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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과 군국 일본-⑰제국주의의 첫발, 청일전쟁

by 김성웅

제국주의의 첫발, 청일전쟁(1894~1895)


전쟁의 배경

1868년, 막부 타도파들은 메이지 유신을 달성하고, 이어진 막부 잔재들과의 ‘보신 전쟁’에서 승리하자, 1871년 ‘폐번치현’으로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한편, 사쓰마 주도로, 막부 해군의 전통을 계승하며, 일본 해군을 창설하였다. 중국도 비슷한 시기, 청-불 전쟁에 패한 뒤, 북양수사 ‘리훙장’ 주도로 근대화된 ‘북양함대’를 창설하였고, 1885년부터 북양함대를 집중육성하여 영국, 독일산 함정 78척을 보유한 아시아 최강의 해군이었다.


운요호, 이 작은 배조차 상대하지 못한 조선은 굴욕을 당했다

1876년, 영국 소형 강철철골 목조포함(245톤)으로 1870년 조슈번에 인도한 운요호(사쓰마 번출신의 함장 ‘이노우에 사쓰케’ 소좌)로 조선의 해로를 점검한다며 도발을 자행하였다. 당시, 청의 입장은, 조선은 속국이지만 ‘내정과 외교는 자주’(所屬邦土)로 한다며, 적극 개입하지 않아 조선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일본과 ‘조일수호조교’(강화도 조약)를 체결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마치 1853년 미국이 ‘흑선 내항’으로 일본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것과 유사하게, 조선의 자주국가임을 인정하되, 개항과, 치외법권을 인정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청국이 출병 (정여창)하였고, 군란 중 피해 입은 일본인 보상문제로 맺어진 제물포조약으로 일본군 주둔이 허용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일본군이 출병하여, 한성조약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청국과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어, 1885년 리훙장과 ‘이토 히로부미’는 청-일 양국군 철수와 유사시 동시 출병을 통보하도록 약속한 텐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는 향후, 일본이 조선문제에 개입할 권리를 중국이 인정한 것이었다.


이는 국제법을 연구한 ‘이토 히로부미’의 작품으로, 일본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 그해, 일본은 내각책임제를 실시하여, 최초로 조슈번 출신 ‘이토 히로부미’가 1885~1888 년 총리가 되었고, 다시 청일전쟁 기간인 1893~1896년에도 총리를 역임하는 등, 4차례 총리를 역임하게 된다.


1894년, 조선에서 동학농민 전쟁이 발발하자, 이를 진압해 달라는 조선의 요청에 따라 청군이 출병하자, 일군도 동시출병을 이유로 양국군이 동시에 출병하였다. 다만, 청국 군이 아산만으로 동학군과의 교전을 위해 이동하는 동안, 일본군은 경복궁에 진입하여 고종을 유폐하고 윽박질러, 청국과의 관계 단절과, 전쟁 간 일본군을 지원을 위한 친일내각 구성을 요구했다.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 점령하의 조선’이 된 것이다. 이는 내각총리 ‘이토 히로부미’의 승인 아래, ‘오오토리 케이스케’ 공사가 지휘하였으며, 진입부대장은 ‘오시마 요시마시’(조슈번 출신) 여단장으로 ‘아베 신조’의 고조부였다.


참고로, 1904년 러일전쟁 직전에도 유사하게 한양의 황성을 군사적으로 점령하여, 이후 작전의 근거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또한, 1896년 사쓰마 출신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 (조슈번)와, 낭인 ‘미우라 고로’ (조슈번)는 민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조선인에게만 지엄했던 조선의 왕궁은 일본인들이 아무 때나 드나드는 그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사실상 군사적으로 지배를 당한 꼴이었다.


동학 농민 봉기를 진압한 청일 양국군은 아시아의 자웅과 동북아의 패권을 놓고,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조선 땅에서 1894~1895년 9개월간, 조선 왕의 이중적인 지시에 의해 둘로 나뉜 조선군과 함께, 벌인 전쟁에 동원된 병력은 대략, 일군 24만, 청군 63만으로 추정될 정도로 큰 전쟁이었다. 이들의 패권 욕심으로 벌어진 전쟁으로 엉뚱하게 조선 땅은 엉망이 되었다.



