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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과 군국일본-⑧막부의 제2차 조슈정벌

by 김성웅

막부의 제2차 조슈정벌 (시쿄전쟁) 전투경과


1866년 6월, ‘삿-쵸동맹’으로 무장한 조슈번은 ’시쿄전쟁‘이라 불리는 제2차 조슈 정벌군을 맞이하였다. ’시쿄전쟁 (4경 전쟁)‘이란 막부가 무려 13만여 명의 대군을 소집하여 불과 5천여 명에 불과한 조슈번을 4가지 방면에서 공격하기 시작한 전쟁이라는 거다. 최초, 막부는 사쓰마번의 참가를 고려하여 5가지 방면에서 조슈를 공격하려 했으나, ’하기‘를 공격하기로 했던 사쓰마번이 조슈와 맺은 '삿-쵸 동맹'으로 출병을 거부하면서, ’고쿠라구치‘, ’오시마구치‘, ’게이슈구치‘, ’세키슈구치‘ 등 4 방면에서 협공을 가하는 전쟁이 되었다.


그러나, 조슈는 이미 서양 신식무기로 단단히 무장해 있었고, 총대장 ’다카스기 신사쿠‘의 강력한 리더십과 전략의 달인이라는 '오무라 마스지로'의 합류로 사기도 충천해 있었다. 전쟁 발발 전, 전장을 둘러본 ’사카모도 료마‘는 "마을마다 군대가 훈련하고, 번의 방방곡곡에 방벽을 치고, 큰 길마다 지뢰를 설치했다. 그리고, 조그마한 숲 속이라도 반드시 야전포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런 곳은 일본 전체에서 조슈밖에 없다"라며 임전태세에 감탄했다. 과연, 전쟁은 조슈 군의 주도권으로 시작되었다.


- ’오시마구치‘에서는 ’오무라 마스지로‘의 조슈 군은 ’기이헤이타이(기병대)‘ 5백여 명의 농민군이었지만, 약 1주일 동안의 전투에서 막부군 2천여 명을 격파하였다.


- ’게이슈구치‘에서는 2천여 명의 조슈 군이 25배나 되는 막부군 약 5만여 명과 약 80여 일 동안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정전에 합의하여 무승부로 끝났다.


- ’고쿠라구치‘에서는 약 1천여 명의 ’다카스기 신사쿠‘가 약 5만여 명의 막부군을 물리쳤다. 당시, 막부군 지휘부는 전투경험이 없는 문관으로서, 그는 압도적인 병력으로 포위하면 조슈 군은 1차 조슈 정벌 때처럼 싸우지 않고 항복할 걸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병력이 부족한 ’다카스기‘는 조슈로 상륙하기 위해 대기 중인 막부군에게 기습을 가하여 상륙용 함선을 모조리 불태웠다. 신식무기를 가지고도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조슈 군에 비해, 여러 번에서 차출된 막부군은 구식무기를 가져 전투력도 약한 데다가 굳이 이런 전투에서 희생을 치르고 싶어 하지 않아 무기체계나 정신전력면에서 조슈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특히, 이 지역 전투의 백미는 ’다카스기‘가 석탄 운반선(증기선은 석탄으로 동력 제공)으로 위장한 조슈 군을 지휘하며 일본 최대의 서양식 군함인 ’후지산마루‘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혀 전장을 이탈하게 만든 것이었다. 육전에서도 ’다카스기‘는 우세한 병력을 보유한 구마모토 군을 여러 가지 전법과 지략으로 격파하였다.


- ’세키슈구치‘에서는 ’오시마구치‘에서 활약하던 ’오무라 마스지로‘가 이끄는 약 1200여 명의 조슈 군이 이번에도 여러 번에서 차출되어 통일된 지휘체계도 없이 참전한 3만여 명의 막부군을 물리쳤다. 역시, ’다카스기‘ 못지않은 지략과 더불어 신식무기로 각개전투를 하도록 잘 훈련된 병사들 덕분이었다.


