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웅 Aug 30. 2024

한국전은 미‧중전쟁 (제33화)-전작권과 상호방위조약

국군 작전통제권 위임

한국의 안보에서 미국과 관련되는 2가지 큰 사건은, 누가 뭐라 해도 '작전통제권' 위임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인데, 이는 모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한 결단이었다. 전자는, 6.25 전쟁 초기 적의 기습으로 혼란에 빠진 국군이 궤멸 직전의 상황에 빠졌을 때, 미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취한 특단의 조치였으며, 후자 역시, 전쟁을 중지하려는 미국을 붙잡아 두기 위해 미래를 내다본 큰 혜안이었다. 결과적으로 둘 다, 지금껏 한국 안보의 주요 축으로 남아있고, 한국이 지난 수십 년 동안 마음 놓고 경제 성장에 전념할 수 있게 해 준 방패막이었다. 


1950년 7월 14일, 유엔의 참전 결의에 따라 한국전 전담 유엔군사령부가 창설되자, 같은 날,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 주도 작전 수행의 효율성을 보장함으로써 전쟁을 신속하게 종결하기 위한다며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위임하였다. 결과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이러한 신속, 과감한 결정으로 한국을 공산화의 위기에서 구하였고, 이는 그의 외교적인 안목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사실, 작전통제권(Operational Control)이 무엇인가? 내 병력을 남에게 맡기는 것이다. 한 국가의 군권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엄청나게 굴욕적인 일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이승만 대통령은 작전통제권 위임에 대한 서한을 맥아더장군에게 발송하기 전, 한국군 총참모장 정일권 장군에게, 그의 결정이 미국과 유엔의 도움이 필요한 시점에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설명하였다. 당연히, 정 총장은 군의 통수권 및 인사, 조직과 연계된 문제점, 작전 수행상 자율성 훼손 등의 어려움을 지적하였다. 하지만, 결심을 굳힌 이 대통령은 국가적 위기로 유엔군의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니, 불편하더라도 미군과 군사작전을 원활하게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정 총장을 설득하고, 작전통제권은 언제든 회수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렇게 주어진 작전통제권은, 40년이 지난 1994년에서야 평시작전권(평작권)은 회수되었지만, 전시작전권(전작권)의 경우 한, 미 간에 수 차례 논의와 연기 끝에 70여 년이 지난 2020년 이후 다시 재논의하기로 하였다. 회수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고난도 정보수집체계, 적의 비대칭 무기체계(핵, 미사일, 잠수함 등)에 대한 대응책, 국군 지휘부의 작전 수행능력 등등 회수할 조건 충족은 지금도 여전히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작전통제권 위임으로, 국군의 군사작전은 유엔군 사령관의 체제에 통합되었으나, 국군이 미군에 배속되는 경우 외는 자체 지휘계통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951년 ‘현리전투’ 당시 육군본부가 작전지휘를 하고 있었던, 국군 제3군단이 중공군의 공세에 군단 전체가 붕괴되자, 미 8군 사령관은 한국 육군본부가 그때까지 예하부대에 대하여 실시하던 작전지휘권을 제한하고, 인사, 군수 등 행정적인 지원에만 국한시켰다. 


한국이 미국에 국군 작전통제권을 넘기며 공산군의 침략을 그럭저럭 막아내자, 이제 전쟁 지속 여부의 기준은 미국의 ‘국가이익’에 달리게 되었다. 6‧25 전쟁의 영웅인 백선엽 장군은 전쟁 중에 기록했던 그의 일기에서, 국군은 강해야 한다” 그리고 힘만이 모든 걸 해결한다”라고 울분을 표했다. 당시, 그는 유엔군과 공산군이 휴전을 다루던 군사 정전회담 한국측 대표였다. 우리 국민의 통일 염원보다 양측이 점한 전투선에서 서둘러 전쟁을 멈추려는 유엔측 미측 장성의 모습과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넘어지는 오만한 공산측 대표와의 휴전 회담을 목도하면서, 한국측의 무력함을 얼마나 느꼈기에 그처럼 한 맺힌 절규를 했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미 8군은 '화력전'으로 중공군의 5차 공세를 몰아내고, 적의 공세가 종말점이 임박하자, 한국인들의 염원인 금강산―원산을 회복하기 위한 전과확대 공세를 구상하였다. 하지만, 중공과의 확전을 우려한 미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이를 거부하였다. 또, 한국측이 휴전을 앞두고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한강 하구언’ 확보와 금강산 일대’ 탈환을 위한 공세를 준비하였지만,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나 후임자 ‘클라크’ 역시 이러한 시도를 번번이 거부하였다. 미군이나 유엔군 입장에서는 생소한 이국땅의 국경선 확장이, 그들이 더 많은 피를 흘릴 만한 이슈는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이들은 심지어, 한국 정부가 휴전을 반대하자, 한국은 많은 유엔군 병력의 생명과 피의 대가로 확보하려는 휴전을 방해할 권리가 없다는 말로 한국 정부를 애써 무시하였으며, 앞서 본 바와 같이,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한국 정부 인사나 군 지도자들을 구금하고 유엔군에 의한 군정을 실시하고 휴전협정에 서명하려 계획하였을 정도로 고압적이었다.