전쟁 경과

전쟁의 첫 포성은 바다에서 시작되었다. 훗날 러일전쟁 때 러시아의 ‘발트함대’를 격파한, ‘토고 헤이하찌로’(사쓰마 출신)가 이끄는 일본 함대는, ‘이토 스케유키’(사쓰마번) 연합함대 사령관의 지시로,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청군의 증원 병력을 태운 ‘광을호’, ‘고승호’를 침몰시키고 (영국 선원만 구조하고 청군은 수장시킴), 청군이 자랑하던 ‘크루프사’ 야포 운용병과 유럽인 고문까지 함께 수장시켰다. 이른바, ‘풍도해전’이다.


일본은 해전이 끝난 이후에야, ‘동양평화와 조선독립’을 위한다며, 경기도 성환에 주둔 중이었던 청국 군에게 선전포고와 동시 공격을 가하자 (성환전투), 청군은 ‘평양’까지 후퇴하였다. 신형 곡사포 ‘크루프사’, ‘마우저’ 소총을 가진 청군에게 ‘평양성 전투’는 물러날 수 없는 한판 승부였으나, 전 근대적인 군사 마인드와 신형장비에 대한 포병대의 숙련도와 이해도 부족으로 오히려 포병의 열세까지 심각하였다.


반면, 독일 육군이 훈련시킨 육군은 ‘케틀링’ 기관총과, ‘무라타’ 연발총, 후장식 ‘스나이더’ 소총으로 무장하여 청국 군보다 화력도 우세하고, 훈련과 군기면에서도 우세하였다, 공성전의 결과 청군 사령관 ‘섭지초’가 항복했다. 17,000여 명의 병력으로 공격하여 180여 명이 사망한 일본군에 비해, 14,000여 명이 방어하다 2,000여 명이 사망한 청국 군의 패배였다.


안타까운 것은, 청-일이 싸우는데 영문도 모르고 참전한 조선군의 동족상잔의 모습이었다. 이는, 무능한 고종의 술수로, 청국과의 관계단절을 원하는 일본에게는 경군이 지원되었고, 병력지원을 요하는 청국 군에게는 평양성을 지키는 지방군을 지원하도록 지시한 결과였다.


이어진, 육전은 계속 이런 식이었다. 청국 본토로 진입한 요동전투에서도, 앞서 총리를 역임했으나, 전쟁으로 다시 군사령관으로 지원한 ‘야마가타 아리토모’(조슈번)의 제1군은 요동반도를 완전히 제압하였고, ‘오야마 이와오’(사쓰마번,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촌)의 제2군은 청군을 압도하고 계속 남하하여 북양함대의 본거지인 ‘웨이하이’를 점령했다. 통상 함대의 본거지 주위에는 항구를 경계하고 보호하는 많은 육군 기지가 있는데, 이를 제압한 것이다. 당연히 함대는 갇히고... 이 공로로 '오야마 이와오'는 육군 대장과 '공작' 작위에 오른다.


하지만, 전쟁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황해해전’이었다. 청군은 ‘연안 방어’와 ‘전력보존’ 전략을 취하여 수세적 입장이었지만, 일본군은 ‘북양함대’를 격파하여, 황해 제해권을 장악하려는 공세적 전략이었다. 압록강 하구에서 시작된 ‘황해해전’의 초전에서 일본은 순양함 등 10척 (4척 파손)이었고, 청군은 7,000톤급 전함을 포함한 12척 (5척 침몰, 3척 파손)이 맞붙었으나, 결과는 청군의 엄청난 손실이었다.


