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명가도’를 요구하며 조선 정벌에 나선 지 25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잠잠하던 일본이 1854년 조슈 번주 ‘모리 다카치카’가 후원한 ‘요시다 쇼인’의 ‘팽창주의적 대 일본주의’에 강한 영향을 받은, ‘쇼인’의 문하생들과, 사쓰마 번주 ‘나이아키라’가 발탁한 사쓰마의 인사들은, ‘삿쵸동맹’을 결성하여,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 유신 시대’의 주요 인사가 되었다. 이들은 비록 출신 지역이 달랐으나, 일본의 근대화와 제국주의를 지향하는 50여 년 동안에도 하나같이 ‘정한론’에 빠져 있었다.
특히, 이들 중 유신의 3 걸로 유신 신정부를 이끌어 간, ‘기도 다카요시’(조슈)는, 1869년 “조선을 정벌하면 일본의 국위가 세계에 떨치고, 민심은 국외로 향한다”라고 ‘정한론’을 적극 주장하기도 했으나, 정적으로 유신 3 걸 중 1인인 ‘사이고 다카모리’(사쓰마)가 1874년 무력에 의한 강성 정한론 (군사적 야망)을 주장하자, ‘사이고’의 친구로 역시 유신 3 걸 중 1인인 ‘오쿠보 도시미치’(사쓰마)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 (조슈)등의 도움으로 ‘정한론’에는 이의가 없지만, 내치완성 이후의 점진적 정한론을 주장하여 ‘사이고’의 제의를 무산시켰다.
1884년 조선의 ‘갑신정변’ 실패 이후 일본의 조선 진출이 무산되고, 무능한 조선왕조가 개화파에 대한 가혹한 보복을 가하자, ‘자유계몽주의적 정한론’을 내세웠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은 미개하니 일본이 이끌어야 하며, 무력 사용으로라도 진보를 돕자’라 하였고, 또한 ‘일본은 영국 등 서구 열강으로 완전 편입하여 동아시아 패권 지분을 공유하여야 한다’는 ‘탈아입구’ 론으로 차라리 조선과 청을 침략하자고 주장 하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갑신정변을 ‘김옥균’ 등 조선 내부 일부 친일 인사에 의한 일본의 조선침략 일환으로 보기도 하지만, 당시 일부 친일 조선인들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자유주의자적 정한론에 취해 조선왕조 멸망을 당연시하고, 일본의 침략을 '선한 해방자의 호의'로 이해하기도 했다.
이런 일부 조선인의 낙관적 관점과 달리, ‘후쿠자와 유키치’ 이후에, 입헌군주제의 총리대신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청일전쟁)로부터,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타로’(러일전쟁), ‘데라우찌 마사다케’(초대 조선총독)에 이르기까지 조슈번 출신 일본 정계의 실세 모두가, 외세로부터 ‘일본의 국방상 안전’을 이유로 ‘한반도 정벌’에는 공통된 생각을 가졌다. 다만, 시기와 방법 등의 이견으로 서로 간에 대립되는 모습을 보이긴 했다.
일본은 청일전쟁 발발 직전, 1894년 무력으로 경복궁을 급습하여 ‘고종을 유폐’시킨후 조선의 전 행정기관에 고종의 명이라며 자신들의 전쟁준비에 필요한 조치들을 발하였다.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 점령하의 조선’이 된 것이다. 하지만, 전쟁 이후, 자신들이 감히 대응하기 어려웠던 러시아의 영향으로 일본의 한반도 정복이 자꾸 제동이 걸리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은 영국 등 구미 각국을 등에 업고 특히,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아온 영국과 영일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러시아와 전쟁을 치를 명분을 쌓기 시작했다.
1904년 1월, 10년 전 청일전쟁 직전 왕궁을 점령하여 ‘일본 점령하의 조선’을 만들었듯이, 이번에도 아주 쉽게 똑같은 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2월 8일, 일본은 뤼순의 러시아 극동함대를 기습공격하고는 선전포고를 했다. 러시아는 8일이나 지나서야 선전포고를 했는데, 이후 1년 반 동안 한반도 주변 해역과 만주에서 벌어진 러일전쟁은 그 규모가 청일 전쟁의 10배가 넘었다. 제국주의 패권싸움으로는 러시아 ‘크림반도 전쟁’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러일전쟁은 기본적으로 영국과 러시아가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을 다투는 전쟁에서 일본이 영국을 대신하였다. 그 결과, 영국 등 해양세력은 자신들을 대신한 일본에게 한반도를 승전의 대가로 지불했다.
