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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과 군국일본-⑱러일전쟁과 탈아입구(脫亞入歐)

by 김성웅

러일전쟁의 배경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요동반도의 끝자락에 위치하여 서해의 제해권과 관련된 요충지이자 천혜의 부동항인 뤼순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일본이 차지한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도로 반환하도록 일본을 압박했다. 이른바, ‘삼국간섭’이었다. 이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일본인들이 잠재적국으로 간주하던 러시아는 일본인들의 분노를 산 공적이 되었고, 수모를 당한 일본 정부는 ‘와신상담’에 들어갔다.


한편, 조선은 ‘삼국간섭’을 목도하며 러시아의 강대힘을 알고, 1896년 ‘아관파천’을 겪으며 친러파가 득세하여 친일파가 몰락하였다. 아쉬운 입장에 몰린 일본의 ‘야마가타’는 러시아에게 ‘39도선에서 조선을 분할하자’고 제안하였다. 39도선은 임진왜란 때 일본이 명에 제안하였던 대동강변 분할선과 겹친다. 그러나, 러시아는 역으로, 조선에 소요발생 시 러-일 공동출병과 충돌 방지를 위한 중립지대 설정이나 하자며 거부하였다.


1897년 독일이 칭다오 주변 ‘자오저우’만을 차지하자, 1898년 러시아는 뤼순과 다롄을 차지하여 요새를 건설하고 동청철도 부설권도 획득하였다. 1900년, 중국에서 외세를 배격하는 ‘의화단’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과 서구 열강 등 8개국이 북경을 점령하여 이를 진압하자, 러시아도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만주지역 의화단을 진압하기 위해 약 15만의 병력으로 만주에 진입하여, 일본이 반환했던 요동반도 등, 만주 전체를 차지하였다. 이처럼 러시아의 극동 진출 야심이 노골화되자, 일본과 미국 및 서구 열강은 러시아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미국은 어느 한 나라가 만주에서의 경제적 이권을 독점하는 것을 저지하는 입장이었다.

이에, 일본은 ‘만주 문호개방’을 명분으로 러시아와의 전쟁 명분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숙원이었던 대륙진출로 한반도와 만주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일본이, 러시아의 단독 지배를 저지하고 서구 열강과 이권을 분할하겠다고 밝히며, 러시아의 만주 점령으로 베이징 등 화북지방도 위험해질 것을 우려하는 영국과 미국이 도와주면 만주를 ‘러시아에게서 빼앗아 오겠다’는 대리전쟁을 시사한 것이다. 사실, 영국도 19세기말 이래 오랫동안 세계 각지에서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번번이 막아왔지만, 러시아가 너무나 먼 동아시아로 눈을 돌리자, 대체재로 일본을 주목하고 있었다.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1902년 1월, 영국과 일본이 영일동맹을 체결했다. 근세 최강국이던 영국이 일본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자, 누구와도 동맹을 거부하던 기존의 ‘명예로운 고립’(Splendid Isolation) 정책을 포기하고 극동의 신흥국인 일본과 영일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에 영국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한 단계 아래쯤으로 보는 아시아 국가와의 동맹이라니...!! 반면, 일본은 세계를 지배하는 대영제국과 자국이 군사동맹을 맺자 전국은 축제 분위기였다. ‘탈아입구’(脫亞入歐) 즉, 아시아를 떠나 서구열강의 일원이 되었다는 분위기에 전국이 들떴다.


일본에서는 '탈아입구'가 '정한론'이 제지당한 이후인 1885년에 이미 ‘...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같이하고, 조선을 대하는 법도 서양인이 그들을 대하는 것처럼 대하면 된다’라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탈아론)이 등장하였었다. '탈아입구'는 영국 등 서구 열강으로 완전한 편입을 통해 조선 등 동아시아의 패권 지분을 공유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일동맹 내용 제1조에도 앞서의 다른 조약 제1조처럼 일본은 어김없이 조선의 독립 승인을 제시하고 있다. 다만, 과거와 달리, 일본이 조선에 특수한 이익을 갖고 있음을 추가로 명시하였다.


