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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과 군국일본⑥'양이'에서 '대양이'로 변화

by 김성웅

일본, 서구와 첫 교전 이후, 양이론에서 ‘대양이론’으로 변화


‘존왕양이’에서 존왕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을 옹립한다는 것’이고, 양이는 ‘외국과의 통상을 반대하거나 외국을 격퇴하고 쇄국을 지속해 나가려는 배외사상’이다. 그런데, 일본의 양이는 특이하다. 서양과 몇 차례 전쟁을 치른 이후, 이들은 입장을 바꾸었는데 논리는 간단했다. 외세를 감정적으로 배척하는 것은 '소(小)양이'이고, 외세로부터 배울 것은 배워서 부국강병을 이루어 서구와 동등하게 되는 것이 '대(大)양이'라는 것이다.

과거 사쓰마 번이었던 '가고시마'시에는 그곳 출신으로, 1905년 쓰시마(대마도) 해협에서 러시아의 발트함대를 궤멸시킨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의 동상이 있는데, 일본인들은 이 승리로 서구열강의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간주하며 메이지 유신의 대미를 장식했다고도 한다. 그들로서는 '대양이'의 꿈이 실현되었던 셈이다.


그런데, 일본의 ‘양이’(洋夷)는 그로부터 40여 년 전인 1862년부터 미국, 영국 등 영사관 직원들을 살해하며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862년 9월에 사쓰마 번의 번주 '히사미쓰'의 호위무사들이, 조그마한 마을을 지나는 동안, 일본말을 몰라 '말에서 내려 예를 표하라'라는 호위무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은 영국인들을 사상시킨 ‘나마무기’ 사건으로 영-일 갈등이 발생하였다.


또한, 외국과의 모든 조약을 파기하고 외국인을 모조리 내쫓아야 한다는 ‘파약양이’ 사고방식을 가진 조슈번 주류의 ‘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 (요시다 쇼인의 매제), ‘이노우에 가오루’, ‘이토 히로부미’ 등 '쇼카손주쿠' 문하생 11명은 1863년 1월, 영국공사관에 잠입하여 준공 직전의 건물을 방화로 전소하는 과격한 행동을 하였고, 이 중 ‘이토 히로부미’는 '고메이' 천황 퇴위를 위해 노력한다는 이유로 국학자를 살해하였다.


‘시모노세키’ 해협봉쇄 전쟁


이처럼, 테러를 서슴지 않았던, 조슈 번의 ‘존왕양이’ 파는 조정이 막부가 양이에 나서도록 압박을 가하는 일까지도 강행하였다. 1863년, 당시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존왕양이’ 파가 장악한 조정의 정치적 압박에 밀려, 막부 설립 이래 처음으로 쇼군이 교토로 찾아가 천황을 알현하였다. 그 자리에서, 당시 ‘존왕양이’ 파와 조정 대신들이 ‘양이 실행’을 강력히 요구하자, 막부는 ‘1863년 5월 10일에 양이를 시행하겠다’라고 거짓 약속을 하였지만, 서구열강과 승산 없는 전쟁을 회피하려는 막부는, 뒤로는 각국 공사에게 개항장 폐쇄와 외국인 철수를 통고하는 문서를 보내고, 겉으로는 조정의 요구에 따르는 척하였다.


막부가 서구 열강에 구두로는 개항장 폐쇄 의지가 없음을 통보하는 동시에, 각 번들이 실제로 ‘양이 실행’에 나서지 않도록 조치하자, ‘양이 시행’ 일인 1863년 5월 10일에, 각 번은 막부의 뜻에 따라 양이를 결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데도, ‘존왕양이’ 파의 아성인 조슈 번은 막부의 지시라며 독자적으로 이날부로 '시모노세키 해협'을 봉쇄하고 외국군에 사전 통고 없이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상선과 군함에 대해 포격을 가하였다.


막부 시절의 청동 대포

하지만, 이들 3국은 이미 통상조약을 맺어 법적인 보호를 받는 나라들이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피해를 입은 3개국 군함들은 합력하여 조슈번의 군함과 포대를 파괴하는 등 6번의 전투를 치렀다. 그동안, 조슈번은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계속 해협을 봉쇄했지만 제대로 승리하지는 못했다. 그러는 와중에, 막부는 조슈와 싸우다가 피해를 입은 서양 군함을 '에도'에서 수리해 주었고, 이들 군함은 다시 조슈 군을 공격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사카모도 료마’처럼 조슈번의 양이론에 동조하지 않던 사람들조차 막부에 적대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아무리 권력투쟁이 격렬해져도 외세가 내정에 개입하는 일에는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기에 누군가가 ‘외세와 결탁했다’라는 꼬리표가 붙는 순간 엄청난 정치적 손실을 입어야 했다. 조약의 의무라지만, 민심을 읽지 못한 막부의 커다란 자충수였다.