1905년 9월, 러일전쟁 종전으로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에서 러시아는 일본에게 패배하여 ‘일본이 조선에서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탁월한 이익을 갖는 것’을 인정하였다. 10여 년 전인 1895년 청일전쟁 종료로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완전무결한 자주독립의 나라’라던 조선은 일본의 ‘탁월한 이익’ 대상으로 전락했다. 한반도의 운명은 일본의 손아귀에 놓였다.
그런데, 이제 조선을 자신들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조선 문제에 대해 온건파인 ‘이토’와 강경파인 ‘야마가타’의 의견이 갈렸다. 이들은 조슈의 '하기' 출신 고향 선후배로서, 하급 무사의 자제로서 또, ‘요시다 쇼인’의 문하생으로서 같이 수학하고, 막부 타도에 같이 헌신하였다. 둘 다, 유신 정부에서외무경, 내무경 등의 주요 각료를 거치며, ‘이토’는 1885년 초대 입헌군주제 총리로, ‘야마가타’는 1890년 제국의회가 성립된 이후 첫 총리로, 각각 총리를 4회, 2회 번갈아 가며 역임하였다. 정치가와 군인으로서 서로의 성장은 달랐지만, 내정과 군사 부문에서 서로 좋은 상담역으로 협력하여 왔던 사이였다.
‘야마가타’는 ‘주권선과 이익선’ 개념을 내세우며, ‘조선 병합’을 주장하였으나, ‘이토’가 천황의 신임을 더 받은 것 같다. 1905년 11월, 특명대사로 임명된 ‘이토’는 마치 속국의 왕에게 대하듯 ‘특명대사의 지휘를 따르라!’라는 천황의 국서를 고종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이토’는 외부대신 박제순 등 친일파 ‘을사5적’의 서명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이른바, 을사(보호) 조약이다. 우리는 ‘을사늑약’이라지만, 일본이 '보호조약'이라는 데는 외교권을 상실한 조선을 열강의 간섭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고립시키려는 뜻이다.
1906년 2월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토’가 초대 통감이 되었다. 조선 왕은 있으나마나였다. 대한제국의 접수 공작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빌미로 ‘이토’는 즉각 고종을 퇴위시켰다. ‘이토’의 눈에는 백성들은 거지꼴로 헐벗고 굶주리는데 자신의 영달만 추구한 고종은 무력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군주였을 것이다. ‘이토’는, 일본인 차관들이 모든 실무를 지휘하는 ‘차관정치’로 군대를 해산하는 대신 경찰권을 위임받았다. 그런데, 조선의 잠재력을 인정한 ‘이토’는 조선을 병합하는 것보다, 후견인 노릇만 하여 조선을 최대한 지원하여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일본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듯하다.
‘이토’가 시행했던 몇 가지 개혁을 보면 이런 추론도 가능할 듯하다. 그는 조선의 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 건설을 지원하고, 한글 교육, 보급과 학교설립, 의료지원을 강화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 경제를 엔화 통화권으로 통화권으로 통합하여 물가 안정에 기여하였다. 특히, 공용어를 한자에서 한글로 바꾼 것은 부정부패가 만연하는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한자를 좀 안다는 관료와 양반들의 횡포를 막자는 뜻이었다고 한다. 의료지원은 일본 의사들을 데려다 조선인 치료사업에 동원하였다는 것인데.., '이토'의 조선 근대화 지원이 일본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조선인의 환심을 사려는 일종의 조선인 유화책이었는지? 에는 여전히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토’가 청일전쟁 당시 총리였을 때 외상이던 ‘무쓰 미네무쓰’ 등 심복과 젊은 합병파들이 ‘조선의 근대화’는 불기능 하다며 ‘이토’의 정책에 반대하자, 합병파가 점차 늘어나면서 '이토'는, '조선 통감'에서 밀려났다. ‘이토’는 1874년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에 반대하며, 내치완성 이후의 점진적 정한론에 충실하자는 입장이었으나, 1906년 '조선 통감'으로 부임하며 식민지화 작업에 착수하며 1909년 10월 죽기 전까지 일제의 조선 침략을 사실상 완성하였다. 통감 퇴임 4개월 후인 1909년 10월,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친 안중근 의사에게 피격당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암살로 민족운동은 고조되었으나, 조선 병합은 앞당겨졌다.