영일동맹의 결과, 영국은 러일전쟁 기간 동안 일본의 국채를 매입하는 등 전비를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전함 ‘미카사’를 비롯한 최신예 영국제 군함을 일본이 발주하면 빠르게 수령하도록 허용했다. 당시에는 군함 제작국이 보유한 함선보다 더 좋은 군함을 타국이 구매하게 되면 당장 제작국의 해군이 이를 거부하는데, 영국 정부 주도로 이런 방해가 전혀 없었으며 바가지도 씌우지 않았다.


이런 도움에 힘입어서 일본은 러일전쟁(1904~1905년)을 시작하였다. 특히, 전쟁 직전 만주 진출의 길목에 위치한 대한제국에서 안정적인 보급품과 보급로 확보를 위해서, 1904년 2월 일본외상 ‘고노’는 고종에게 조선 내 일본군의 작전과 주둔을 허용하도록 한 ‘한일의정서’를 강요했고, 이를 근거로 조선 내정에 적극 간섭하였다. 이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1905년 ‘을사늑약’과 함께 한반도 지배의 정당성에 이용되었다.


러일전쟁을 이기기 위한 일본 국민의 거국적인 행보를 보면, 1885년부터 1901년까지 각각 2차례 4차례 총리를 지낸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이토 히로부미’의 노력도 돋보인다. 둘 다 조슈번 출신으로 ‘요시다 쇼인’의 문하생이었지만, 개인적인 정적관계였다. 하지만, ‘일본 육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야마가타’는 대본영 총사령관으로 군사전략 수립과 작전지휘로 군사분야에서, ‘이토’는 일본의 외교 정책을 통해 국제 여론을 일본에 유리하게 이끌고, 전쟁이 끝난 후, ‘포츠머스’ 조약의 협상에 참여하는 등 외교분야에서 전쟁을 지원하였다.


참고로, 러일전쟁 당시의 일본 총리 ‘가쓰라 타로’ 역시 조슈번 출신이고, 그는 대본영 본부의 ‘야마가타’ 전 총리 계열이었으나, 육전 지휘관 ‘오야마 이와오’와 해전 지휘관 ‘도고 헤이하찌로’가 사쓰마 출신이어서 두 정치 세력 간의 균형도 어느 정도 이루어진 듯하다.



뤼순 공방전

러일전쟁 발발 후, 뤼순항이 포위되기까지 6개월 동안 러시아 제7사단 사단장 ‘콘드라첸코’ 소장의 창의적인 공병 작업으로 본격적인 방어 진지구축에 들어가, 단 수개월 만의 요새 보강작업이 그 이전 몇 년에 걸친 것보다도 더 많았다고 할 정도로 단 시간 내에 미완의 부실한 요새에서 장기간 포위에도 견딜 수 있는 강력한 요새로 변모하였다. 공방전 당시 ‘콘드라첸코’ 소장은 뤼순 방어의 중심인물로 항전론자여서, 러시아 극동군 사령관 ‘스테셀’ 중장과 지휘권 분열만 없었다면 요새 방어에 성공하였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공방전이 이어지던 11월 초에, 일본군 대본영은 러시아 발트함대(제2 태평양함대)가 인도양에 도착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는 육군을 지휘하는 ‘오야마 이와오’(大山 巌) 원수와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 해군 대장에게 큰 위기감을 주어, 최대한 빨리 뤼순항을 함락하여 제1 태평양함대 주력을 제거하고, 연합함대의 함선을 수리하여 러시아 발트함대(제2 태평양함대)와 일전을 벌여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였다.


하지만, 일본 해군 혼자만으로는 뤼순항의 함락 또는 무력화가 불가능하다는 게 확인되자, 일본 육군은 뤼순항 공략을 위해 ‘노기 마레스케’ 대장이 지휘하는 제3군을 편성하여, 해군의 요청(7월 12일)을 받자 즉시 뤼순 공략에 착수하였다. 이는 곧 제3군으로 하여금 총공세를 벌여 뤼순을 함락하라는 독촉이었다. 이에 따라, 제3군은 5개월간 강력한 보병과 포병 공격으로 무려 4차례에 걸친 총공세를 펼쳤지만 피해만 입고 러시아의 저항을 뚫지 못했다.