‘사쓰에이’ 전쟁


한편, 영국은 전술한 1862년의 ‘나마무기’ 사건으로 협상을 통하여 막부로부터는 배상금을 받아냈지만, 정작 가해를 한 사쓰마 번이 이러한 영국의 배상요구를 무시하였다. 이에 영국은, 1863년 6월 군함 7척을 파견하여 사쓰마번과 전쟁을 벌였다. 이른바, ‘사쓰에이’ 전쟁이다. (사쓰는 사쓰마, 에이는 영국 Anglo의 첫음)


영국 함대의 사쓰마번 ‘가고시마’ 포격도 (사진출처: 위키백과)

당시, 영국군의 함포는 사거리가 4Km를 넘어 1km에 불과한 사쓰마 대포에 비해 유리한 상황이었다. 영국함대는 3일간의 공격으로 사쓰마 번 증기선 3척을 침몰시키고, 10개 해안포대를 초토화하고, 가고시마의 ‘죠카마치’ (성 아래 마을) 대부분을 화재로 소실시켜 사쓰마 번은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영국도 군함 7척 중 3척의 증기선이 소실되는 등 사쓰마 번의 화력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입어, 결과는 사쓰마의 분전에 의한 영국함대의 대패로 보였다.


전투발발 직전, 사쓰마는 영국을 상대로 이긴다는 자신감은 없었지만, 증기선의 단점이 ‘석탄소모량’이라는 점을 알고 있어, 단기간 접전한 이후에 물러날 것으로 예상하며 싸웠다. 사쓰마는 또한, 외국과 무역하는 장점을 십분 활용하여 이미 근대식 군대를 가장 잘 갖춘 번의 하나였다. 전투를 지켜본 미국 ‘뉴욕타임스’ 등 서구 언론은, 일본의 전력이 만만치 않은 수준이라고 보도했고, 다른 서구열강들도 영국 해군이 일본의 작은 지방 정부군에게 패한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조슈와 사쓰마가 대립한 - '간몬(금문)의 변‘


한편, 교토에서는 '존왕양이'를 외치는 조슈의 양이파가 점점 과격해지자, ’고메이‘ 천황의 마음도 점차 이들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조슈가 정국을 주도하는데 못마땅하게 여긴 공무합체파 '아이즈' 번주와 '사쓰마' 번주는 함께 1863년 8월 교토 조정에서 급진 양이파를 몰아내는 쿠데타를 단행했다. 이른바, ’8.18 정변‘이다.

금문경호 천황어소(고쇼)입구

이로 인해, 조슈의 '모리'가가 담당하여 오던 ‘금문경호’ (황실경호)도 금지되고, 조슈 측 지지자들은 추방당하였다. 존왕양이 운동의 핵심세력이었던 조슈번 세력의 약화로 조슈번에게는 어려운 순간에 직면하였는데, 뜻밖에도, 아이즈번 무사대가 교토에 체류하던 ’쇼카손주쿠‘ 문하생 5명이 포함된 조슈의 존왕양이파를 살해하였다.


이 사건으로 1864년, 7월 조슈번 병력 2천여 명이 천황이 거주하는 ’고쇼‘주위에 집결하여 군사시위를 하였지만, 반대파 사쓰마번 지원군이 도착하자 막부군은 약 2만여 명으로 증강되었다. 이런 상황에도, 1863년 7월 18일, 조슈번 측은 ‘아무리 막부 측 병력이 10배가 넘더라도, 이를 돌파하여 천황에게 직소하겠다’며 교토로 출전하였다. 하지만, 조슈 번은 반나절만에 패퇴하고, 교토에는 이 전투로 인해 커다란 화재가 발생하였다.

천황 어소(고쇼) 외곽

더구나, 막부-조슈 간의 전투 와중에 조슈 군이 천황의 ‘고쇼’ 안으로 포격을 가하는 바람에, 조슈는 화재와 포격으로 막부는 물론, 조정의 적이 되었다. 이 사건이 이른바 ’간몬(금문)의 변‘이다. 막부의 건의대로 ’고메이‘ 천황은 이틀 후에 조슈 정벌령을 내렸고, 얼마 후 약 15만여 명의 막부군이 조슈 정벌에 나섰다.