‘이토’ 사망 이후, 조선은 '야마가타'의 등장으로 한층 더 험한 파도에 휩쓸리게 된다. 일본 최고의 원로로서 군과 정계에 영향력을 발휘하던 ‘야마가타’는, 과거 서구열강의 서세동점과 러시아의 영토팽창 야욕에 불안해진 일본이 청국과 러시아의 위기관리를 위해, 조선을 다루는 방식에서 비롯된 ‘주권선 (일본의 국경선)과 이익선 (일본의 이익과 관계되는 경계선)’ 논리에 따라, 반도인 지정학적인 특성으로 인하여 ‘이익선’에 해당하는 조선 침략을 정당화한다.
이후, ‘야마가타’는 침략과 전쟁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는 일황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과 국가주의 강요하며, 일본을 군국주의의 길로 출발시킨 장본인이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이래 일본의 염원인 ‘조선 병탄’이 1910년 8월에 이루어져 42년 만에 ‘메이지 유신’이 완성되었다. 1910년 8월 29일, 조선을 병합한 일본은 '야마가타' 파벌로 조슈번 출신의 ‘데라우찌 마사다케’ 육군 대장을 초대 조선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런데, 그는 군부를 민간통제에서 벗어나게 한 ‘야마가타’ 총리시절의 훈령에 따라, 일본 총리의 감독과 통제를 받지 않는 군인이어서 헌병을 동원한 가혹한 '무단(武斷) 통치'로 조선 민중을 핍박하였다.
1916년, 제2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하세가와 요시미치'도 역시 육군 대장이었는데 조슈번 하급무사 출신으로 '야마가타'파벌이었다. 전임자 '데라우찌'가 하던대로 무단 통치를 하다가, 조선의 3.1 독립운동으로 교체되었다. 조슈번 출신으로 '야마가타'파벌에 속하여 승승장구하였던 군인들은 하나같이 강성 군인들이었다.
이처럼, 메이지 유신 이후 ~ 제1차 세계대전 종료 시 (1868-1918)까지 약 50여 년 간 군부의 주요 인사들은 수많은 번(현) 중에서도 조슈, 사쓰마 두 번의 출신이 유독 많았다. 청일, 러일 전쟁 등 다수의 전쟁에서 활약하였던, 일본 육군과 해군의 원수급을 보면, 모두 15명 중에 사쓰마 8, 조슈 3, 왕족 3, 기타 1명으로서, 특히 해군은 사쓰마번이 장악하였고, 육군은 조슈번의 '야마가타' 파벌이 주요 지위를 장악하였다.
고급 장성들이 이들 두 번에서 많이 배출된 주요 이유는 '메이지 유신'의 성공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사쓰마 번, 조슈 번 정치인, 군인들이 메이지 이후 장기간에 걸쳐 번갈아 일본 정계를 지배하는 동안 파벌을 형성하여, 소위, 출신 지역의 유명인사들이 자신의 출신지나 출신 학교 후배들을 배려한 영향이 컸을 것이다.
특히, 사쓰마 출신들은 '사이고'와 '오쿠보'의 출생지인 1평방 킬로미터 남짓한 '가지야초'라는 작은 마을 출신이 많은데, '사이고'의 친동생인 '쓰네구미' 대장이나 '오야마' 원수처럼 집안사람이나, 동네사람 중에 '러일전쟁'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 대장 등응 '사이고'가 추천한 사람들이었다. 반면, 조슈에서는 '하기시' 출신이 매우 많았다. '이토'나 '야마가타'의 영향일 것이다. 심지어, 러일전쟁 간 '가쓰라' 총리마저 이들의 계열이었다. 이처럼, 구 일본군은 군내에서 출신지에 따라 무슨 무슨 계파라는 사조직이 오랫동안 있었다. 다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접어들 무렵부터는 구 일본 육사, 구 동경제국대학 출신들이 몇 기, 몇 기를 앞세우며 뭉쳤지만...