미국은 오만하였다. 하지만, 중국, 일본, 러시아와 달리 한국에서 영토적 야심은 없었다. 다만, 아무리 연합국이라며 팔짱을 껴도 자기들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언제든 우리를 버릴 수 있다”라고 확실히 알려 주었다. 이처럼, 미국은 천사도 악마도 아닌, 그저 국가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강대국이었다. 우리가 힘이 없고 약하면, 약한 만큼의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다. 단순히, 동맹이라고 해서 모든 걸 해주길 바랄 수 없고, 오히려, 상대가 동맹의 의무를 들이대면 기여를 피할 길도 없다. 그리고, 나와 이해관계가 다르다 해서 탓할 수 없다.



한미상호방위 조약과 ‘이승만’ 대통령의 벼랑 끝 전략

휴전협상에서 밀당이 계속되던 1952년 12월, 고지식한 ‘트루먼’의 뒤를 이어, 군인 출신인 ‘아이젠하워’가 미국의 새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당선자 신분으로 한국 전선을 방문하였고, 그 자리에서 만약, 휴전 회담이 결렬될 경우, 미국의 군사력 사용범위와 수준에 제한을 두지 않겠다며 공산측을 공개적으로 압박하였다. 그리고, 1953년 3월 5일 그동안 김일성을 부추겨 한국전쟁을 도발하고 중공의 참전을 끈질기게 지원하던 소련의 ‘스탈린’이 드디어 사망하였다. 트루먼과 스탈린이 사라졌다. 이제, 한국전쟁의 주역들이 바뀌었다.


1953년 초, 미국에서 ‘아이젠하워’ 신정부가 출범한 뒤, 별다른 대책 없이 전쟁에 뛰어들어 큰 희생을 치렀던 미국은 명분만 얻으면 “어떠한 휴전”으로라도 지긋지긋한 전쟁으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런 미국의 의중을 파악한 ‘이승만’은 한국이 기댈 곳이라고는 미국밖에 없지만미국이 한국을 지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계산을 염두에 두고, 휴전을 반대하고 단독으로라도 북진통일한다는 강경한 ‘벼랑 끝’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전 한국 국민을 총동원하여 미국을 압박하였다. 휴전 반대 데모와 ‘혈서’가 난무하는 전국 각지의 궐기대회에서 통일이 아니면죽음을 달라!”라고 외치고, 국회도 북진통일의 선봉장이 되자!”며 휴전 반대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며, 군 지휘자들도 ‘은밀한 형식’으로 공공연하게 ‘북진통일 계획’을 수립하고, 외교관도 미군이 철수하면우리는 싸우다 죽을 것이다라는 의사를 동맹국들에게 확실히 전달하였다.