1864년 8월, 사쓰마와 막부군이 조슈로 진격하자, 조슈의 ’양이‘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영국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전년도에 조슈 번이 '시모노세키 해협'을 봉쇄하는 바람에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하며 조슈 번에 보복을 가해왔다. 조슈 번으로서는 설사가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은 전년도 '양이결행일'에 조슈 번에 공격당하여 피해를 입은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등 3개국에게도 조슈 공격 참가를 요청하여, 이들 4개국은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시모노세키' 일대의 조슈 번의 포대를 포격하고 육전대를 상륙시켜 포대를 점거, 파괴하였다. 이른바, ‘4국 함대 시모노세키 포격사건’이다. 당시, 영국 등과 대립하다 파괴당하였던 시모노세키 포대는 이제는 복원되어 ‘간몬대교’ 인근에 놓여 있다.


연합군에 의해 점거된 조슈번의 ‘마에다’ 포대 (사진출처: 서울경제) 복원된 조슈번 포대

시모노세키 전쟁과 사쓰에이 전쟁의 결과


사쓰마는 “막부대신 천황을 위해 싸웠다”는 명분을 얻었고, 적이었던 영국과 접촉하여 ‘프랑스의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겠다’는 조건으로 영국 무기를 획득하는 수를 두었지만, 조슈번은 일본의 실력을 보여주어 ‘외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해서’였다고 강변하였지만, 미국 함대에 의해 조슈의 근대식 군함과 해안포대들은 초토화되었다.


이 두 번의 전쟁과정과 결과를 지켜본 조정은, 조슈는 ‘멋대로 전쟁을 일으켜 외세에 패배하며 조정을 곤란’에 빠뜨렸지만, 사쓰마는 ‘천황을 대신하여 일본의 자존심을 세웠다’는 평가를 하였다. 사실, 조슈의 번사들은 ‘존왕야이’에 대해 진정성을 가진 순진함이었으나 너무 과격하였다. 하지만, 사쓰마 번사들은 현실적으로 행동하여 실속을 취하는 영리함을 보였다.


그렇지만, 이런 비교 분석에도,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번서들은 서구 열강과의 전쟁을 통해, 미국, 영국 등 서구 함대의 강력한 힘을 뼈저리게 느끼고, 무작정 일본에 들어온 외국인을 참살하고, 그들의 시설물을 파괴하는 것만으로는 '양이'가 성공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불러온다는 점을 확실히 깨달았다.특히, 1863년 5월 조슈번이 ’양이 결행일‘이라며 시모노세키 해협을 봉쇄하고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외국 함선을 공격하자, 이들 3국 연합군이 조슈번의 군함과 포대를 파괴했던 전투에서 크게 패한 조슈번 번사들은 구식 장비로 서양세력과 직접 막 부딪히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이들은 '양이'를 효율적으로 실행하는 길은, ‘외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그들의 기술과 지식을 배워 부국강병으로 국력을 신장시켜 그들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훗날 점진적 ‘정한론’과 ‘탈아입구’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영국과는 적대보다 화친을 해야 한다는 이른바 대양이론(大洋夷論) 주장까지 나왔다. 이로써, '존왕양이'에서 '존왕'만 남기고 '양이'를 포기한 계기가 되었다. 영국 또한, 사쓰마번이나 조슈번의 강력한 군사력을 경험함으로써 오히려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훗날 영-일 동맹의 단초가 되었다)



메이지 ‘서구화’의 선구자, 해외 유학생


이처럼, 막부 말기에 일본은 쇄국과 양이를 외쳤지만, 사실 일본은 17세기 ‘기리시탄’ 반란 이후에 포르투갈과 무역을 끊고, 네덜란드와 무역거래를 하는 동안, 난학(네덜란드 학)을 배우고, 그들의 도움으로 1811년에 최초의 일영(日英) 사전까지 편찬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편전쟁 직후부터는 승전국인 영국으로부터 많은 군사학 서적을 도입하였지만, 1853년 미국 함대의 ‘도쿄만 진입’ 이후에는 ‘영어학’에 적극적이었다. 막부는 ‘시모노세키’ 전쟁이나, ‘사쓰에이’ 전쟁 이전부터 서양서적을 번역하고 공부하는 연구소, 항해술을 습득하는 해군학교, 제철소 건립과, 서양식 군사제도를 도입하며 숨 가쁘게 개혁을 진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1860년대, 조선과 청국이 서구 열강 유학생에 무심한 것과는 달리, 1862년 최초로 ‘에노모토 다케아키’ (보신전쟁 시 막부의 해군 지휘관) 등 14명을 네덜란드로 유학생을 파견한 이후, 5년에 걸쳐 62명을 공식 파견하였다. 막부가 파견한 이들은 3년 후에 미국, 중남미를 거쳐 귀국하였다. 한편, 막부 몰래 번이 보낸 밀항자는 공식 집계에는 빠져있지만, 1863년, 영국 무기상 ‘글로버’의 주선으로 ‘요코하마’에서 영국으로 떠난 ‘이토 히로부미’ 등 조슈번 5명과, 1865년 사쓰마 번에서 ‘가고시마’ 항을 통해 영국으로 떠난 17명의 유학생이 있었다.