전투의 실례를 들면, 승전을 거듭하던 조슈 군은 산악을 따라 이동하여 막부군의 주력이 진 치고 있는 ’마스다‘ 성을 공격하였는데, 성을 지키는 막부군이 7천5백여 명 정도였지만, 공격하는 조슈 군은 700여 명 정도였다. 공성전의 경우, 병력 면에서 방어군의 3~6배 정도로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데, 아무리 신식장비로 무장하였다지만 오히려 1/10에 불과한 병력으로 공격이라니... 이 전투에서 전장의 주도권을 장악한 ’오무라’의 기지가 빛났다. 그는 막부군을 세 방면에서 포위 압박하는 척하면서 퇴로를 열주고는 거기에 매복군을 준비시켰다. 그리고, ‘오무라’의 계책에 말려든 막부군은 궤멸적 타격을 받았다.


조슈 2차 정벌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공격하는 막부군이 조슈 군보다 수십 배의 병력이라 ’이번에야말로 조슈가 끝났다‘라고 생각하였지만, 전쟁이 끝났을 때 정작 막부가 끝난 상황이 되었다. 이 전쟁의 승자인 ’다카스기‘는 ‘요시다 쇼인’의 수제자로서 우수한 전술가였다. 하지만, 지병인 결핵으로 승전 7개월 후에 병사하였다. 전 일본총리 ’기시 노부스케‘는 ’다카스기‘가 거병한 시모노세키 ’고잔지‘에 ’다카스기 신사쿠‘의 청동 동상을 건립하여 그를 기념하였다.


전 일본 총리 ‘기시 노부스케’가 ‘고잔지’ 경내에 건립한 ‘다카스기 신사쿠’ 동상

’시쿄전쟁‘에서 막부군이 조슈 군에게 연전연패하고, 전쟁으로 쌀값이 상승하여 농민 반란인 ’잇키‘가 곳곳에서 발생하는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쇼군 ’이에모치‘가 병사했다. 쇼군마저 죽은 데다가 사실상 전쟁에서 패배한 막부는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힘이 없었다. 이 조슈-막부 전투로써, 막부가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사상처음으로 근대식 군사제도를 도입한 조슈 군

조슈 군이 모든 전선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둔 것은; 번 자체 개혁에 따른 경제력 증강과, 번 장병 모두 ‘지면 마지막’이라는 절박한 심정 (상하동욕자승), 그리고, ’가쓰라 고고로‘ (‘기도 다카요시’), ‘다카스기 신사쿠’나 ’오무라 마스지로‘ 같은 걸출한 지휘자와, 근대화된 군사제도, 대량 도입한 신식 무기체계와 그에 따른 전술 전략, 맞춤식 훈련 때문이다.

막부와의 전쟁이 불가피해진 조슈번은 ‘오무라 마스지로’를 등용하여 군정개혁에 나섰는데, ’오무라 마스지로‘는, 전국시대 전쟁의 주역이었던 ’사무라이‘나 ‘아시가루’ (농민지원병)에 의존하는 전근대적 봉건군대의 막부군과 달리, 무사는 물론, 농민 등 거주민에게서 병사를 소집하고 번이 급여를 지불하는 군제개혁을 단행했다. 이는. 국민 의무복무제의 시초로서 그는 ‘일본 근대 군대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군을 창설할 때도 군사제도적인 측면에서 유럽 각국의 군제에 비해 뒤지지 않은 근대적 군대로 바꾸었다.

야마구치현에 있는 '오무라 마스지로' 신사

참고로, ‘오무라’는 메이지 혁명이 성공한 뒤, 메이지 유신을 위해 죽어간 동료들을 진혼 하기 위해, 도쿄에 ’동경초혼사‘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훗날 ’야스쿠니‘ 신사의 전신이 되었다. ’야스쿠니‘ 신사에 들어가면 입구 가까이에 엄청난 높이의 좌대 위에 서 있는 동상이 ’오무라 마스지로‘이다. 그는 일본 제국 군대를 창설과 함께 일본군의 정신적인 지주가 된 셈이다.


‘오무라 마스지로’가 훈련시킨 조슈 군은 전술적인 측면에서 잘 준비된 군대였다. 군사 전문가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그가 잘하였던 점은, 각 제대 지휘관에게 ‘미니에’ 소총이라는 신식 총기에 맞는 ‘각개전투’ 보병 전술을 가르쳐 병사들이 독자행동을 가능하도록 하여 군사력의 가동성도 높인 것이다.



