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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과 군국일본-⑤조슈와 달랐던 사쓰마번

by 김성웅

'사쓰마' 번 이야기


일본 사람들은 조슈를 '메이지 유신의 발상지'로 꼽으며, 사쓰마를 '메이지 유신의 고향'이라고 표현한다. 둘 다 '유신의 초석'이라는 의미일 텐데 이 둘의 역사는 오래전부터 함께 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일본 서남부 지역의 여러 번 중에서도, ‘모리 데루모토’의 ‘조슈’와 ‘시마즈 요시히로’의 ‘사쓰마’ 번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을 섬기다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막부에 복속하여 260여 년간 침묵을 지켜왔지만, 조상 대대로 이어온 번주들의 생각은 막부의 ‘쇼군을 대체하여 천황을 옹립’하려는 존왕파 입장이었다.


‘시마즈’ 가문은 ‘가마쿠라’ 시대부터 '사쓰마‘ (지금의 가고시마 현) 일대를 지배하여 온 토호 세력이었지만, 1600년 '시마즈 요시히로'가 ‘도쿠가와’에 대적하여 ‘히데요시’ 파의 서군으로 참전하였다가 '세키가하라' 패전 이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물러나, 아들인 ’시마즈 이에하사‘가 석고 약 73만 석의 사쓰마 번주가 되었다. 당시, 일본에는 약 270여 개의 번이 있었다.


사쓰마 번은 약 10년 이후 '류큐'(오키나와)를 복속시켜 석고가 약 90만 석으로 증가되어 큰 번이 되었고, 특히, '류큐'를 지배함으로써 대중국 교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하지만, ’가고시마‘ 일대의 토양과 수질이 불순한 데다가, 일본 최남단에 위치하여 태풍의 피해가 잦았고 화산 폭발 등 자연재해도 발생하여 농업 생산성이 매우 낮았다. 특히, 일본의 다른 번에 비해 사무라이의 밀도가 약 2배 정도로 지나치게 높아 사쓰마 번의 재정은 늘 궁핍했다.


게다가, 사쓰마에 대한 경계심을 끝까지 유지하던 막부는 1637년 '규슈’ 일대에서 일어난 ‘기리시탄’(크리스천)에 의한 '시마무라‘ 난을 제압할 때도 의도적으로 사쓰마 병력을 동원하였고, 1754년에는 여러 가지 토목사업 대공사에 동원하여 막대한 재정지출을 유도하는 바람에 사쓰마 번은 거의 파탄 직전까지 가기도 하였다.

이런 시련 속에서도 사쓰마는 막부가 가혹하게 대하는 이유가 ‘정치력 부재’라고 결론짓고, 막부와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여, 1831년, 제11대 번주 '시마즈 나이아키라'는 '아츠히메' (한때 일본 TV의 유명 드라마)라는 번주 수양딸을 쇼군의 정실로 보내는 등 쇼군 가문과의 정략결혼으로 정실부인을 2명이나 배출하였다. 그리고, 이런 친 막부적 입장으로, 사쓰마의 정치적 영향력은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막부 말기에는 정계의 실력자로 대두하였다.


이처럼, 사쓰마를 부흥시킨 ‘시마즈 나이아키라’는 또한, ‘즈쇼 히로사토’라는 인물을 영입하여 번주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재정 개혁으로 번의 부채를 탕감하였고, 1838년에는 농정, 군정, 행정 개혁도 이루었다. 이른바, 사쓰마의 중흥이었다. 이 과정에서, ‘하급 무사’ 출신이라 하더라도, 능력만 있으면 등용하였기에, 이들은 훗날 사쓰마 파벌 인적 조직의 기초가 되었다. 실제,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 같은 유신 혁명론자들이 맹활약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 ‘의 발탁과 ‘즈쇼 히로사토’의 튼튼한 재정 지원, 그리고 대를 이은 후임 번주 ‘시마즈 히사미스’의 지원 덕분이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보면, 같은 시간대에 똑같은 ‘존왕양이’를 외쳤지만 조슈와 사쓰마의 성장 모습은 달랐다. 가장 큰 이유는 각 번마다 번을 벗어나는 '탈번' 행위가 엄격하게 금지되어, 폐쇄적인 울타리 안에서 살았기에 문화나 지식의 교류가 힘들었던 탓이다. 특히, 조슈 번은 영재라는 '요시다 쇼인'조차 18세가 지나서야 겨우 '나가사키'에 들어가서 난학(네덜란드학)을 공부하고, ‘미토학’을 공부하려 번을 떠난 일로 징계를 받았을 정도였다.


물론, ‘쇼인’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존왕양이'나 '대일본 팽창주의'를 전개하였지만, 제한된 교육기회로 학문적 배경이 취약하였던 조슈 번사들은 이런 '쇼인'의 불분명한 지식조차 강한 열정으로, 이념화, 신념화로 굳혀가며, 테러 등 과격한 활동조차 정의로운 사명으로 알았다.