그런데, 12월 15일, 일본군이 뤼순 외곽의 러시아군의 지하갱도 참호에 유독가스를 주입하며 공격하자, 방어전의 지휘관이었던 ‘콘드라첸코’ 소장이 해당 보루로 직접 가서 정황을 확인하고, 귀환하던 도중에 일본군의 포격으로 전사하였다. 러시아 요새 수비대의 총지휘관이 사망하자, 러시아군의 방어 의지는 크게 꺾이었다.


이 같은 지휘관의 전사는 러시아군의 불운이었다. 불과 몇 개월 전에도, 뤼순 공략에 나선 일본 해군을 효과적으로 물리쳤던 러시아 해군 지휘관 ‘마카로프’ 제독도 그가 탑승한 기함에 기뢰에 피격, 격침되어 전사하였다. 이후, 황해바다 제해권은 일본으로 넘어갔고, 뤼순항은 ‘독 안에 든 쥐’처럼 일본 함정과 기뢰로 봉쇄되었다.

그런데, 더 불운한 것은 ‘콘드라첸코’ 소장의 후임으로 ‘알렉산드르 포크’ 소장이 임명되었다. 그는 이미 여러 전투에서 무능함을 보여, 부하들의 신뢰를 잃은 인물로, 이후 러시아군은 일본군의 요새 공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밀려나다 항복을 하게 되었다. 1905년 1월 1일, ‘포크’의 러시아군 지휘부는 주방어선 중 가장 강력하고, 가장 오랫동안 버텼던 동쪽 방면의 주방어선을 포기하고 일본군과 항복 협상을 하였다. 아직 전의를 잃지 않았던 잔존 수비대원들의 반발에도, 1월 2일 오후 7시, 러, 일 양측은 뤼순항의 항복문서에 서명하였고, 공식적인 항복은 1월 4일에 이루어졌다. 전투는 지휘관의 전투의지와 신념의 결정물이다.


뤼순과 러시아 제1 태평양함대는 그 전략적 가치로 인해 일본은 수많은 희생이 있더라도 반드시 손에 넣어야 했다. 그 때문에 모처럼 육, 해군 합동작전을 펴면서 뤼순항 공략에 온 힘을 쏟았고, 비록 5만 8천여 명의 사상자(전사 1만 4천)가 발생하였지만,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여, 향후 전쟁을 유리한 국면으로 이끌게 된다. 뤼순항 함락 후 재정비를 마친 제3군은 봉천지역의 일본군과 합류하여, 봉천 전투의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뤼순요새의 콘크리트 진지를 파괴한 280미리 대구경포. 사탄산포가 적어 점표적 타격가능(출처: 오마이뉴스, 203 고지)

일본군이 뤼순항 공략에서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은 것은, 전쟁 조기 종식을 기대하는 천황 등 상급자들의 독촉에 시달린 나머지, ‘뤼순을 빨리 점령해야 한다’라는 강박관념에 따라 강력하게 무장된 요새에 ‘닥치고 돌격’ 정신으로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요새화된 진지의 방어력을 지나치게 경시하기도 했지만, 콘크리트화된 러시아군의 요새는 튼튼함의 수준이 여타 요새와 달랐다. 나중에야, 해군 함포로 사용되던 280미리 대구경포를 산위로 끌어올려 콘크리트 요새를 조준하여 하나하나 박살내었다.


이처럼, 천신만고 끝에 얻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내부에서 피해가 너무 컸다는 비판에 제3군 지휘부는 책임론에 시달렸다. 특히, 조슈출신 ‘노기 마레스케’ 제3군 사령관은 무능하다는 비난을 받았고, 자신의 두 아들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기에 큰 심적 고통을 받았다. 그는, 메이지 천황에게 “자결하겠다”라고 청원했으나, “절대 안 된다”는 반려에 무산되고, 7년 뒤인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죽자 그때서야 부부가 함께 자결하였다.



