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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과 군국일본-⑯ '테러리스트'에서 총리까지

by 김성웅

‘이토 히로부미’ - ‘메이지 유신(維新)’의 완성자


일본 사람들은 ’ 메이지 유신‘을 떠올리면, 반드시 ’유신 3걸‘을 기억한다. 그런데, 이들은 유신 성공으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후에 거의 동시에 죽었다. 1877년 조슈의 ‘기도 다카요시’는 병사하였고, 같은 해에 ’정한론‘으로 잘 알려진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는 전사했고, 이듬해 사쓰마 출신으로 ‘사이고 다카모리’의 절친이었던 ‘오쿠보 도시미치’도 암살당했다. 모두, 사십 대 후반 ~ 오십 대 전반의 나이로,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들이었다.


한창 일할 나이였던 유능한 ‘유신 3걸’ 등 구세대가 이렇게 한꺼번에 사라지는 바람에, 그들의 빈자리는 뜻밖에도 나이가 어리고 경력이 한창 아래였던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하급 무사출신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특히, 급진개혁파였지만, 외국 유학과 사절단 등으로 견문을 넓힌 ‘이토’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되었다. 게다가, ‘이토’는 조슈번을 장악했던 ‘기도’와 사쓰마 번을 대표한 ‘오쿠보’의 총애를 받은 자였다.

침류정 벽에 걸린 유신사(維新史)

일본 후세들이 바라보는 시선에도 이를 느낄 수 있다. ‘야마구치’ 시 근교 ‘향산공원’에 있는 ‘침류정’에 가보면, 1층에 ‘삿-쵸동맹’을 결의하였던 당시 회의 참석자들에 대한 사진과 여러 가지 액자들이 벽에 걸려있는데, 그중에 ‘유신의 역사’라는 액자가 눈에 돋보인다. 거기에는 유신의 시작점은 1853년 ‘페리의 미국 흑선 내항’이고, 종점은 1885년 ‘이토 히로부미’의 내각 총리대신 취임으로 그사이에 전개된 각종 역사적 사건들이 적혀있다. ‘이토 히로부미’가 총리가 된 게 ‘유신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슈의 하기성 외곽 마을에서 농민출신의 가난한 하급 무사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무시들의 잡역을 맡아하다가 출신, 나이 불문이라는 ‘쇼카 손주쿠’에 입숙하여 ‘요시다 쇼인’의 문하생으로 수학하며, ‘기도 다카요시’,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과 교류하였다. ‘쇼카 손주쿠’ 시절에 문벌 가문 자제들로부터 무시나 박대를 당할 때도 그의 재능을 알아준 ‘요시다 쇼인’에게 감복하여 존왕양이, 부국강병, 애국사상에 따라, 유학의 충효개념과 존왕 사상에 입각하여 막부타도와 천황 통치를 신념화했다.


하기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 생가

1859년 ‘요시다 쇼인’이 처형당한 이후, ‘다카스기 신사쿠’가 ‘쇼인’의 문하생으로 조직한 테러조직에 가담하여, 영국 공사관 방화사건, 막부 밀정 암살, 막부의 ‘천황 폐위 자료’를 조사하던 국학자와 그 문하생을 살해했다. 그런 존왕양이 활동의 공로로 ‘기도 다카요시’의 시종으로서 준무사 신분이 되었다.

그리고, 1863년 ‘이노우에 가오루’ 등과 함께 조슈번의 지원으로 밀항하여 영국 유학을 떠났다. 밀항 전 신분 변장을 위해 무사의 상징인 상투를 잘라버리고 배에 올라, 4개월 간의 항해 동안에도 영어를 익히고, 런던에 도착하여 ‘런던 칼리지(UCL)’에 청강하며, 영어와 영국식 예의를 익히기 위해 영국인 교수댁에서 하숙하였다. 영국 생활 동안 박물관, 성곽, 해군시설, 공장 등을 견학하는 동안, 영국과 일본의 압도적인 국력차이를 목도하고 개국론으로 사상을 전환하게 된다.


