열렬히 환영하고, 국민당 군에 편입시켰다. 그 때문에 군대 생활을 하는 동안은 그럭저럭 지냈으나 군에서 퇴역한 이후, 저학력자가 태반인 데다 정부가 챙겨 주지 않으니, 이들은 대부분 비참한 말년을 이어 갔다. 그나마, 제3국을 택한 이들이 나은 셈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