봉천전투

일본은 ‘뤼순 공방전’에서 승리하고 여타 여러 전투에서도 승전했으나, 전쟁을 계속할수록 물자부족과 전력고갈에 시달렸다. 특히, 인적, 물적 자원의 소모가 극심한 근대식 대규모 회전을 치러본 경험이 없어 몇 차례의 전투 후에, 그간 벌인 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피해 규모에 경악했다. 결과적으로, 객관적인 국력의 현저한 열세로 인해 일본의 국력으로는 그 이상 전쟁을 끌어가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이에 일본은 조기 강화를 위한 외교 노력과 동시에 군사적 승리를 함께 노렸는데, 그 지점이 바로 봉천이었다. 그러나 러시아군이 비록 ‘뤼순 공방전’에서 항복했다 하나 여전히 강대하였고, 러시아 정부는 “극동으로 향하고 있는 '발트함대'(제2 태평양 함대)와 봉천의 러시아군이 있는 한 강화는 없다”는 의지를 표방하고 있었다.


이에 러시아를 강화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큰 승리가 필요하다’고 여긴 일본은 먼저, 미국에서 발행한 국채 기금으로, 국내에서 3개 사단을 신설하고, 포탄 및 야포의 증강, 외국에서 새로운 전함 구입 등 그간의 전투로 소모된 전력을 다시 복구하였다. 그리고, 뤼순항을 함락시킨 ‘노기’의 제3군을 봉천으로 합류시키며, 조선 주둔 일본군에서 '압록강군'을 편성해 봉천으로 보내는 등 봉천 공격에 총력을 집중시켰다.


한편, 방어하는 러시아군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특히, 보급선의 문제로 상황이 나빴다. 이는 유일한 보급로인 시베리아 철도가 단선이고 여기저기 미개통구간이 많아 서부에서 오는 지원속도가 상당히 느렸다. 이 중에서 바이칼호 근처 노선은 사정이 더욱 나빴다. 뿐만 아니라, 철도는 경계병력이 별도로 요구되었고, 단선이라 수송력은 제한되고, 화물을 싣고 온 화차도 못 돌려보내 유럽-러시아에서는 화차가 부족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러시아군에는 다른 문제가 있었다. 거듭된 패전과 1월 22일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 그리고 연이은 1차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병사들의 사기 저하가 바로 그것이다. 군인들의 사기저하에도 불구하고, ‘차르’ 정부는 오히려 러시아 혁명으로 들끓는 민중들의 분노를 승전을 통해 가라앉히고자 전면공세를 종용해 댔다.

이 시기의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의 영향으로 ‘공격이 방어보다 낫다’는 생각이 주류여서, 정부의 독촉도 있고 하니 공세로 나서자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총사령관 ‘쿠로팟킨’은 처음부터 전면공세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는 이제까지의 전투에서 확인된 러시아 극동군의 약점, 그리고 이전의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경험을 통해 방어선이 구축된 곳에 정면으로 들이받으면 피해만 커질 뿐 얻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으며, 병력의 숫자는 러시아군이 더 많았지만 양군의 대치 전선 길이는 비슷하기 때문에 공세를 취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동계기간으로 자연히 휴전한 기간에 전력증강이 지지부진했던 러시아군에 비해, 일본군은 ‘뤼순항 공략’이 끝난 제3군을 합류시키고 지원병력의 충원으로 전력을 증강하여, 양군의 전력이 거의 비슷한 상태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곧 일본군의 공세가 있을 것이며, 러시아군이 공세를 취하는 것보다는 이러한 ‘일본군의 공세를 막아내면서 소모전의 형태로 끌고 가 일본군의 피해를 가중시켜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쿠로팟킨’이 의도한 '영토를 주되 시간을 끌며 일본군을 내륙 깊숙이 유인해서 섬멸하자'는 전략에 따라 장기전을 편 러시아군은 매 전투마다 조금 불리해진다 싶으면 주저 없이 철수해 버렸다.


