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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과 군국일본-⑨대정봉환(大政奉還)과 왕정복고

by 김성웅

대정봉환(大政奉還)과 왕정복고 쿠데타 ‘메이지’ 유신(明治 維新)


1866년 조슈 정벌 전에서 대패하고 철수한 막부에서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죽자, 마지막 쇼군으로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를 이었다. 그동안, 1867년 이미 전국적 명성을 얻은 ‘사이고 다카모리’는 '시마즈 히사미스'를 물리치고 사쓰마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즈음, 막부는 서양 열강들이 무력시위까지 하며 약속대로 더 많은 항구를 개항하라고 압박하였지만 개국을 늦춰 외세에 대처할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하였다.


사실, 막부도 '고베 해군 전습소'를 설립하여 해군 인력을 양성하고, 각 번에게도 근대식 군함건조를 독려하는 등 군사개혁에 손을 놓지 않았고, 뛰어난 행정조직과 훌륭한 인재들도 많아 막부의 정치, 군사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슈와의 '제2차 정벌' 전쟁에서 만천하에 무능을 드러내고 위신을 잃어버렸다. 그러자, ‘사이고’가 이런 막부의 어려움을 이용하여 ‘삿-쵸동맹’에서 약속한 대로 '조슈번의 사면'을 강경하게 밀어붙이고, 응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막부를 치겠다'라고 위협하자, 막부는 갈수록 더욱 고립 무원이 되었다.


결국, 쇼군 ‘요시노부’는 1868년 막부를 해체하고, 자신도 쇼군직에서 물러나 자발적으로 통치권을 천황에게 반납하겠다'대정봉환'으로 대반전을 시도했다. 260여 년간의 에도 막부는 종언을 고했고, 12세기말 ‘가마쿠라’ 막부이래 정치에서 배제된 천황을 불러들인 것이다. 쇼군이 갑작스레 뜻밖의 반전을 시도한 원인은 ‘쇼군 후계자’ 문제로 불거진 각종 음모론, 복잡한 혈통문제, ‘로주’ 등 가신들과의 불협화음 등이 거론되었다.


하지만, 쇼군의 이런 뜻밖의 조치에, 무력으로 막부를 타도하려고 계획하였던 사쓰마와 조슈에게 무력 사용의 명분이 없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는 쇼군이 번주들을 교토에 모아 새로 구성된 천황 정부에서 실권을 잡을 가능성에 대비하여, 신속하게 사쓰마 병력을 교토로 불러왔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오쿠보 도시미치’는 존왕파였지만, 천황 자체를 신격화하거나 절대시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천황의 칙명이라도 의롭지 못한 칙명은 칙명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졌고, 그저, ‘천황을 어떻게 조종하고 이용할 것인가?’라는 정치공학적 관점에서 천황을 대하였기에, 에도 말기의 ‘마키아벨리스트’라고 불릴 정도였다. 아마도 그런 연유로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사이고'보다 국민적 인기가 덜할 것이다.


‘오쿠보’는 순간순간의 판단력과 순발력이 뛰어나고 유창한 말솜씨를 가진 인물로서, ‘사카모도 료마’의 주선으로 ‘삿-쵸 동맹’을 이룬 이후에도 조정과 각 번을 상대로 계속해서 정치공작을 이어갔다. ‘오쿠보’의 정치공작이 성과를 내며 사쓰마는 '토사번'과 ‘삿-토 맹약’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토사'번 역시, 막부로부터 소외받았던 '도자마' 번의 하나였기에 더욱 의기투합이 가능했다.


‘대정봉환’에 대한 뒷 이야기로는, 당시, 막부와 반막부 세력을 중재하며 ‘대정봉환’을 촉발한 이는 '중재의 달인'이라는 ‘토사’ 번의 ’사카모도 료마‘였다. ‘료마’는 비록 탈번한 낭인이었으나, 그의 존재감이 커지자 '토사'번에서 먼저 손을 내밀며 지원해 오자, 그는 '삿-토 맹약'을 맺은 '토사' 번주에게, '평화적인 왕정복고'를 위해 '국가대권을 천황에게 돌리는 것이 일본도 살고, 쇼군도 사는 길'이라고 쇼군을 설득하고, 만약 쇼군이 거절하면 전쟁뿐이라고 말하게 하여, 쇼군 스스로 권력을 천황에게 반환하는 ‘대정봉환’ 실현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대정봉환’을 선언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신정부를 구성하지도 않고 막부측이 계속 행정을 대행하고 쇼군이 의회의 수장으로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등 정국 혼란이 계속되자, 1868년 1월 3일, 교토 황궁에서 ‘왕정복고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른바, ‘메이지 유신(維新)이다. 주동자는 ‘하급 사무라이’ 출신인 사쓰마번의 ‘사이고’와 ‘오쿠보’, 그리고 조슈번의 ‘기도’였다. 유신은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한다’는 뜻으로, 그야말로 ‘하급 사무라이’들이 벌인 반란으로 인하여, 일본을 혁명적으로 ‘완전히 세탁한다’는 말이었다.


'메이지' 천왕

이들 '하급 사무라이' 출신 지도자들은 막부의 권력을 ‘메이지 천황’에게 이양하게 하기 위하여, 무력 행동대인 ‘사이고’와 ‘기도’는 각각 사쓰마와 조슈의 병력으로 궁궐을 포위하고, 정치 공작대인 ‘오쿠보 도시미치’는 15세 나이 어린 ‘메이지’ 천황에게 '왕정복고'를 선언하도록 조정 어전회의를 조종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기존의 조정관직도 모두 제거하여 새롭게 혁신하겠다’는 왕정복고 쿠데타의 의도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대정봉환' 이후 쿠데타 직전까지, ‘오쿠보’는 쿠데타가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막부의 정권을 천황이 회수하고, 전국의 정치세력을 모아 천황 아래 의회를 둔다'는 구상으로 번주나 조정 대신들의 호응을 얻었다. 특히, 조정 대신 중 ‘이와쿠라 도모미’ 같은 사람은 ‘오쿠보’의 정치공작에 적극 호응하여, 둘 간의 관계가 유신 이후에도 굳건히 이어져 중요한 정치적 변곡점마다 앞장서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니조성, 니노마루 어전

하지만, ‘오쿠보’, ‘사이고’ 등이 왕정복고 쿠데타를 일으키자, 궁궐인 '니조'성 '니노마루'의 ‘메이지 천황’ 어전에서 대 격론이 벌어졌다. 당시, 막부나 쿠데타 세력은 대규모 내전발발과 서양 열강의 개입 우려로 쌍방은 모두 무력충돌을 피하려고 회의에서 모든 것을 결정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긴장감이 흐르는 회의 도중 내내, 쇼군 ‘요시노부’의 처벌에 대해 여러 번주들의 반발이 제기되었지만, ‘오쿠보’와 깊은 관계에 있던 조정대신 ‘이와쿠라 도모미’가 ‘왕정복고 대호령’을 공포하고 이를 수습하는 동안, ‘사이고’가 “칼 하나면 해결될 일”이라고 외치자 모든 사태가 제압되었다. 비로소, 메이지 신정부가 탄생하였다. 천황을 옹위한 ‘오쿠보’는 내무경(수상격), 병력을 끌고온 '사이고 다카모리'는 메이지 정권의 군권을 장악한 근위도독으로 육군 대장, 그리고, ‘삿-쵸동맹’으로 병력을 끌고 와서, ‘사이고’의 사쓰마 군과 연합한 조슈의 ‘기도 다카요시’도 신정부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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