한국 정부와 한국민의 조직적인 휴전 반대 행위에 당황한 유엔군사령부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여, ‘국군이 유엔군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경우(조건 1)’, ‘한국 정부와 국군이 독자적인 행동을 취할 경우(조건 2)’, 그리고 ‘한국 정부와 국군이 “명백하게 적대적”인 행위를 할 경우(조건 3)’에 대한 대응 전략을 구상하였다. 유엔군 사령관이 1953년 5월 22일 미 합참에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미 8군은 조건 1, 2의 경우, ‘명령에 응하지 않는 국군을 무장 해제’시키고, ‘국군과 한국민의 통행을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조건 3의 경우는, 유엔군에 의한 계엄령 선포로 군정을 실시하고 민간 및 군 지도자를 구금한 뒤 휴전을 성사시킨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미 국방부가 한국에서 일어날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대처해 나가며, 6월 17일, 판문점에서 이미 군사분계선 조정과 포로송환 협정에 서명하고 휴전협정의 정식 조인만 남겨 놓은 상태에서, 미 국무부는 이승만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미 대표단을 파견하려 했으나, 6월 18일 새벽, 이승만은 기습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하여 버렸다. 관련하여, 미 국무부는 미 국방부의 보고서를 접수하고 나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였다. 


한편, 한국 정부의 이 같은 전격적인 조치에 미국도 분노하였지만, 중공은 더 크게 분노하였다. ‘마오쩌둥’은 즉각 6월 19일, ‘펑더화이’에게 반드시 행동으로 중대한 표시를 보이고적에게 강력한 압력을 가함으로써 유사한 사건이 다시 발생치 않게 해야 함과 동시에아군이 전장 주도권을 장악하라라는 강력한 지시를 내렸다. 이에, ‘펑더화이’는, 이승만 군대에게 막대한 타격을 가하여 1만 5,000 이상 섬멸을 건의하였고, ‘마오’는 “위군(허수아비 군대, 한국군을 지칭) 1만 이상을 섬멸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를 승인하였다.


‘펑더화이’로서는 휴전협정 타결을 앞둔 시점에서 유엔군과의 대규모 전투로 자칫 휴전협상의 판이 깨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미군이나 유엔군에 대한 대규모 공격은 시도하지 않은 대신, 국군을 공격 목표로 특정하였다. 이는, ‘휴전을 반대’하는 이승만과 한국민에 대한 ‘응징의 표시’로서, 해 볼 만하다고 판단되는 국군에게 공격을 가하려 한 것이었다. '펑더화이'는 여기에 때마침, 한국전선에 새로이 증원되는 중공군 병사에게도 ‘전투경험’을 쌓게 하는 효과도 겸하여, 지금까지 국군이 방어하는 지역 중에서 비교적 공격의 성과가 있었고, '휴전 이전에 가장 갖고 싶었던' 금성 돌출부’ 지역을 공격 목표로 선정하였다.(금성 전투)


중국처럼, 한국 정부의 기습적 반공포로 석방에 분노하였던 미국도 6월 19일, ‘아이젠하워’ 주재로 긴급 국무회의를 열었으나, 분노한 중공군이 '금성 돌출부' 지역의 한국군에게 대규모 공세를 가해오자, 어쩔 수 없이 한국에서 아직은 공산주의가 우리 주적이다라며 사태를 수습하고 한국민을 진정시킬 방안을 모색하였다. 금성 전투는 양측에 엄청난 인명 피해를 안기며, 휴전협정 체결일 7월 27일 날 1주일 전에 종결되었다. 


이처럼, 어떻게든 휴전을 이루어 내려는 미측의 설득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국군 단독으로도 북진통일을 이루겠다는 이승만의 입장은 미국을 크게 괴롭혔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은 휴전에 ‘아무런 방해를 하지 않는' 대신, 미국이 NATO에게 제공한 즉각적이고 자동적인 개입이라는 동맹관계에 미치지 못하지만,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장기적인 경제 원조, 해‧공군과 육군 20개 사단의 한국군 증강을 위한 군사원조 제공 등을 보장받았다. 벼랑 끝 전술로, 그토록 바라던 ‘한미 상호방위 조약’을 얻어내자 북진통일의 뜻을 접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서명식

세계 최빈국인 한국과 세계 1위의 미국이 8월 8일, ‘상호방위조약’에 가서명하였고, 한국은 미국의 안보 우산 속에 ‘국가안전보장’이라는 안전장치를 갖게 되었다. 대통령과 전 국민이 합치단결하여 결연한 의지를 과시한 결과였다. 이후에도, 미국은 한국의 ‘독자적인 행동’을 우려하여 항상 한국을 견제하였지만, 이승만은 그가 기댈 수밖에 없었던 미국을 가장 불안하게 만들어’ 한국에 필요한 것을 얻어 낸 장본인이었다는 게 역사적인 평가다.   