러시아가 이렇게 나오자, 다급해진 건 일본군 총사령부였다. 전쟁을 질질 끄는 동안 경제적 압박이 심해지고 있었고, 여론도 일본군의 무능한 지휘력을 문제 삼았다. 이 때문에, 일본군 수뇌부는 정부보다 훨씬 더 절박한 상태로, ‘봉천지역에서 러시아군을 완전히 섬멸하지 않으면 전쟁에서 진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총사령관 ‘오야마 이와오’(大山嚴) 원수는, 만주의 일본군과 충원병력으로 날씨가 풀리면 최단기간에 회전을 벌여 어떻게든 러시아군 주력을 포위섬멸하려 하였고, 최종적인 결전을 벌일 시기로는 2월 말~3월 사이가 적합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는 그 이전 시기엔 영하 30도의 날씨가 몰아쳐 장거리 행군은 막대한 비전투손실을 초래할 것이고, 4월이 넘어가면 장기전이 되고 땅이 진창으로 변해 제대로 된 작전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봉천전투 참호전.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 원형이 되었다.(위키백과)

드디어, 1905년 2월 20일, 일본군은 봉천 전투를 개시하였다. "이 회전에서 승리한 쪽이 전후의 주인이 될, 러일전쟁의 ‘세키가하라’다"라는 훈시로 봉천전투에 대한 일본군 수뇌부의 절박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봉천 전투는 러시아 극동군을 격파하기 위해, 일본이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치러낸 일전이었으며, 병력이 열세하였지만, 우세한 러시아군을 상대로 대담한 우회기동으로 포위를 실현하여, 러시아군의 배후를 위협하여 대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포위망을 닫지 못해 러시아군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1905년 3월 10일, 일본군은 주력이 거의 다 빠져나가 약해진 러시아군 후미의 방어선을 뚫고 봉천역에 진입해 잔존 러시아군을 포로로 잡았다. (약 1개 여단 내외) 그러나 러시아군의 주력부대는 이미 철령으로 철수를 완료한 상태였다. 이는 일본군 총사령부의 계획 미비와 지휘의 부족, 병사와 야포, 탄약의 전체적인 부족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러시아군을 압도적으로 괴멸시키지 못하면서 또다시 큰 전투를 염두에 두어야 했다.


야전군 총사령관인 ‘오야마 이와오’, 총참모장인 ‘고다마 겐타로’는 둘 다 메이지 유신 때부터 군부에서 활약했던 유신의 원로로서, 근대 군사학에 대한 경험은 거의 없어, 근대적인 군인이라기보단 차라리 정치가에 가까웠다. 이들의 군 지휘경험은 보신전쟁, 세이난 전쟁, 청일전쟁에서, 잘해야 수 천 ~ 수 만 단위였던 전투였다. 하지만, 러일 양국이 전력을 기울인 러일전쟁은, 일본군 25만, 러시아군 31만 등 양군 도합 60만에 육박하는 근세 최대규모의 전투였기에, 과거의 경험에 사로잡힌 그들의 군사적 감각은 여러모로 뒤떨어졌다.


이 때문에, 일본군 야전군 총사령부는 결과적으로 승리하였지만, 러시아군 9만(포로 2만 포함), 일본군 7만 5천이라는 사상자 숫자에서 보듯, 이는 일방적인 승리가 아니라 전투의 승자답지 않게 그리 좋지 못한 결과로 평가받았다.



쓰시마 해전

1904년 2월에 일본의 선전포고로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발트해’의 ‘샹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출항한 러시아 발트함대는 기나긴 극동 원정길에 나섰으나, 영국의 방해가 집요했다. 보호국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 통과를 거부하여 아프리카 대륙을 빙 둘러 ‘희망봉’을 거쳐 인도양으로 진입해야 했다. 문제는, 인도나 싱가포르 등 수많은 영국 식민지나 보호국들도 약간의 식량과 물 이외에 ‘장기간 항해에 필수적인’ 야채보급은 물론 석탄공급도 거부하였다. 무려 15개월 간의 긴 2만 9천 Km의 긴 항해에도 야채를 섭취하지 못한 수병들은 각기병에 시달렸고, 기진맥진하여 적도선을 통과하여 ‘쓰시마 해협’에 도달하였으나, ‘도고 헤이하치로’의 일본 해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은 동맹국인 영국으로부터 러시아 발트함대의 이동 첩보를 수시로 제공받았다.