군인들이 출신과 학교 기수를 따졌다면, 귀족들은 가문을 따졌다. 메이지 유신으로 1869년에 조정의 공경대신과 번주 등에게는 제후의 칭호를 폐지하고, 유럽식 귀족처럼 ‘화족’ 제도를 도입하여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등 세습되는 5개의 작위를 부여하였다. 이 중 최고 작위인 '공작' 가문은 일본 전체에서 모두 18개 가문이 있는데, 귀족으로는 황실가문 5, 도쿠가와 쇼군가문 2,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 조슈의 '모리' 가문, 근대화 사절단을 이끌었던 '이와쿠라 도모미' 가문 등 황족이나 주요 번주 출신으로 쟁쟁한 10대 가문이었다.
그런데, 이들 10대 귀족 가문과 나란히 선정된 ‘4대 공작’가문에는 군 출신들이 있었다. 이들은, 조슈 출신의 ‘이토 히로부미’(총리 4회, 조선통감), ‘야마가타 아리토모’(총리 2회, 군사령관), ‘가쓰라 타로’(러일전쟁 총리), 그리고 사쓰마 출신의 ‘오야마 이와오’(‘사이고 다카모리’의 사촌동생, 러일전쟁 육군사령관) 가문이다. 이들은 유서깊은 귀족 가문과 달리, 공통적으로 집안배경이 전혀 없던 최하급 무사 출신으로 당대에 입신하였으나, 메이지 천황의 국가 최대 목표인 ‘조선 침략’에 대한 기여도에 따라 '공작'으로 선정되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조선 합병을 완료하고 메이지 시대를 완성한, 메이지 천황은 조선 합병 2년 후인 1912년에 죽었다.
전쟁사에서는 '파로스의 승리' 혹은, 경제현상에서는 '승자의 저주'라는 말이 있다. 모두가, 경쟁에서 이겼으나, 경쟁 혹은 그 후에 과도한 비용이나 대가를 치르는 바람에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리는 현상을 일컫는다. 러일전쟁의 승리는 일본의 새로운 신화가 되었다. 유럽의 강대국인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너무 쉽게, 너무 크게 이긴 일본은 전 국민이 한껏 들떠 '군인 지상'의 군국주의로 치달았으나, 지나친 승자의 자만심 탓일까? 40년 후 일본제국은 청일, 러일 전쟁 승리의 환희보다 훨씬 더한 아픔을 갖게 된다.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는 '일본 군국주의의 아버지'라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에 의해 군국주의 발호를 촉발하였다. '이토'는 인사와 정치 운영에 파벌 없이 매우 공평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야마가타'는 권력욕과 재물욕이 강하여 영향력 유지에 부심하여, 자신에 의지하러 온 인물은 우대하고, 한번 신임하면 끝까지 봐주는 스타일이었다. 반면, 그에게 반대하는 육군 내 세력은 모두 몰아내었다. 러일전쟁 시 육군은 '봉천 전투'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제3군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와 참모장 '고타마 겐타로'는 조슈번 출신의 '야마가타'파벌이었다. 그 후, '야마가타' 파벌은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소멸되었지만, 군내 파벌 전통은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파벌은 서열이 있고, 서열에 집착하면 아랫사람은 웟사람이 틀려도, 틀리다는 말을 못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러일전쟁의 승리 이후 일본 육군과 해군의 군사사상은 유연성을 잃은 상태로 경직되었고 이 같은 상태가 40년 뒤인 태평양 전쟁 종전까지 두고두고 이어졌다. 군인도 한 인간인데, 평등보다는, 계급이나 출신 기수가 인권을 무시할 정도로 우선시되었던 것은, 일본 사회 특유의 경직된 군대 분위기때문이다. 이런 딲딱함이 본질적으로 비판을 허용하지 않았고, 상대와의 전력에 열세하면 '닥치고 돌격'이라도 해서 정신전력으로 극복한다는 강박관념과도 맞물려 있었다. 이는 군사적인 면에서 일본군 지휘에 상당한 악영향을 끼쳤다.