1864년, 몇 개월 간의 유학생활 중, 조슈번과 외국 함대의 전쟁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여 영국,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과의 전쟁 방지를 위해 중재하였으나, 실패하고, 조슈번은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대패하였다. 전쟁에 이긴 ‘4국 연합’은 조슈에게 ‘군사작전 비용과 피해보상’ 등 막대한 배상금을 청구하여 조슈는 다시 위기에 직면하였다.


하지만, 조슈의 위기는 ‘이토’에게는 출세길이 되었다. 그는 막부에게 배상금을 떠 넘기는 묘수를 제안했다. 1863년 5월의 조슈의 외국 함대 공격은, “막부가 정한 ‘양이결행일’에 조슈가 따른 것뿐이니, 막부에 배상금을 청구하라”는 것이었다. 영국의 통역관과 친하게 지낸 것이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나, 영국은 막부에게서 배상금을 뜯어냈다. 이를 계기로 ‘이토’의 영어 실력과 협상력은 유명세를 탔고 향후의 그의 출세 기반이었다.

하지만, 막부의 분노는 폭발했다. 조슈 군의 ‘천황 어소’ 포격 사건으로 조슈를 압박하자, 조슈는 서양의 신식무기 확보에 사활을 걸고, ‘이토’를 ‘나가사키’에 보내었는데, ‘이토’가 사쓰마의 도움으로 영국인 무기상 ‘글로버’로부터 7만 3천여 정의 소총을 입수하여 왔다. 1866년 조슈는 불리한 가운데서 ‘삿쵸동맹’에 기대어 막부를 물리쳤고, 이는 1868년 메이지 유신의 시발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영어실력으로 동분서주한 ‘이토’는 개항장이 있는 ‘효고’현 지사가 되었다. 불과, 28세의 나이로 무사 신분 중 넘버원이 된 것이다.


1872년 ‘이토’는 유신 정부의 주요 각료 등 대규모 사절단이 미국과 서구 열강을 시찰하는 ‘이와쿠라’ 사절단의 부단장으로 발탁되었다. 그의 영어 실력이 빛을 본 것이다. 그는 미국에 도착한 뒤 환영 나온 인사들 앞에서 “일본은 아시아의 떠오르는 태양”이라는 이른바, ‘히노마루(일장기)’ 연설을 하였는데, 그날 밤 ‘뉴욕 타임스’는, ‘이토’가, “30세 정도이지만,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인물로 국내개혁을 담당할 정치가”라고 보도하였다.

그는 영국 방문 간, 다시 한번 영국과 일본 간의 군사, 경제력 차이를 통렬히 인식하였으나, 독일 방문에서는 “약소국은 국제법을 지키려 하나, 강대국은 스스로에게 이익이 되면 지키나 불리하면 무력으로 짓밟는다”라는 ‘비스마르크’의 환영사에서 서구 열강의 실상과 제국주의의 단면을 엿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동시에, 그의 카리스마를 흠모하게 되었다.


실제, 그를 ‘롤 모델’로 삼은 ‘이토’는 귀국한 뒤, 자기 집에 ‘비스마르크’ 사진을 걸어놓고, 간절하고 공손한 마음으로 “... 은혜 덕분에, 병도 안 걸리고, 암살도 안 당하고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라고 기도하는 등 숭배의 마음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 정도로 독일을 흠모하였으니, 그가 오직 ‘부강한 일본’을 내세우며 독일 베끼기에 열중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어쨌든, 1873년 ‘이와쿠라’ 사절단은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 사건 때문에 급히 귀국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이고’와 ‘오쿠보’ 등이 ‘정한론’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는 과정에서, ‘이토’는 천황을 설득하여 ‘사이고’의 주장을 철회시키는데 일조하였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오쿠보 도시미치’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유신 3걸’ 중 ‘기도 다카요시’와는 조슈번의 인연으로, ‘오쿠보’와는 업무 수행 능력으로 인정받은 셈이었다. 그런 인연 때문일까? 1878년 ‘오쿠보 도시미치’가 암살당한 뒤 38세인 ‘이토’가 그의 뒤를 이어 각료 중 2인자인 ‘내무경’ 자리를 차지하였다.