온갖 난관에도 뤼순을 목표로 달리며 뤼순을 거점으로 재정비하여, 황해의 제해권을 노리려던 희망을 가졌던 러시아 발트함대(제2 태평양함대)의 운명은 뤼순 함락으로 어두워졌다. 이제, 러시아 발트함대(제2 태평양함대)는 장기간의 항해 후에 필요한 재정비를 위해서 갈 데라고는 ‘블라디보스토크’밖에 없었다. 이는 곧 ‘쓰시마’ 해협(대한 해협), ‘쓰가루’ 해협(혼슈와 홋카이도 사이), ‘소오야’ 해협(홋카이도와 사할린 사이) 3곳 중 1곳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항해 루트 모두가 뤼순항 함락 후 재정비가 끝난 일본 연합함대에게 포착될 가능성이 높았다. 러시아는 가장 단거리인 ‘쓰시마’ 해협을 택하였다가 참패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전쟁 이전인, 1902년 1월, 일본은 영국과 ‘동맹국 중 한 국가가 전쟁하면 중립유지 혹은 원조한다’라는 영일동맹인 군사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영국으로부터 1만 5천 톤 급 전함 ‘미카사’와 최신식 전함 6척, 장갑함 4척을 구입하여 상당한 전력을 보강하였으나, 여전히 러시아 발트함대(제2 태평양함대)에 비하면 열세였다.


쓰시마 해전 시 연합함대의 기함, 1만 5천 톤 '전함 미카사'

1905년 5월 27일, 대략적인 러시아 함대의 진출로를 알고 기다리던 ‘도고 헤이하치로’의 연합함대는 어둠 속에 ‘쓰시마’ 해협을 통과하던 러시아 발트함대(제2 태평양함대)를 포착했다. 러시아 해군의 모든 전투함은 일체 불빛이 드러나지 않도록 '등화관'제를 하며 조심스럽게 이동하였는데, 맨 뒤에 처진 병원선이 등화관제에 소홀했다. 캄캄한 현해탄의 밤하늘에서 용케도 불빛을 탐지한, 일본 해군은 전력을 기울여, 세계 일주를 하다시피 한 긴 항해 끝에 기진맥진한 러시아 함대를 기습으로 맞이했다.


1274년 일본 정벌을 한다던 여몽연합군을 '쓰시마' 해협에서 몰살시킨 일본 '신의 바람(카미카제)'이 다시 불은 것일까? 양측 간 치열한 포격전이 전개되자, 일본 함대의 기함 ‘미카사’가 러시아 함대로부터 23발의 포탄을 얻어맞았고 소형 어뢰정 3척이 침몰하는 등 피해를 입었지만, 일본은 발트함대의 전함 등 27척을 격침하고, 6척을 나포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한 엄청난 압승을 거두었다. 당시 '도고'가 "황국의 흥망은 이 일전에 달려있다. 각 인원은 한층 더 분발 노력하라"는 훈시는 명언이 되었고, '도고'는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눈부신 일본의 승리의 또 다른 이유는 포탄 개량에 있었다. 거함 거포주의에 몰입한 서구 열강이 전함의 장갑을 관통하는 포탄 개량에 중점을 둔 것과 달리, 포탄의 폭발력과 화재를 일으키는 ‘시모세’라는 포탄을 개발하여, 이 포탄은 군함에 덧칠된 ‘부식 방지용’ 페인트를 쉽게 화염에 휩싸이게 하여 적함을 매우 효과적으로 무력화시켰다. 일본이 지금껏 해온 것을 답습하기보다 더 나은 것을 추구하였던 결과였다.



