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 중 상당수에게는 딱히 목적지인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 순례를 잘 요약한 것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기독교 고전 서적인 '존 번연(1628~1688)'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으로, 이 책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불후의 명작이었다. 주인공 '크리스천'처럼 많은 사람들은 길을 걸으며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길에서 만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거나, 내 이야기를 하기도 하며, 길을 걷는 고행의 시간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이슬람이든, 기독교든 순례를 떠난 자들은 '고행'을 겪으며 자연스레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많은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옛날, 말과 낙타밖에 탈 것이 없던 무슬림에게도 ‘순례(하지)’는 '신을 기쁘시게 하는' 다섯 가지 실행해야(5행) 할 종교적인 의무 중에서도 ‘순례’는 가장 중요한 실천 의무였으며, 이들은 고행을 최상의 영광과 보람으로 여겼다. 부수적으로는, 지리적인 멀리 떨어진 이슬람 각국의 무슬림이 모여드는 순례를 통하여 각종 지식과 문화가 교류되어 비록, 언어는 달라도 이슬람이라는 문화적 일체감을 공유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이슬람 여러 국가를 여행하면, 거리적 간격에도 불구하고 건축양식이나 생활방식이 상당히 유사한 느낌이 든다.
누구에게든, 어느 지역에서든 멀고 먼 아라비아 사막에 있는 ‘메카’로 순례를 떠나는 것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인프라가 열악했던 시절에는... 그 때문에, 이슬람은 순례를 하고 온 사람의 이름 앞에는 반드시, ‘순례를 수행한 사람’이라는 뜻의 경칭인 ‘하지’를 붙인다.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에서는, 이 경칭은 오늘날에도 대통령 직함 앞에 놓을 수 있을 정도로 최고의 직함이다. 그렇기에, 순례자가 돌아오면 온 마을은 대축제를 벌여 그를 환영한다. 이슬람의 사회적 예우와는 달리, 기독교 순례자의 성지 순례는 ‘그간 지은 죄를 속죄받는다’는 믿음에서 출발하여, 영광의 쟁취라기보다 ‘나 자신을 오롯이 다시 생각하는’ 고행 길이었다.
처음, 예루살렘을 향한 '고행 길'로 순례를 시작한 이들은 기독교 수도자와 성직자였다. 로마 제국 이후, 기독교인은 기독교 발상지인 ‘예루살렘’에 대한 '성지 순례'를 종교적인 의무로서 순례하였다. 이슬람은 모함마드의 창시 이후 계속 팽창과 확산을 거듭하다가, AD 7세기 중반 제2대 칼리프 '우마르'가 ‘예루살렘’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 약 400여 년 동안에도 기독교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러나, 11세기 중반 동방에서 침입하여 이슬람으로 개종한 '셀주크 투르크'가 '파티마'왕국을 멸망시키고 '동로마 제국(비잔틴)'과 충돌하자, '셀주크 투르크'는 예루살렘을 이슬람의 성지라며 기독교 순례자 진입을 통제하였다.
사실, ‘예루살렘’은 '아브라함'과 '예수' 등 여러 선지자의 활동 무대로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지이기도 하고, 예언자 모함마드도 이곳에서 '천상'에 다녀왔다고 전해지는 등 3 종교 모두에게 각별한 곳이다. 그런 연유로, 이슬람은 '예루살렘'의 바위의 황금 돔 '알 아크사' 모스크를, 이슬람의 가장 큰 성지인 '카바' 신전이 있는 메카의 '알 하람' 모스크와, '메디나'의 '예언자의 모스크(모함마드의 무덤)'와 더불어 이슬람 3대 성지의 하나로 여기기도 하다.