사실, ‘오쿠보 도시미치‘를 마지막으로 유신 3걸이 사망한 이후, 정계의 중심은 조슈번 출신의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였다. 둘은 모두 ‘요시다 쇼인’의 ‘쇼카 손주쿠’ 문하생이었으나, 정치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성장하면서 훗날 정적이 되었다. 둘 중에서, 유학과 해외견문을 넓힌 온건파인 ‘이토 히로부미’가, 군인으로서 여러 전투에 참전하며 성장한 강경파인 ‘야마가타’를 앞선 것이다. ‘이토’는 1885년 초대 입헌군주제 총리로, ‘야마가타’는 1890년 제국의회가 성립된 이후 첫 총리가 되었다.


1882년 유신 정부는 ‘헌법 제정에 필요한 자료’를 조사하도록 ‘이토 히로부미’를 ‘프로이센’에 파견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가 따랐던 선임자인 ‘기도 다카요시’가 1875년 서양식 헌법을 제정하기로 작업하기 시작한 이래,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절대적인 군주의 권력과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던 독일의 ‘빌헤름 1세’ 황제와 재상 ‘비스마르크’의 모델을 주목하였던 덕분이었다.


그리고, 1885년에 ‘이토’는 45세의 나이로 입헌군주제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가난한 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나, ‘요시다 쇼인’의 사상에 경도되어 테러와 암살을 일삼던 인물이 유학을 다녀오고, 능력을 인정받아 ‘내무경’이 되고 어느덧, 총리가 된 것이다. 이어, ‘이토’는 독일법 학자들의 조언을 받으며, 일본이 서구 열강과 대등하기 위해서는 '천황 아래에서 일치단결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1888년 4월 제국 헌법 초안을 완성하고, 1889년 대일본제국 헌법을 발포하였다.


제국헌법 발포도

일본제국 헌법 제1조는, ‘만세 일계의 천황이 나라를 다스린다’. 제4조는 ‘천황은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관할한다’는 등, 천황만이 ‘유일한 주권자로서, 국가통치자이며, 원수로써 군의 최고 지휘관’으로 규정하였다. (황국신민) 그야말로, 급진개혁론자인 ‘요시다 쇼인’의 제자답게 ‘이토’의 제안은 ‘천황’에게 최고의 권한을 부여하자는 것이었다.


다만, 제37조에서, ‘모든 법률은 제국 의회의 동의를 구한다’라고 하여 황권과 의회와의 균형을 유지하려 하였다. 그리고, '오무라 마스지로'가 조슈번에서 채택하였던 전 국민 병역의무제도도 이 헌법에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제국헌법의 제정으로 ‘이토’는 지금까지도 일본의 ‘국가설계자’로서 추앙받고 있다. 1890년 이 헌법에 의거하여, 양원제인 ‘제국의회’가 최초로 성립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에 국민주권을 규정한 ‘일본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주권은 천황의 주권이었다.


사실, 메이지 유신 세력의 사상적 배경은 ‘요시다 쇼인’의 ‘대일본 팽창주의’였고, 현실 적인 배경은 ‘이와쿠라’ 사절단의 수행을 통하여 서구의 문물을 체험한 ‘서양 배우기’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주장과 노력을 통하여, 일본의 국력이 상당히 올라가자, 1890년에 이르러서는, 과거 막부말기 1850년대 맺어진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개정을 서둘렀다. 그들에게 불리한 것은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역할은 다음에 나올 해당 편에서 다룬다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 (그의 생가 마당에 있다)

하지만,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아시아의 새로운 강자가 되었다. 서구 열강의 식민제국주의를 모방하여 중국, 조선은 물론, 남방 제국으로까지 경제적, 군사적 진출을 모색하는 동안, 자연스레 제국주의와 군국주의가 일본인들의 의식세계를 지배했다. 군인은 물론 민간인들조차 계속되는 승전에 도취하여 그 반대급부로 침략받는 상대가 얼마나 큰 아픔을 갖을까? 하는 평범한 진리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모두가 승리에 들떠 제국의 영광만 생각하였지, 지금껏, 과거 침략사를 반성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 공략의 공헌으로 '공작' 직위까지 직위가 올랐지만, 1909년 10월 16일, 청나라 만저우 지방 지린성 하얼빈 역에서 조선의 의사 '안중근'에게 저격당하여 암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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