‘황해해전’에서 보인 청군과 일본군의 해전 전술은 사뭇 달랐다. 청군은 ‘무적함대’라는 7,000톤급 전함을 가진 ‘거함 거포’ 주의로 독일 군사고문관의 조언대로, 먼 거리에서는 사거리가 길고 위력이 큰 주포로 함포사격을 가하며, 근거리에서는 거함으로 충각전술(배를 부딪혀 상대방의 진로방해, 속도저하, 침몰 유도)을 구사하려 하였으나, 위력은 크나 사격 속도가 느린 대구경 주포를 보완할 중구경 속사포 숫자가 부족하고, 주포를 보호할 장갑 부족과, 주포 포탑 내 화약 연기 발생 시 환기불량으로 사격이 제한되는 문제점이 있었고, 실제 이로 인해 전투간에 그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반면에, 일본군은 4,300톤급 프랑스산 방호 순양함 5척 등 2,000톤~4,000톤급 속사포 위주의 전투함 위주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이들 소형함선을 적극 활용하여 단종진에 의한 속사포 사격/선회 전술 (고속정 속사, 저속정 중무장)을 구사하였다. 대형함의 거포가 배의 진행방향으로만 사격이 가능하니, 빠른 속도로 거함의 측면을 공격한다는 작전이었다. 결과는 ‘황해해전’에서 보듯 일본군의 대승이었다. 역시 해군 전술은 영국이었다.

이 전쟁에서 보인 양국 군의 리더십 차이는 확연하다. 일본 해군은 1864년부터 네덜란드 교관이 훈련시킨 학생들을 교관으로 임명하여 해군장교를 체계적으로 양성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보신전쟁’에서 많은 전투 경험을 쌓았다. 이후, 영국 해군을 본받아 군사 지휘체계, 훈련체계를 통일하였다. 이처럼, 근대식 군사편제로 재편성하자, 작전상 기습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주도권 우위를 차지할 정도로 병력의 질과 화력 우수하였다.


특히, 청일전쟁 연합함대 사령관 '이토 스케유키' 대장(사쓰마번)은 1871년 해군장교로 임관하여, 영국 해군의 포술과 항해술을 숙달하였고, ‘토고 헤이하찌로’도 해군 장교로서 영국에서 8년간 유학하였다. 이들이 지휘하는 일본함대는 기강 확립, 강도 높은 교육훈련으로, 한 때 ‘나가사키’를 방문한 북양함대의 위엄에 감탄하는 대신, 아편과 마작으로 근무시간을 때우는 청군 함정 승조원들의 흐트러진 규율과 기강을 보고 승리를 자신하였다. 아울러, 해군 발전을 염원하는 정부의 지원도 대단했다. 유신 이후 1873년 '해군 확장 10개년 계획을 세워 매년 국가 예산의 15%를 10년간 해군에 투자하여 총 86척의 함대를 구축하려 하였다.


반면에, 중국의 국방정책은 육군에 치중돼 있었다. 유사 이래 중국의 주적(主敵)은 대체로 북방의 기마 유목민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청나라가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서양 열강에게 참패한 이유 중의 하나도 육방과 육군에 치중된 국방정책 때문이었다. 청나라는 전통적인 국방정책에 따라 해방(海防)과 해군을 소홀히 했다. 그래서 근대 군함으로 무장한 서양 열강은 수월하게 바다를 제압했고 해전에서도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또한, 전쟁에 임하는 청국 조정의 인식은 스스로도 청나라가 아닌 ‘북양수사 리훙장’과 일본의 전투 정도로 판단하였다. 이는, ‘태평천국의 난’ 이후 군벌화로 북양함대는 청국의 정규군이라기보다 사병(私兵) 집단 수준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정부의 예산지원도 당연히 소극적이었다. 북양함대는 신형군함 2척을 영국에서 도입할 예정이었으나, 이 비용은 실권자 ‘서태후’의 생일 축하를 위한 '이화원' 공사용 비용으로 낭비되었다. 결국, 북양함대가 구입하려던 영국군함 2척은 일본이 구입하여 청국과의 전쟁에 투입되었다. 이처럼, 청국 정부가 국가 간 전투라는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으니, 다른 군벌 집단도 지원에 소극적이었고, 심지어 패전 이후에는 북양함대에게 자신들이 꾸어준 함선을 반환하라고 압박하였다. 같은 나라 군대라면 그럴 수 있을지?