일본 육군은 '봉천 전투', '203 고지 전투' 등을 겪으면서, 정신력 우월주의와 함께 ‘반자이’ 돌격 같은 보병의 총검 돌격을 통한 공세로만 일관된 전술에 집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반자이'(만세)나 '도쯔케기'(돌격)에는 집단 광기가 필요한데, 누군가가 주춤하면 곤란하다. 작전이 끝나면 '정신자세 확립'이라는 명분으로 구타나 '집단 따돌림'(왕따) 등 체벌도 마다하지 않았다. 과거, 한국 군에서 '군기를 잡는다'며 사용하던 '기합'도 일본군에서 유래되었다. 결국, 일본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력 열세로 전쟁 승리의 '신화'에 도전하지 못하고 무위로 끝나자, '카미카제', '옥쇄작전' 등 극단적인 정신력 제일주의로 퇴행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 육군은 전쟁교훈(戰訓)에 집착하였다. 다른 나라 군대에서 특정 전쟁을 신화화하고 그 전쟁 교훈을 권위적으로 주입한 사례는 별로 없지만, 일본군의 뇌리에 박힌 승전 경험은, 이후 30년의 시차가 있는,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때까지 영향을 끼쳤다. 당장 유럽 및 미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훈을 달달 암기만 해서 제2차 세계 대전 때 이를 경직적으로 카피하여 적용한 국가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일본 육군은, 영일동맹의 전성기에 전수받은 군사기술은 물론, 수많은 장교들을 독일이나 프랑스 등의 선진국 군사학 유학까지 보내면서 얻은 지식조차, 그 본질에 접근하기보다 그저 암기로 전수되었다. 당시 일본군의 모든 시험은 법조문을 암기하듯, '군사교리'나 원칙을 암기해야 하고, 장비 조작 등 실기 부분조차도 암기가 병행되었다.
일본 해군의 경우, 단 한 번의 해전으로 전쟁 전체의 승기를 잡았다. 해군은 ‘쓰시마’ 해전의 승리와 같은 예외적인 사례를 통해서 함대의 단기 결전에 집중하는 함대결전 사상과 요격작전을 맹신하게 되었고... '도고 헤이하치로'가 기함인 '미카사'에 탑승해서 직접 선두에서 일선 지휘를 맡은 방식조차 신화처럼 자리 잡아서, 이후 일본 해군에선 소규모 전대장으로부터 연합함대 사령장관까지 직접 기함에 탑승해서 일선 지휘를 맡아야 한다는 전통이 되었다. 하지만 해전의 양상이 점차 바뀌면서 최고위 지휘관이 기함에서 지휘하는 건 용기는 가상하나, 최고 지휘부의 지휘, 통제, 통신상의 효율이 떨어지고, 자칫 교전에 휘말리면 매우 위험하게 된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시, 일본 해군 참모본부의 작전 계획을 60여 년이 지난 지금 분석해 보면, 두 가지 명백한 결점을 발견할 수 있다. 계획의 복잡성과 가상적(미해군)인 적의 배치에 대한 낙관적인 가정이 그것이다. 당연히, 상대 국가의 해군도 전쟁 전 정교한 작전 계획을 준비한다. 하지만, 일본 해군의 전술 계획은 복잡성 측면에서 타 국가의 전술 계획을 능가했다. 이른바, 진주만 관련한 ‘도라, 도라, 도라’ 같은 영화에서 보았듯이, 일본의 계획 입안자들은 그들의 함대가 일련의 복잡한 작전을 수행하려면 정확한 시간계획에 따라 함대가 기동 하고, 각자 임무를 완벽하게 숙지하면 그들의 희망대로 전투상황이 전개되리라는 환상에 빠져있었다.