막부와 양 번의 유학대상국이 달랐던 것은, 막부가 네덜란드에 유학생을 파견한 것은 오랜 난학의 영향이겠지만, 영국과 싸운 경험이 있는 사쓰마와 조슈번은 영국의 문물 습득에 주안을 두었다. 선견지명이 있었다고나 할까? 양 번은, 막부가 지시한 ‘번 자체 유학생 금지 조치’를 위반하면서까지, 당시 한 사람의 유학비가 커다란 저택 2채 정도의 비용으로 엄청나게 비쌌는데도, 서양기술 도입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썼던 것이다. 이들 유학생에 의한 메이지 정부의 ‘서양화’ 정책은 막부가 깔아놓은 기초 위에 튼실한 건물을 올린 모습이었다.


젊은 사쓰마의 군상

'가고시마 현(사쓰마번)의 '가고시마'시 중앙역 광장(근처에 '사이고'와 '오쿠보'의 생가 마을 '가지야초' 자리)에 세워진 '젊은 사쓰마의 군상'이라는 동상이 이들 17명 유학생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들은 13세로부터 34세의 나이였는데, 모두가 귀국하자마자, 때마침 출범한 메이지 유신 정부에 투신하여 거의 가, 메이지 시대 동안에 외무대신, 문부대신, 일본 은행 총재 등등 쟁쟁한 인물이 되었다. 이런 모습을 본 일본의 학부모들은 이후, 약 100여 년이 지난 1970년대까지 자식의 영구, 미국 등의 해외 유학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조슈 번은 당시 20대 전, 후의 ‘이토 히로부미’, ‘야마오 요조’, ‘엔도 킨스케’, ‘이노우에 마사루’,‘이노우에 가오루’ 등 5명의 젊은이들을 영국으로 유학 보냈다. ’요시다 쇼인‘의 미국 밀항 꿈이 무산된 지 9년여의 세월이 지난 뒤였다. 이들 5명은 비록, 나이는 다르지만 같은 고향에서 성장하였고, 유학을 위한 언어나 공학적 배경이 전무하였지만, 이후 유신 정부에서 일본 최고의 정치, 외교, 기술 전문 인력이 되는 등 여러 분야에서 나란히 일본을 대표하는 인물로 진출하여 조슈 (야마구치현)에서는 이들을 ’조슈 5걸‘로 부르며 추앙하고 있다.


참고로, 이들 5명은, ’양이‘를 실현하려면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하고, 군사력은 주로 해군력과 무기제작 기술이라는데 착안하여, 최신 기술과 학문을 익히기 위해 일본인 최초로 런던대학 자연과학계 학부에서 분석화학 중심의 실험 청강생이 되었다. 하지만, 공부하는 동안, 일본과 서구 열강의 큰 전력 차이로 ’양이‘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개국주의’로 마음을 바꾸어 근대문명을 적극적으로 배워 일본을 강국으로 발전시키자는 결의를 하였다.


이들 5명 중,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1년 만인 1864년에 중도 귀국하여, 바로 조슈-4국연합 전쟁에 참전하였고, 전후 협상 등 공로로 승승장구하다 유신 이후 메이지 정부의 총리, 외무대신 등 주요 인사가 되었다. 그리고, 1866년에 귀국한 ’엔도 킨스케‘는 화폐주조 근대화에 기여하였고, ’야마오 요조‘는 ‘동경대학 공학부’를 창설하여 광산, 제철, 철도, 조선 중심의 일본 공업화에 많은 공적을 쌓았다. (말년에는 유럽식 맹아학교를 설립하여 헌신).


그런데, 조슈 번 번청이 있었던 ‘하기’ 역은 조그마한 도시 역이지만 역의 전시실에는 '조슈 5 걸'의 사진이 걸려있다. 이 사진이 있는 이유는, 이들 5명 중에 ’일본 철도의 아버지‘라는 ’이노우에 마사루‘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그는 1868년에 귀국한 이후, 철도 건설에 매진하였는데, 특히, 1873년 '이와쿠라' 사절단을 이끌었던 조정의 우대신 ’이와쿠라‘는 미국의 발전 모습에 충격을 받고, 그 원인이 '철도'라며 ’이노우에 마사루‘의 ‘일본 철도회사’ 설립에 적극 관여하여, ‘일본 동서철도’ 건설을 후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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