청국 해군의 또다른 문제는 교육훈련이었다. 청국은 1871년 '양무운동'으로부터 시작하여, 1874년에 독일로부터 최신군함 도입과 독일 교관을 초빙하여, ‘북양 함대’ 등 4개 함대를 편성하였지만 언어소통 곤란으로 훈련이 어려웠다. 또한, 각 함대별로 무기체계가 다르고, 고급 지휘관들이 세습제였으니, 해군에 대한 이해와 근대적 교육이 부족하였다. 배를 모르는데 지휘관과 계급장만으로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함대가 ‘근대식’이라는 자만으로 1891년부터 교육훈련 예산마저 삭감되었고, 비근대적인 조직과 비효율적인 지휘체계로 부정부패, 전술훈련 부재와 함께 간부나 병들의 교육훈련 수준은 형편없었다. 예컨대, 당시, 북양함대 사령관 ‘정여창’은 육전 전문 지휘관이었고, 순양함 ‘제원’의 함장 등 다수 간부는 마약 중독자였다. 당시, 청군에게는 마약도 보급품의 일종이었다.


그런데, 이해하지 못할 일은 전력을 다해야 할 전쟁에서조차, 자신의 권력 기반인 해군 전함을 어떻게든 아끼려던 ‘북양수사’ ‘리훙장’이 ‘함부로 싸우다가 함선을 잃으면, 설령 일본 해군을 전멸시켜도 처벌을 면치못한다’라는 군령을 하달하여, 함대 사령관을 위축시키고, 장병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이런 ‘리훙장’의 ‘전투 투입금지’로 북양함대는 ‘전력보존을 위해’ 산둥반도의 ‘웨이하이’에 있는 본거지인 ‘류공도’로 피신하였다.


하지만, 육지에서 일본 육군이 요지를 선점하였고, 청 해군은 추격하는 일본군에 맞서지 못하도록 한 출격금지에 묶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고립된 항구에서 제한적 저항을 하다가, 12인치 거포를 갖춘 ‘아시아 최고의 무적함정’이라던 독일산 7,000톤급 철갑 순양함 2척 중, ‘정원’은 좌초 후 침몰하고, ‘진원’은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노획당하였다. 다른 함정들도 포위되어 항복하거나 나포, 침몰 등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일본은 청군 패전 후에 ‘진원’ 등 쓸만한 모든 함선을 일본 연합함대에 편입하였는데, 무적 함정 ‘진원’을 노획한 일본은, 이를 일본 국민에게 개방하여 일본 국민의 자긍심을 높이고, ‘청나라를 멸시하고 모욕하는 도구’로 한동안 사용하였다. 이 함정은 이후, 연합함대에 포함시켰으나, 1908년부터 훈련용으로, 1911년 사격용 표적으로, 그리고, 1912년 고철로 매각하였다. 우연히도, 같은 해에 ‘신해혁명’으로 멸망한 청조의 모습과 '진원'은 유사한 과정을 걸었던 셈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씁쓸한 장면은 전투지속을 위한 병참지원이었다. 청국 군은 함대 유지보수 및 관리 역량 부재로 개전 초에 탄약이 부족하였고, 이 조차도 수뇌부의 소극적 지휘로 가졌던 탄약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으며, 사격한 포탄도 대부분이 방산비리로 인하여 연습용 포탄이었거나, 불발탄, 가짜탄(콩, 석탄, 흙)이어서 일본군에게 별반 피해를 입히지 못하였다. 더구나, 군량미는 현지조달에 의존하였는데, 조선인 인부(뱃사공 등)와 우마를 동원하여, 조선의 지원을 받아야 했기에 청군의 병참 능력은 엄청 열악하였다. 그 결과, 군량이 부족하였던 청군은 양민까지 약탈하여 조선인에게 대국 군대가 아니라 백주의 강도 모습으로 보였다.


병참에 관한 한 일본군의 경우도 다를 바 없었다. 일본군의 전투물자 지원은 비교적 원활하였으나, 역시 청국 군처럼 군량미 등 일부 물자와 보급수송은 현지조달에 의존하였다. 이를 위해, 고종을 겁박하여 ‘일본 점령하 조선’으로 일본군에게 협조하라는 왕명을 하달하였지만, 일본군 병참부대는 ‘사역을 기피하고 탈주하는’ 조선인들로 인하여 인부확보와 보급수송에 곤란을 겪었다.