   

70년 역사 한미동맹의 명암

1950년 12월, 중공군은 제3차 공세를 앞두고 북한군에 대한 작전통제를 요구하며 '중-조 연합사령부'를 설치하였다. 한/미 간의 연합작전을 본뜬 모습이다. 그리고 다시 1953년 7월, 한국전쟁 휴전협정 직전에,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이라는 ‘벼랑 끝 전술’로 미국을 압박하여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경제, 안보 원조를 보장받자, 중공과 북한도 이번에도 따라 하였다. 그 결과, 1958년 중공이 북한에서 철수할 때, 북-중 양국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모방하여 1961년 ‘중-조(북-중) 우호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런데, 전쟁을 치른 이들 국가 간 조약의 특징은, 조약의 공통사항으로서, “조약국 중 어느 한나라가 외부의 무력 침공을 받으면 상대방 국가도 전쟁에 자동개입 한다는 내용이 있다는 거다. (참고로, 양 조약 간의 차이는 북-중 조약은 영구적이며 쌍방 합의에 의해 폐기되나, 한-미 동맹은 무기한이지만, 어느 일방의 통보로도 1년 내 효력을 상실하도록 되어 있다.) 한미 양국은 이 조약에 따라, 1954년 군사적으로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육군 본부 등의 기관들은 미군 군사당국 또는 실무부서와, 전시 비축물자, 미군 장비의 배치, 군사판매 및 기술지원, 작전, 정보협력 등 실무협정을 미국과 잇달아 체결하고 국군에게 필요한 각종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미군이 휴전 이후에 휴전선 전방지역 경계임무를 담당하고, 주요 전투물자도 국군에게 공급하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유엔사도 연합군의 최상급 제대로서 한반도 방위에 대한 각종 군사전략을 입안하고 기획관리까지 다 해주었기 때문에, 한국의 국가 지도자는 국가전략을 국방분야에서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지를 고민할 필요조차도 없었다. 그러니, 국방전략을 토대로 식별된 지침에 대해, 합참이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결정하는 ‘군사전략’을 확립하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군은 이론적으로도 이러한 군사전략의 개념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였다. 오랫동안 요람 속의 아기처럼 과보호를 받은 절름발이 군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월남전이 종료되자, 미국이 군사원조를 감축하고, 미군 2개 사단의 철수, 지휘체계의 변화 등으로 국군에게 자주국방을 강요하게 되자, 그때서야 비로소 국군은 무슨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지를 찾아 그 필요성을 하나하나 인지하기 시작하였다. 그에 따라, 전략이나, 경제적 군 운영이나, 국방기획관리 등의 제도가 도입되었고, 국군의 리더십 함양, 각 제대별 훈련체계, 군사교리 발전, 각 병과별 학교 교육 소요도 발굴되었다. 자주국방을 외치면서부터 차츰차츰 정상적인 군의 모습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주한 미군은 한반도 전쟁 억지력 수행과 지역 균형자 역할의 임무수행을 보장하는 한미동맹의 실체적 힘이 되었고, 한국은 수 십 년 동안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에서 국가 재건과 발전에 전념하여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물론, 반대급부도 있었다. 미군의 서울 주둔은 북한의 침략 위협을 효과적으로 제어하는 수단이었지만, 모든 일에 빛과 그림자가 있듯이, 수도 서울에 주둔하는 미군의, 정치적 입장이나, 위상 그리고 문화적 차이로 인한 심각한 ‘대국민 불상사(不祥事)’도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하위법인 SOFA (‘한미행정협정(韓美行政協定)’ 혹은, ‘주한 미군지위 협정’으로 통용)에는 미군의 일방적 형사재판 관할권을 인정하여 주한 미군과 그 가족의 법적 지위가 너무 높은 불평등 조항이 있어서다. 이로 인해, 미군의 범죄행위로 우리 국민이 심각한 피해를 입어도, 양국 정부는 ‘한미행정협정(SOFA)’를 근거로 개인의 문제는 차치하고, ‘혈맹’을 내세우며 상호안보협력에 여념이 없었다. 이에 일부 시민단체는 SOFA 폐기는 물론, '한미 상호조약' 폐기도 주장하고 있지만, 팩트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미군 주둔의 근거(제4조)만 제공할 뿐이지, SOFA에서 규정하고 있는 주한 미군의 ‘지위’와는 무관하다.