기독교 순례자의 길이 막히자, 기독교의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서구의 각 영주에게 '십자군이 되어 싸우다 죽으면 죄를 사면받고 천국에 갈 것'이라고 독려하며, ‘이슬람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성지 예루살렘을 탈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교황의 위세는, ‘카놋사의 굴욕(AD 1077)’사건을 경험하였듯이, 종교적 권위(신권-교황)가 세속적인 권위(왕권)를 압도하고 있었다. 교황의 지시에 순종한, 서구 여러 봉건 왕국과 기사는 11C 말- 13C 말까지 약 200여 년간 8차례에 걸쳐 ‘십자군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이교도에게서 성지를 되찾는다'와 '예수님의 성배를 찾는다'라는 종교적 목적 이외에 새로운 영토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 기독교 내부 불만 해결 등 복합적인 동기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분명히 ‘서구와 이슬람’의 전쟁이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역사적 사실에서도, 로마의 국교가 된 기독교는 로마의 힘을 빌려 정복 전쟁에 나섰고, 이슬람도 창시 초기부터 정복을 통하여 교세를 넓혔다. 두 종교는, 전쟁이 선교의 영역이며 교세 확대를 위한 주요한 수단이었으니, 이슬람이 기독교도를 제지하자 이 둘 간의 충돌은 어찌 보면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예루살렘’은 기독교와 이슬람 두 종교가 충돌하는 ‘십자군 전쟁의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200여 년 간에 걸친 8차례 ‘십자군 전쟁’은 성지회복이라는 종교적 열정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도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전리품이나 영웅심리에 더 큰 비중을 두었던 십자군 용병들이 이슬람과 유대인을 무차별 학살하고, 인신매매 등으로 돈과 권력을 갖기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지른 데다가, 기후변화나 전염병 등의 예상치 못한 수난이 원인이었다. 이 전쟁의 패배로 서구의 민심은 신권을 떠났고, 십자군에 참가한 봉건귀족과 기사 역시 몰락하였다. 그 결과, 왕이 교황을 유배하는 ‘아비뇽의 유수(1309-1377)’로 이어져 교황의 신권은 쇠락으로 떨어졌다. 순례로 인한 '십자군 전쟁'의 패배로 유럽의 역사가 바뀐 셈이다. 다만, 전쟁으로 접촉한 이슬람 문화는 서구 문화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십자군은, 거저 종교적 신념으로 상대와 싸운 이슬람군의 모습은 여러 면에서 대비된다. 예컨대, 이슬람군은 패배한 십자가군에 대해, 수차례 관용을 베풀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AD 1187년, 십자군 전쟁 동안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배하던 술탄 ‘살라딘’의 이슬람 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십자군의 왕을 사로잡았지만, 그동안 약탈과 살인을 수없이 자행했던 십자군 포로에게 조차, '살라딘'은 패배자들이 '떠날지? 남을지?'를 선택하게 해 주었다.
성경에도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구절이 있지만, 서구는 그의 관용에 놀랐다. 그렇지만, 이슬람은 발흥이래 급격한 아랍 세력의 확장과 정복을 이어왔으며, 정복한 지역민을 학살하기보다 개종으로 무슬림이 한 '형제'라는 강력한 연대감을 심어 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지배 하에 있는 이교도가 개종을 거부해도 그들의 신앙을 인정하는 ‘관용성’을 보였다. 다만, 개종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그들의 종교를 갖게 하되, 그 대가로 ‘지즈야(인두세: 꾸란 ‘제9장 ‘회개’의 장에서 단 한 번 언급)’라는 가혹한 세금 부과 정책을 썼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꾸란은 ‘종교는 강제로 할지 말지니라(꾸란 2:256)'고 하면서도, 또 한편 '이교도를 처단하라(꾸란 5:33, 9:5)'는 상반되는 계시를 갖고 있기도 하다.
십자군 전쟁은 수백 년 전에 끝난 전쟁이지만, 선조들로부터 아픔을 물려받은 아랍 무슬림들의 가슴속에는 지금까지 깊은 증오심으로 남아있어, 여전히 ‘기독교와 십자군’이란 말만 들어도 치를 떠는 사람이 많다. ‘살라딘’ 사후에도 서구 기독교 십자군의 공격은 이어졌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모두 실패하였다. 이런 연유로 아랍 무슬림은, 지금까지 ‘살라딘’을 알라(신)의 은총으로 서구를 이긴 이슬람 세계의 해방자로, 구원자로 추앙하며, 서구가 이슬람권에 개입할 때마다 ‘살라딘’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고 외친다. 참고로, 술탄 '살라딘'은 무슬림 형제들이 독립국 건설을 거부하여 여러 지역에서 흩어져 살아가는 ‘쿠르드’족의 선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