전장의 주도권을 부여한 신식 무기체계


막부 말기, ‘흑선(미국 함대) 내항’ 이후, 막부가 ‘외세’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전국의 사무라이들 사이에는 ‘막부 타도’와 ‘외세 배척’의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이른바, ‘존왕양이’ 파가 대두되었는데, 이 중에서 가장 ‘존왕양이’ 의식이 가장 강했던 ‘조슈’ 번은, 1863년 5월,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3국과 ‘시모노세키 해협 봉쇄’ 전투를 치렀고, ‘사쓰마’ 번도 1863년 6월, 영국과 ‘사쓰에이’ 전투를 치르며, 사상 처음으로 서구 열강과 교전을 벌였다. 그리고, 이들은 이 전투에서 고전하며 신식무기를 가진 서양과 직접 맞부딪친다는 게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뼈저리게 느끼며, 일본 내 어느 누구보다도 신식무기에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슈 군의 ‘미니에’ 소총

일반적으로, 총기의 성능은 활동성과 편의성, 탄약 가용성, 장전시간 및 장전 방법도 중요한 요소이지만, 총강이 활강식이냐 나선형식이냐에 따른, 유효 사거리, 명중률과 치명률 등에 의해 좌우된다. 당시, 나선형식인 ‘미니에’ 소총은 탄환이 회전 관성으로 탄도 안정을 유지하여 약 180미터 (약 200야드) 밖의 물체에 대해 90%의 명중률을 가진 데 대해, 활강식인 ‘게벨’ 소총의 명중률은 42%가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조슈 군의 ‘미니에’ 소총은 1853년이래 막부군이 사용하던 ’게벨‘ 소총보다, 훨씬 사거리도 길고 명중률이 높은 신식무기여서, 실제 전투에서 조슈 군의 병사들은 막부군의 ‘게벨’ 소총 사거리 밖에서 정확하게 조준사격을 할 수 있었다. 특히, 둘 다 단발식으로 매번 총구에다 총알과 화약을 장전하는 전장식이다 보니 재장전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엎드린 자세로 있다가 일어나서 장전해야 했다. 그 결과, 사거리나 명중률이 높은 ‘미니에’ 소총을 지닌 조슈 군 병사들은 상대의 사거리 밖에서, 몇 명이 조를 지어 다니며 재장전하려는 적을 조준사격하고 다시 흩어져 싸우는 등 행동 범위가 넓어져서 각개전투에서 훨씬 유리하였다.


막부군의 ‘게벨’ 소총

특히나, 약 270미터 정도의 장거리에서는 그 차이가 더욱 커져서 막부군은 보이지도 않는 상대에게 무턱대고 얻어 맞으니 겁을 집어 먹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차이로, 조슈 군은 막부 군에 비해 숫적으로는 엄청나게 열세였지만, 우수한 장비로 이를 만회하고 승리하였던 것이다.


조슈번이 이런 신무기를 도입한 것은 '삿-쵸 동맹'의 결과였다. 원래, 조슈번은 '제1차 조슈 정벌'에서 항복한 이래 외국에서 무기를 구입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조슈번은 어떻게든 신식 무기체계 확보하는데 사활을 걸었다. 그리고, 앞서 '삿쵸 동맹'편에서 언급한 대로, 조슈-사쓰마와 동맹을 체결이전에, 사쓰마가 영국인 무기상 ’글로버‘에게 무기를 구매하여 다시 조슈에 판매하는 방법으로 무기거래를 하였다.


영국무기상 ‘토마스 글로버’는 유럽 전쟁에서 변화하는 무기체계의 흐름을 잘 짚고 있었다. 그는 유럽에서 소총이 한 세대씩 진화할 때마다 구닥다리가 된 소총을 일본에 판매하였다. 1860년대 후반, 조슈 전쟁 당시 유럽에서는 총기 후미에서 실탄을 장전하는 ‘스나이더’ 후장식 소총이 등장하였다. 그는 유럽에서 구닥다리가 된 ‘미니에’ 소총을 가져다, 일본에 팔았는데 그 총은 당시 일본에서는 최신이었다. 그는 총포 외에 함선까지 팔아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지만, 훗날, 메이지 정부는 그의 활약에 감사하며 파격적인 서훈까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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