전쟁이 미친 영향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뤼순을 점령하고 봉천을 격퇴시키며 발트 함대를 전멸시킴으로써 승리하자, 러시아군은 비록 스스로 봉천 전투에서 물러난 것도 전투의 패배로 인식하였고 ‘쓰시마’ 해전 이후로 독선적인 니콜라이 2세조차 전쟁에서 패하였음을 시인하고 미국 중재하의 종전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미국이 중재한 러일전쟁 종전협정에서 ‘인명 피해는 일본 측이 더 컸다’라며 패자로서의 배상금 지불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당시 러시아가 전쟁 수행 의지를 상실하고 휴전협정에 나선 것은, 연전연패로 인한 사기 하락과 전략의 미흡함으로 인해 보급이나 병력의 보충 등 물자부족으로 인한 전쟁 수행 능력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일본도 유사한 상황이었지만, 러시아는 일본군의 상황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였다. 일본군은 신속한 철도개설과 여러 갈래의 보급선 확보 등 보급에 최선을 다했지만, 기본적인 국력 부족으로 인해 보급이 한계에 달했으며, 그 결과 식량 공급도 부족했고 방한복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서 일본군은 만주의 추위에 떨며 주먹밥으로 연명하느라 각기병에 시달리는 등 전쟁 지속이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그런데, '러시아가 먼저 손을 내밀었고', '일본이 이를 잡아주고' 러시아가 순순히 물러났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축제분위기였다. 이 전쟁은 청일전쟁 못지않게 일본인들의 애국심을 고양하여 천황의 영도아래 일본을 하나의 국가로 더욱 결속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 중에 일본의 언론 기관들은 ‘애국심을 고취하는’ 삽화를 매 전투마다 수백 장, 수천 장 출판하여 도시들과 마을들의 중심가에 걸고 모든 국민들에게 일본군이 얼마나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는지를 상세히 보여주고 홍보하였다.


아시아의 소국인 일본이 서구의 열강인 러시아에 승리하면서 일본은 다른 열강들로부터 그들과 동등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고, 한반도에 대한 실질적인 종주권도 인정받았다. 이에, 기세가 등등해진 일본은 '비유럽 국가가 자국의 군사력으로 유럽 주류 강대국에 거둔 첫 승리'라는 '선전용' 구호를 내세웠다. 이는, '대동아 공영권'으로 이어진다. '우리 일본이 아시아의 대표로 서양에 이겼으니, 아시아 국가들도 일본을 도와서 제국주의 침략 세력과 함께 싸워야 한다'는 논리였기에, 서구열강의 식민지배에 신음하던 아시아 각국의 독립운동가들은 나중에 일본이 제국주의 본색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일본의 이런 사상에 동조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승전에도 실익 이없었다. 이 전쟁에서 국가 경제가 거덜 날 정도로 막대한 군비와 사상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포츠머스 조약에는 일본에 대한 러시아의 배상금 지불 의무가 명시되지 않아 배상금도 없었다. 영토라고 할양받은 남사할린도 당시로서 큰 가치가 없는 곳이었다. 일본 국민들은 청일전쟁에서 보듯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당연히 배상금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고 또 당연히 받아내야 한다'라고 믿었다.


이것은 유럽과 아시아의 전쟁에 대한 '문화차이'때문이다. 유럽의 전쟁은 일종의 정치 행위로, 원하는 전쟁 목적만 달성한다면 굳이 상대를 무릎 꿇여 내 밑으로 숙이고 들어오게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보듯, 아시아에서 전쟁은 서로의 서열과 상하관계를 확실히 결정하는 수단이므로, 패자는 무조건 승자의 밑으로 수그리고 들어가서 승자를 상전으로 모시고 승자가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들어줘야 하는 의식이 강하였다.


특히, 전국시대 무사들의 싸움을 지켜본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승자이니만큼 마땅히 패자에게 배상금을 청구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으나 현실적으로는 그게 불가능하자,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부조리한 대우를 받고 있다 판단하여 분노가 폭발, 이로 인해 일본 전역에서 폭동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이 전쟁에서 얻어낸 가장 큰 성과는 세계 강대국의 일원으로 인정되어, 이후 일본은 동아시아의 최강자이자 조정자라고 불릴 만한 위신을 얻게 된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를 물리친 자긍심과 함께 대한제국을 속국으로 만든 다음 최종적으로 합병하였으며, 요동 등 남만주도 사실상 영향권 내에 편입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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