유사한 문제와 관련하여, 중공군이 대처하는 방법은 미군과 많이 달랐다. 휴전 이후, 북한에서는 전쟁 동안 조선의 풍습과 법규를 해친 중공군 요원에 대한 처벌이 있었다. 주민의 곡식이나 가축을 함부로 해치거나 부녀자를 겁탈한 경우였었다. 그런데 중공은 이런 범죄행위를 저지른 자국 군인을 보호하려 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북한 정권에게 이들을 처벌하도록 허용하였다. 이는 우리가 한미 동맹을 더욱 가치 있는 동맹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반드시 주목할 부분이기도 하다.

          


한국의 미군 '용산기지 이전' 제의와 미 8군의 '임무 전환'

재임 간 서울을 방문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용산 미군기지 순방하는 동안, 미군이 서울에 주둔하는 게 적절치 않은 것 같다는 개인 의견을 피력했다. 남의 나라 수도에 외국군이 주둔한다는 사실에 대해, 미국은 많은 부담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군을 서울 밖으로 이전하려면, 이를 제기하는 쪽이 이전비용을 부담한다’는 한미 정부 간 합의에 따라, 용산기지 건물들이 낡았고, 한국 정치정세 변화로 기지 이전이 필요하다지만 미국은 이전비용 문제로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후 느닷없이 자주권 확보를 내세우며 '전작권 회수'(가칭 417 계획, 7월 14일 준 작전권을 거꾸로 되가져 온다)와 함께, ‘미군의 서울이남 이전’을 제기하였다. 한강 이북에서 ‘인계 철선’ 역할(전쟁 발발 시 자동 개입)을 하던 미군을, 후방인 평택에 기지를 짓고 이전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미군의 한강 이북 주둔을 풀어 준 것이다. 언젠가 해야 할 일이나, ‘민족적 자존심’을 내세운 노 정부는, 역대 정부가 북한 위협에 대비한다는 ‘안보상 이유’로 지난 60여 년 동안 온갖 수모 속에서 지켜 온 철칙을 깨어버렸다. 


이에 대한 평가는 후세의 몫이다. 하지만, 경제적 관점에서, 한국은 가만히 있으면 내지 않아도 될 약 12조 원(당시 예상 3~4조 원) 정도의 엄청난 비용을 부담하고, ‘전시작전통제권 전환’과 더불어 ‘미군의 재배치 및 용산기지 이전 사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 사업들은 보수 정권하에서 2차례 연기되다가, 2017~2018년간 용산과 전방에 있던 미 2사단 등 미 군부대들이 평택으로 이전하였다. 서울시는 용산 지역에 2027년까지 민족 대공원을 조성한다”라고 발표하였다. 이로써, 100여 년 이상 외세에 의한 굴욕의 역사는 매듭지어졌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혈맹’을 자처하던 미국의 대응이다. 미국은 한국 정부의 ‘전시작전권(전작권) 전환’과 ‘미군기지 이전’ 제의를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제의를 받자마자 ‘한반도 방위에 전념’하였던 미 8군의 임무를, ‘인도 태평양 연안국 방위(한국 외 인디아, 호주, 태국, 필리핀, 베트남 등)’로 바꾸었다. 미 8군은, 70여 년 전 한반도에서 벌어진 6‧25 전쟁에서 자유공산 진영의 대리전에서 자유진영의 주역으로 싸웠던 부대다. 하지만 이제부터, 미 8군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미 육군기지라는 평택 험프리스’ 기지를 제공받고도한반도 방위는 그들 임무 중 극히 일부가 되었다.


