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군대는 AD 11~13세기간 중동지역에서 중세 십자군을 격퇴하였을 뿐만 아니라, AD 8~15세기까지 스페인의 이베리아 반도와 남부 이태리, 그리고 남부 프랑스와 서부 지중해를 지배하였다. 이처럼, 아랍계가 이슬람 대제국을 건설하였을 때, 동쪽으로부터 아시아계 유목민 '투르크'족이 유입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선조는 원래 중국대륙 서부 알타이 산맥일대에 거주하던 유목민으로, 중국 중심에서 볼 때, 우리 한민족이 '동이'라면 이들은 '서융'이라는 견륭족으로, 돌궐족으로도 알려진 이들은 실크로드 '텐산남로'를 지배하고 있었으나, 중국 왕조의 공격으로 서진을 거듭하였다. 이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뒤, '셀주크' 투르크 제국을 건설하였으나, 살라딘의 '아유브' 왕조에 흡수되었다. AD 1299년 지금의 터키 수도 '앙카라' 인근에서 투르크 유목민 부족장인 '오스만'이 '오스만 공국'을 건설하고 동로마의 잔존 세력을 격파하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제, 십자군 전쟁 이후의 이슬람-서구 전쟁의 다음 충돌은, ‘오스만 터키’의 술탄 ‘매흐매트 2세’에 의한 ’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이었다. 1453년, ‘매흐매트 2세’는 2달여에 걸친 공성전에서 역사상 최초로 커다란 대구경 화포를 동원하여 1,000년 제국의 견고한 성벽을 깨뜨리는 한편, 흑해 상의 함선을 육로로 이동시켜 내륙 깊숙이 위치한 ‘콘스탄티노플’ 항구로 진입하였다. 바다에 띄워둔 함선을 산을 넘어 다시 건너편 바다로 옮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승리의 환희를 생각한 무슬림은 이를 행하였다. 이에 비해, 기독교인의 일부는 방어망의 약점을 무슬림에게 흘리는 등 이해타산 적이었다. 물론, ‘베네치아’에서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연합군을 결성하여 동로마를 지원하려는 회의도 하였지만, 기독교(천주교)와 ‘동방 정교(그리스 정교)’가 서로 다른 지파여서일까? 위기에 처한 동로마가 눈이 빠지게 기다렸던 기독교인의 지원은 없었다.
AD 315 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AD 380 년에는 로마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였다. 그런데, 그의 사망 직전 로마제국이 워낙 방대하여지자, AD 395 년 '정치적' 목적으로 자식들에게 서로마와 동로마로 나누어주었다. 하지만, 불과 100여 년도 안 된 AD 476년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되었다. 이후,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한 게르만 각 부족들은 로마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기독교로 개종한 뒤, 로마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이처럼, 원래의 로마인과 게르만 족에 의해 동, 서 양쪽으로 나뉘어 발전하던 기독교는, AD 700년 겅 성인상을 우상으로 간주한 동로마 황제가 '성상 파괴'를 시행한 사건을 계기로 '로만 가톨릭(천주교)'와 '그리스 정교'로 분리되었다, 이제, 정치, 지역, 종교마저 갈라졌다. 천주교와 그리스 정교는 한뿌리에서 나왔으나, 성인의 우상 숭배화의 여부, 성령이 성부와 성자와의 동등성 여부 등 교리상 차이가 있었고, 제노바인들의 라틴계 외국인에 대한 혐오도 있었다.
AD 1453년, 이슬람과 기독교(지파인 동방 정교)와의 전쟁에서, 동로마는 1,000여 년 전 '테오도시우스 2세'가 건설한 철옹성을 방패 삼아 사력을 다하였지만, 다시 무슬림이 승리하였다. 오스만 제국 침범이전까지 유럽대륙을 유린했던 어떤 이민족도 이 성을 넘지 못했다. 해자와 함께 3중으로 된 이 성벽을 공략하려면, 먼저 폭 20m, 깊이 10m의 운하를 '무사히' 넘어야 한다. 이어, 다시 10m의 도로를 횡단한 뒤, 20m 높이의 성벽을 공략해야 한다. 그리고, 성벽을 넘어서면, 다시 내부에 들어선 폭 10m의 도로를 건너야 한다. 마지막으로, 다시 30m의 성벽을 타 넘어야 한다. 로마군은 적의 도발을 지켜보다 성위에 서서 아래를 공격하면 된다. 적이 공격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오스만 군의 정예부대는 슬라브인과 게르만족 프랑크인으로, 이 같은 공성전의 선봉에 섰다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이슬람이 난공불락의 천년 성벽을 이긴 것은 포신 길이 8미터, 포구 구경 0.5미터의 거대한 대포와 함대 덕분이었다. 무슬림은 정복지의 기독교 성당에서 몰수한 큰 종들을 녹여 대포의 포환으로 사용하였다. 중세의 철옹성은 대포와 화약에 무력화되었다. 한편 함대는 쇠사슬로 막아놓은 입구를 우회하기 위해 함대를 산으로 끌어올린 뒤 반대편 바다로 내려가 공격을 가하자 동로마군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가뜩이나 상황이 좋지 않은데, 누군가가 이슬람군에게 일반 서민들이 성곽에 드나드는 작은 문을 열어주자, '예니체리'라는 일부 오스만 병력이 성벽탑에 올라 깃발을 날리고, '성벽이 뚫렸다'라는 유언비어를 흘리자 동로마군은 심리적 마비상태에 빠졌다. '예니체리'는 투르크 군의 정예로 '동료는 가족으로, 황제는 아버지로' 따른 왕실 근위대였다.