반면에, 사쓰마의 번사들은 이런 폐쇄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조슈번 번사들과 달리, 지리적 특성상 막부의 '남만(서양) 무역'을 전담하는 ‘나가사키’에 있는 ‘데지마’ 상관(商館)을 통하여 네덜란드로부터 무기나 외국 서적 구입 등 다른 번이 갖지 못하는 외국 문물도 접할 수 있어서 매우 개방적, 진취적 분위기하에서, '향중교육'이라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향중 교육’(鄕中敎育)이란, 16세기말, 사쓰마 지역 무사들이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출정한 후, 남겨진 자제들의 풍기문란이 사회적 문제로 야기되자, 지역에서 새로운 청소년 교육을 위해 개발한 것으로, 계층을 초월한 모든 청소년에게 보편적 교육을 제공하자는 전인교육용 자체 교육 시스템이었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책임감을 강조한 '향중교육'은 농업, 기술 등 실용성 교육 이외에, 인성교육 및 공동체 의식을 중점 교육하였는데, 이로써 사쓰마 번사들은 '무예를 익히고', ‘책을 읽고’, 서양식 교육(과학, 수학, 외국어) 등 학문에 정진하여 정계 진출의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이 교육 제도는 훗날, 일본 근대화와 사회 발전의 틀이 되었다.


시마즈 가문의 별장이었던 가고시마의 '센간엔'과 멀리 활화산인 '사쿠라지마' 섬

바다를 통하여 서양을 접해서일까? 사쓰마의 번주들도 서구식 근대화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앞서 언급한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나라의 일부가 식민지가 된 것을 보고, '외국에 패배하지 않는 강하고 부유한 나라로 만들자'라고 결심하여, 서양식 군비를 갖추려고, 자신의 저택과 정원이 이어져 있는 해안에 '슈세이칸'(集成館)이라는 공장을 설립하는 등 '서양식 근대화'를 서둘렀다. 일본 근대화의 첫걸음이었다. ('슈세이칸'에는 차례로 만들어진 '반사로'. '용광로', 유리공장, 방적공장, 증기기관 제작소 등이 아직도 남아 있어 박물관으로 쓰인다)


'나리아키라'가 지은 근대적 공장의 집성관 '슈세이칸'

또한, 번주 ‘나리아키라’는 막부가 내린 '서양선 방어 강화 포대설치' 지시에 따라 군사무기 근대화에 주력한 결과, 철제 대포와 서양식 증기선 건조를 이루었다. 용광로가 없었던 당시로서는, 철제 대포를 만드는 데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였지만, 기술력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가까운 ‘사가’ 번에서 네덜란드의 서적 번역본을 연구하여 ‘반사로’를 이용한 제철 용광로로 철을 생산하자, 철이 필요하였던 사쓰마도 이를 모방하여 ‘모형 반사로’를 만들었다.

조슈'하기'에 있는 메이지 시대의 '반사로'

‘반사로’ 기초공사에는 일본 특유의 ‘성벽축조’ 기술과 사쓰마의 ‘도자기’ 기술로 만든 내화벽돌이 활용되었다. 알다시피, 임진왜란 때, 왜군은 수많은 조선 도공들을 납치하여 사쓰마 가고시마 일대에 집단으로 거주시켜, 도자기를 생산하였는데, 그 기술이 1400도씨의 열을 견디는 내화벽돌 기술에 활용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철 제작은 쉽지 않았다. 수차례 시행착오와 실패가 거듭되었지만 그때마다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 ‘의 꾸준한 지원과 격려로, 1852년에 '반사로'가, 1853년에는 '용광로'가 제작되어, 결국 철 생산에 성공하였다. 이는 ‘즈쇼’의 재정 개혁 덕분에 번의 재정이 넉넉해진 덕분에 계속 지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쓰마가 드디어 일본 최초로 철제 대포 포신을 만들었다.


이처럼, 사쓰마가 철제 대포 이외에도, 증기선, 그리고 신식 소총 등을 남보다 한 발 앞서 개발하게 된 것은, 오랫동안 꾸준히 이어온 서양식 과학, 수학 교육 등 실용적인 기술발전에 집중한 교육 때문이었다. 예컨대, 번주 '나리아키라'는 '무라타 스네요시'라는 소총개발자를 발탁하였는데, 그가 수백 정의 서양식 소총을 분석, 연구하여 만든 총이 '무라타' 소총이다. 이 총은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승리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체적인 대포개발에도 열중하였다. 그중에서도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촌으로서 훗날 러일전쟁의 육군사령관과 일본 육군대신을 거친 후, '일본 최고의 명문가인 '공작' 작위까지 오르게 된 '오야마 이와오'는 이미 1868년 '보신전쟁' 때 포병부대장을 하면서 사거리를 늘린 '야스케' 대포를 제작하였다. 이는 1894년 청일전쟁 때 일본군의 주력 대포가 되었다.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출처: 위키백과)

사쓰마가 이룬 또 하나 군사적 업적은 해군을 설립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사쓰마의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는 일본 수군 대장이었다. 그런 탓일까? 1853년 미국의 흑선이 내항하자, 놀란 막부가 사쓰마, 미토, 사가, 토사 번 등에게 군함건조를 허락하고 장려하였는데, 사쓰마의 번주 ‘나리아키라’는 이 기회를 활용하여, 서양식 범선을 건조함은 물론, 증기선을 만드는데 착수하여 1855년에는 조잡하지만 일본 최초로 대형 증기선 군함(雲行丸)을 건조하였다.