그러자, 일본군도 청군처럼 식량부족이 부족해져서 강압적으로 조선 민중을 수탈하였다. 또한, 일본군 병사들은 군화대신 조선의 짚신을 착용하였는데, 그해 동절기추위로 동상자가 대량 발생하였다 한다. 그 모습을 보면, 식량은 물론, 짚신조차 징발당하여 얻기 어려웠던, 조선 민중들의 겨울나기는 얼마나 어려웠을까? 싶다. 어쨌든, 한반도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으로 양쪽 군대에게 수탈당한 조선 민중은 러일전쟁 이전까지 향후 10여 년간 극심한 물자부족에 시달려야 했는데, 왕조의 무능으로 러일전쟁에 휘말리며 또다시 고초를 겪어야 했다.


전쟁 결과

1895년 3월 19일, ‘리훙장’ 등 청나라 강화사절단이 ‘간몬해협’의 시모노세키 항에 정박하고, 다음날부터 ‘시모노세키’의 복요리 전문 요리점 ‘슌판로(春帆樓)’에서 청일 강화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중차대한 국가간 회의인데 그 회의장이 왜 하필이면 복요리 집이었을까?


시모노세키는 복요리가 유명한데 거기에는 한 일화가 있다. 1592년 조선출병을 위해 대기하던 일본군들이 배가 고파 낚시하니 배가 볼록한 고기가 무더기로 잡혀 이를 끓여먹었는데 집단으로 중독사하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즉각 '저주받은 고기'라며 복어 취식을 금하였다. 이후 거의 300여 년간 복어를 먹지않았으나, 누군가가 우연히 복어의 독과 피를 제거하는 법을 알게 되었는데 마침, '이토 히로부미'가 1888년 그곳을 방문하였을 때, 내놓을 생선이 마땅치않아 그때 내어놓은 요리가 복어요리로 그뒤로 취식을 허용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슌판로'는 '이토'가 애호하는 집이었으니, '이토'는 개인적으로 '리훙장'에게 호감이 많았던 듯하다.


시모노세키 회담장 사진

일측은 수상 ‘이토 히로부미’, 외상 ‘무쓰 미네미스’였고, 청 측은 ‘리훙장’과 ‘이경방’이었다. 청나라는 우선 휴전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청하지만,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휴전에 의한 교섭 장기화를 피하기 위하여 청이 수용하기 어려운 가혹한 조건을 제시하며 휴전 제안을 사실상 거부하였다. 그 조건이 얼마나 가혹하였는지 청나라 전권대사 ‘리훙장’은 그저 “가혹, 가혹, 가혹”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한다.


'숀판로'에 있는 복어상. 시모노세키는 복어 요리가 유명하다

그런데, 3월 24일 ‘리훙장’이 ‘고야마 도요타로’라는 일본 청년으로부터 저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황한 일본은, 서구 열강이 청나라에 대한 동정 등을 이유로 대일 비판이나 간섭을 할까 두려워하여, 3월 30일 휴전조약을 먼저 체결하였다.


당시, ‘리훙장’이 피격당하자, 메이지 천황과 각료들이 급히 문병하고, 일본 최고의 의사라는 육군 군의총감 ‘사토 스스무’를 급파하여 치료와 간호를 하게 하였다. 메이지 천황이 달려와서 문병할 정도로 일본이 서구 열강을 강하게 의식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리훙장’은 바로 쾌유되었고, 이어서, 강화조약이 협의되었는데, 협의기간 내내 기습에 놀란 ‘리훙장’은 큰길을 피해 좁은 길로 다녔다. 이 좁은 길이 ‘리훙장의 길’로 지금도 안내 간판이 남아있다.