‘전시작전권' 전환 이슈와 함께, 한국전쟁 이후 수십 년 만에, 주한 미군은 한국 안보에 상수가 아닌 변수가 되었다. 미군이 변수라면 당연히 한국은 ‘능력이냐? 의지냐?’ 문제로 몸살을 앓을 것이고, 이제부터 감당할 진정한 자주국방 실현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리고 상수가 아닌 변수로 바뀌어서일까? 70여 년 전, 이승만 대통령의 벼랑 끝 전술처럼 트럼프 전 대통령은 한국의 방위분담금 증액을 압박하며, ‘북한의 비핵화 협의’와 더불어, 평택의 ‘주한 미군 철수‘마저 저울질하였다. ‘혈맹’이라는 동맹 중의 ‘동맹’조차 경제적 이익으로 재단하여, 국가이익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진리를 또 한 번 각인시켰다.      


2020년, 5년마다 갱신하는 한미 방위분담금 협상 타결이 시한보다 늦어졌다. 미국이 느닷없이 분담금을 무려 50억 달러나 요구한 탓이다. 그때까지 10억 달러 정도이던 금액에 비하면 파격적인 요구다. 트럼프의 동맹전략은 경제 논리였다. 지금까지 쌓아 온 혈맹 따위는 헌신짝이다. 국제관계는 그저 서로의 국익이나 필요에 따라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것일까…? 이를 보면 미국은, 우리만 믿었던 ‘혈맹’이었다. 트럼프는 수차례 ‘부자나라’ 한국 방위를 위해 지출되는 국방비 부담을 불평하였고, 한국 대통령과 전화 한 통으로 분담금 몇천억 원을 올렸다”라고 뜬금없는 자랑을 해 대었다. 그러다가, 협상이 여의치 않자, 40억 달러로 수정 제시하고, 협상의 지렛대로 주한 미군사령부가 고용한 한국인 군무원 직원 4,000여 명에 대한 ‘무급휴직’을 강제하였다. 당장, 연합방위태세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데, 안보에 아랑곳하지 않는 미국의 자세는 이율배반적이었다. 


한편, 미국이 터무니없는 금액으로 압박하는 동안, ‘금액 산정의 부당함’조차 강하게 주장하지 못하던 미지근한 한국 정부의 태도는, 미국에 괜한 기대를 갖게 하는 등  협상 전략이 치졸했다. 뒤늦게 협상 결렬이 임박해서 약 3,700억 정도의 한국인 인건비만 협상과 별도로 선지급하고 더 버티겠다”라고 나서자, 그제야, 한측의 의지를 읽은 미국이 한측 제의를 수용하였다. 어쨌든, 한측의 ‘버티기 의지’는 관철되었지만, 애꿎은 한국인 직원 수천 명이 볼모로 잡혀 수모를 당했다.


미군이 효과적인 협상술(?)이라며 자신과 함께해 온 한국인 직원을 볼모로 잡은 모습은, 한국인 동료(?)에게 ’같은 팀원’이라며 매일 웃으며 인사했지만, 실상은 단순한 이용대상에 불과했고, 계산된 협상논리 속에 언제든 내팽개쳐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틈만 나면, “같이 갑시다!(Kachikapshida)”고 외치던 미군의 허구가 드러난 셈이다. 돈 몇 푼 더 얻겠다며 동료 직원조차 볼모로 잡고 협상을 진행한다 해서 진정으로 원하는 비용 대비 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 1954년 한미 동맹을 맺은 이래, 미측 군무원으로 일하던 한국인 직원이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한국 정부에 볼모가 된’ 최악의 사례로 남게 되었고, 더불어, ‘방위태세보다 분담금이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던져 ‘한미 동맹’의 의미도 퇴색하였다. 


한미 동맹이 70여 년 이어오는 동안, 동 조약에 따라 미국이 베트남 전이나 걸프전, 이라크전, 아프간 전 등에 개입할 때마다 ‘일정 부분 역할’을 해 주도록 미 측으로부터 강요 아닌 강요를 받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때로는 현금지원으로, 때로는 병력지원으로 최소한의 생색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만약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미중 간에 자동적으로 전쟁 상황이 벌어질 것이고, 미국과 중국은 한국과 북한에게 자동으로 전쟁에 개입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인데... 자칫, 대만판 한국전쟁의 모습이 재연될 개연성이 있는 셈이다. 이제부터는 한미동맹에 대해 보다 예리한 통찰력으로 들여다봐야 한다.

작가의 이전글 한국전은 미‧중전쟁 (제32화)-휴전협정과 전쟁포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