군함이 건조되자, ‘나가사키’에 군함 운용 인력 양성을 위한 ‘해군 전습소’를 개설하였다. 다수의 사쓰마 번사들이 교육생으로 참여하여, 사쓰마 해군의 뿌리가 되어 막부 타도에 큰 역할을 하였는데, 사쓰마는 해군 함선이나 대포 등 신식무기체계를 다룰 수 있는 기술력을 갖게 되어 전투력이 배가하였다. 이들 중에는, 1876년 조선의 개국을 강요한 강화도 조약을 맺게 한 '운요호'의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도 있고,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서 청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토 스케유키’ (청일전쟁)와, ‘도고 헤이하찌로’ (러일전쟁)도 있다.


1859년, 번주 ‘나이아키라’ 사망 이후, 고인의 발탁으로 정계에 입문한 ‘사이고 다카모리’나 고인을 흠모하였던 ‘오쿠보 도시미치’ 같은 하급무사들은, 새로이 번주가 된 '시마즈 히사미스'가 '나이아키라'의 유지를 받들겠다고 선포하자, 이에 감복하여, 번주의 체제 개혁을 지원하였다. 이들은, 그들의 '교육 인맥' 중에서 '정치에 관심이 많은' 하급 무사들과 함께 정치적 결사단체인 '성충조'를 결성하였다.


현실적으로 번주가 하급 무사 집단을 인정하기는 어려웠지만 유연한 정치감각을 가진 ‘시마즈 히사미스’는 하급 무사 집단인 ‘성충조’의 수장 ‘오쿠보 도시미치’를 국정 파트너로 인정하는 한편, ‘성충조’의 정신을 번의 기본방침으로 받아들이는 등 국정 책임자로서 적극적인 지도자임을 가신들과 백성들에게 일깨워 주었다. 그 결과, 조슈의 과격한 유신 혁명가 정도는 아니지만, 급진성이 강했던 사쓰마의 ‘성충조’ 집단은 ‘자신들을 이끌어주는’ ‘시마즈 히사미스’라는 리더를 따라, 강력한 정치력을 과시하는 집단이 되었다.


새로운 번주 ‘시마즈 히사미스’는, ‘나리아키라’를 계승한다는 정치적 명분과 ‘성충조’ 하급 무사들의 지지로 사쓰마 번의 국론을 통일시킨 정치력으로, 중앙정치에서도 대담한 정치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양이론보다 ‘개국의 불가피성’과 ‘거국일치’ 체제를 거론하며 무장대비태세를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정치 구상이 사쓰마의 상하를 막론한 번의 통일된 대외방침으로 인정되면서, 중앙정치에서도 강력한 발언권을 갖게 되었다.


특히, 중앙정치에서, ‘시마즈 히사미스’는 막부와 타협적인 ‘공무합체론’을 외치며, 여러 웅번들과 연합 구상을 실현하려 하였다. 하지만, 소심한 쇼군의 변심으로 이 구상이 무산되자, 사쓰마 번도 앞에서는 막부에 머리를 숙이는 ‘공무합체론’을 주장하다가, 뒤로는 언제든 ‘근대화’라는 자신들의 갈길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처럼, 양수겹장 노력을 하던 그들은 결국, 서구의 '제도 모방과 장비의 도입'에서 '근대화'의 해답을 찾았다.


‘히사미스’는 1865년 영국과의 ‘사쓰에이’ 전쟁에서 영국에 패한 원인으로 군사제도와 낡은 무기체제 탓이라 판단하여, 구식 총포를 버리고, 영국을 통해 '스나이더' 후장식 소총, '암스트롱' 장거리 대포, 증기선의 구입에 나섰다. 특히, 신속한 물자와 병력 수송용 해군의 증강에 주력하였다. 1865년 ‘사쓰에이’ 전쟁 이후 사쓰마 번의 근대화 방향은 자체개발보다 해외 구매 쪽으로 바뀌어 재정부담이 컸으나, ‘류쿠’를 이용한 각종 중계무역과 함께, 막부의 화폐주조 사업 승인으로 재정적인 뒷받침이 가능하였다.


하지만, ‘히사미스’는 영국과 벌인 ‘사쓰에이’ 전쟁의 ‘엄청난’ 후유증으로 이후,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 '시마즈' 가문이 키운 ‘막부 타도’(도막) 파 하급 무사들에게 번의 주도권을 빼앗겼다. 뒤로 물러난 ‘히사미스’의 ‘시마즈’ 가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공작' 작위로 세습 귀족이 된다. 그리고, ‘존왕양이’를 주장하던 이들 번사는, 역시 ‘존왕양이’를 주장하던 조슈 번과 동맹을 맺어 메이지 유신의 원동력으로 활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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