'리훙장'이 암살을 피해 다닌 좁고 기다란 ‘리훙장’ 길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이라는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시모노세키 조약

제1조 조선의 완전무결한 독립국 인정 (주권- 조공 직접수교)

제2조 요동반도, 타이완, 팽호도 할양

제3조 청국은 일본에 배상금 2.3억 량을 지불한다 (청의 3년 치, 일본의 4년반치)

제4조 중국 항조우 등 주요 항구 개항, 일본인 거주 및 무역자유


이 조약에서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제1조. 조선의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10여 년 전인 1885년에 ‘리훙장’과 체결한 ‘텐진조약’에서도 이 부분을 제1조로 넣었다. 그가 체결한 모든 조약에서 이 부분이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우연일까? 아마도, 의미심장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조약에서 합의된, 요동반도의 할양은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3국 간섭으로 무산되어 도로 청나라에 반환하였다. 하지만, 대만의 영유권은 확보하였다. (1895년 대만 총독부 신설).


승전 이후의 일본

청일전쟁을 주도한 내각의 총리는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는 아시아 최강이라는 중국에 대한 승전으로 일본의 자부심을 고양시키고, 그때까지 잔존하던 번(영주)에 대한 충성심을 일본국과 천황에게 향하도록 유도하였다. 일본은 청에 대한 경멸과, 서양에 대한 경외심 (탈아입구)으로 이 전쟁을 ‘문명 대 야만’의 전쟁이라고 불렀다. 그 의도는 ‘제국 헌법’에 명시된 대로 천황의 위상을 정립하고, 제국주의로 진화를 시도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프랑스가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며, 프랑스인이 ‘프랑스라는 국가를 자각’하여 국가에 충성하고, 중세의 농노대신 ‘시민의식’을 갖게 한 역사발전에 역행하여 구체제(앙시앙 레짐), 즉, 천황하의 황국 일본과 황국신민을 탄생시킨 것이다.


일본 예산 4년 치에 해당하는 청의 막대한 배상금 (은 2억 3천만 냥)은, 전 일본 국민이 4년 동안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 하지만, 러시아 주도의 삼국(러, 독, 불) 간섭으로 요동반도 할양 등이 무산되자, 러시아에 대한 반감으로 거국적인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자, '이토'히로부미'는 향후, 러일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로 이 배상금을 ‘야하타’ 제철소 건설 등 장차 러시아와의 전쟁을 대비한 제국주의 군비 강화에 투입하였다.

‘시모노세키’ 조약 이후 중국에 의한 동아시아 질서는 일본에 주도권을 넘기고 재편당하게 된다. 전쟁 이후, 일본은 1900년 청국의 ‘의화단’ 운동 진압 작전에 참가하는 등 서구 열강의 일원으로 진입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1902년 영국과 ‘영일동맹’ 체결, 미국과의 ‘가쓰라-테프트’ 조약 체결 등으로 동북아의 강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제, 거칠 것이 없어진 일본과 일본 국민은 ‘팽창주의’를 신봉하고, 제국주의, 군국주의로 나아가며, 대동아공영권까지 추구하게 된다.


반대로, 패전 이후의 청(중) 국 모습은 초라하다못해 비참하다. 1871년 ‘양무운동’으로 막대한 돈을 들인 무기 개량은 어느 순간 자만심을 채웠으나, 겉모습만의 군사훈련 (북양함대)으로 대충하다가 결국 실패로 귀결되었다. 더불어, 청일전쟁 패전 결과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한 청국 경제는 파탄이 났고, 패전 후의 ‘변법자강’ 운동 (캉유웨이: 부국강병 제도 개혁)을 펼쳤지만, 이미 기울어진 청의 멸망은 가속화되었다.


청일전쟁 패배의 후유증은, 무엇보다도, 중국인들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에서 밀려난 사실에 큰 충격을 받고 자신감을 잃었다. 이후부터, 이어진 서구 열강들의 청국 침탈 가속화로 중국은 깊은 잠에 빠지게 된다. 일본을 얕보다가 일격을 당한 청나라의 처지는 전쟁의 승패가 국운을 극단적으로 좌우함을 보여준다. 지금의 중국조차 여전히 ‘외세침입’에 대한 트라우마로 ‘중화굴기’, ‘체제수호’ 의지를 다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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