함락직전 동로마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성 소피아'사원에서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전부였다. 이슬람은 정복지 주민들에게 관용을 베풀도록 되어 있으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오스만 터키’의 매흐메드 2세는 관행이라며 10여 만 명의 부하들이 3일 동안 약탈과 강간, 살인 등으로 광란의 파티를 벌이도록 허락하며, 동로마제국의 흔적을 지우도록 했다. 살아남은 기독교인은 지금은 관광지로 유명해진 '마린구유' 지하도시나 카파도키아 등지에 수백 년 간 숨어 살았다. 십자가의 흑역사다.
이야기가 약간 빗나가지만, 인류 역사에서 피비린내 나는 광란의 역사는 수없이 등장한다. 청조말기, ‘북경의 55일’이라는 영화로 알려진 ‘의화단 사건’에서 이긴 연합군은 베이징을 점령했다. 그런데, 점령군은 의화단에 의해 죽은 백인의 보복을 한다며, 3일 밤낮 황궁의 진기한 보물을 수없이 약탈하고, 살인, 방화, 강간을 자행하여 베이징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뿐만아니라, 엄청난 배상금을 요구하며 청나라를 재기불능으로 만들었다. 서구의 '만행'은 수많은 중국인의 자존심을 짓밟았고, 뇌리 속에 지울 수 없는 강한 ‘외세’ 트라우마를 남겼다. '외세'를 배격한다며 한국전에 달라들었던 중공에 의한 '항미원조'의 심리적 배경이기도 하다.
'매흐매드 2세' 황제는 뛰어난 지략으로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켜, 발칸반도와 소아시아 반도 등 유럽의 1/3과 중동 및 북아프리카 일대를 지배하여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동시에, 동로마 제국의 경제적-문화적 풍요를 물려받았다. 그 이전까지 동로마제국은 이슬람을 유럽으로 확장하는데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이제, '오스만 튀르크'를 제지할 세력은 없어 보였다. 이 지역에 대한 이슬람 지배는 20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다.
그때까지, 서구의 기독교 문화를 물리치고, 사라센 문화를 이룩한 이래 700여 년간 이슬람은 그들의 종교에 대한 자부심 못지않게 과학(특히, 화학 분야 – ‘알칼리’, ‘알코올’, ‘설탕(Sugar)’, ‘목화(Cotton)’ 등은 아랍어) 분야의 발전과 이슬람 원리주의 율법 등으로 자기만족에 길들여져 왔다. 특히, 이들의 문화 수준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곳은 이베리아 반도 남부 ‘안달루시아’의 주도인 ‘그라나다’에 있는 ‘알 람브라’ 궁전이 다. AD 711년 이슬람이 지브롤터를 점령한 때부터 1492년 스페인 군대가 이 궁전을 점령하였을 때까지, 이슬람은 서구에 있었다. 서구가 이 궁전에 진입하였을 때, 이 궁전의 찬란한 건축과 예술 수준에 큰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이슬람권은 한때 금을 제조하겠다며, ‘연금술’까지 지향하였지만, ‘슐레이만’ 대제(1520-1566) 이후 정치적 침체기를 맞이하며, 점점 과학과 기술문명의 발달에도 무심하였다.
한편, 서구로서는 '전화위복'이랄까? 위기가 호기가 되었다. 십자군 전쟁의 패배와 동로마제국의 멸망으로 동방진출이 막힌 서구 제국은, 어쩔 수 없이 실크로드를 포기하고 막연하지만, 멀리 대서양을 거쳐 인도를 찾아 해양으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전까지 동로마를 통해 들어오던 소량의 향료 등 동방의 풍요로움은 서유럽 지배층에게 보물 취급을 받았지만, 공급이 끊기자 해상무역으로 이를 충족하려 했던 것이다. 1492년, 때마침 발달한 나침반, 망원경 등 항해술 덕분에 스페인, 포르투갈 등 해양국가들은 인도로 향한 동방 무역으로 항로가 개설되자 서구 열강은 이윤을 추구하며 너도 나도 ‘대서양’으로 진출하였다. 이들에 의한, '대항해 시대'가 전개되자 서구는 서인도 등 신대륙을 발견하고 무역을 확대하여 오히려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작금의 세계사를 이들이 쥐락펴락하는 걸 보면... 새롭게 역사의 전환점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