구체적으로, 일본 해군 참모본부의 전술가들은 일본 함대가 자신들의 전술을 전개하는 동안, 미 함대는 수동적으로 그들이 예상한 대로 움직인다는 너무나 순진한 가정에 의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인들의 조심성은 일본 함대가 사전에 파 놓은 함정에 쉽게 빠져들지 않았고, 일본군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것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1930년대 미 해군의 작전 계획은 각종 함 들을 함대 중심에서 75~100 마일까지 떨어진 동심원상에 배치하도록 상정하고 있었다. 일본의 가정과는 달랐던 것이다. 또한, 대규모 해상 결전의 성공 확률도 천운(天運)이 승리를 위한 최적의 조건을 제공하여 줄 것이라고 거의 신앙적으로 접근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영광스러웠던 과거를 믿었는지도 모르나, 과거의 승리가 미래의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또 다른 예는, 일본 해군의 연합 함대 해산 시, ‘도고 헤이하치로’ 사령장관이 남긴 말은, '백발백중의 포 1문은, 백발일중의 포 100문을 이긴다'라는 말이었다. 이는, ‘자군 전함의 명중 정밀도를 높혀 백발백중이 되면, 수적으로는 우세하지만 명중 정밀도가 뒤처지는 적 함대를 이길 수 있다’는 의미로, 전투함 척수의 열세는, 훈련으로 보충하면 된다는 말인데, 이게 일본 해군의 훈련 지침이 되어, 그의 후배들은 휴일도 없이 맹훈련하는 일본해군의 전통을 창조하였다. 러일전쟁에서 기술적 우위나 합리적인 동맹관계의 뒷받침으로 승리를 거둔 일본 해군이, 그로부터 40년 후에는 '실전경험과 냉철한 현상 파악'에서 도출된 ‘도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아예 '정신론'을 전면에 내세워서 전쟁을 수행하다가 미국에게 패배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국민들이 열광하던 전쟁 영웅들은 전쟁 담을 이야기하는 동안 점점 자기도취에 물들어 갔다. 특히, '도고'에 얽힌 여러 일화는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일본 해군이 새로운 전함을 건조할 때, 함포배치에 관한, '도고'의 의견은 그대로 '교리화' 되었다. 하지만, 그의 의견을 좇은 전함은 실제 전투에 활용되지 못했다.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맹신한 대가는 컸다. 아무리 숭배하는 전쟁영웅이라 해서 모두 옳은 건 아니다. 다른 일화는, 일본 해군이 미, 영 해군처럼 군복을 개선하려 하자, '현 복장은 '승전'시에 입었던 군복이라 그 전통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그의 논리에 군복 개선은 무력화되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서글픈 것은, 해방 이후 30여 년 이상 세월이 흐를 때까지 지금의 60대 이상 세대가 1980년대 '교복자율화' 이전에 착용하였던 학생 교복 모두가 그때의 군복을 모방하였다는 점이다. 우리의 뇌리에는 군복이 교복이었던 셈이다.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아시아의 새로운 강자가 되었고, 전쟁의 승리는 '군인의 위상'을 한껏 드높혔다. '도고'나 '노기' 등 전쟁에 승리한 군인들은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이들처럼, 메이지 유신이래 내각 총리대신 등 주요 정치인들과 군인들의 우두머리는 거의 존왕 사상에 젖은 조슈, 사쓰마 출신들이었다. 특히, '이토'나 '야마가타'를 보듯이 이들은 총리를 그만두더라도 은퇴하여 원로 행세를 하기보다, 천황과 국가를 위한다며 스스로 자원하여 군사령관이나 통감 등 총리보다 낮은 직책에서 자신들의 전문성을 활용하여 열심히 봉사하였다. 그런 모습은 자연스레, 후배들의 귀감이 되었고, 서구 열강의 식민제국주의를 모방하여 중국, 조선은 물론, 남방 제국으로까지 경제적, 군사적 진출을 모색하는 동안, 군복이 존중받는 이른바, '군인 지상주의' 국가가 되었다. 자연스레 제국주의와 군국주의가 일본인들의 의식세계를 지배했다.
덕분에, 군인은 물론 민간인들조차 계속되는 승전에 도취하여 그 반대급부로 침략받고 지배받는 상대가 얼마나 큰 아픔을 갖는지? 는 모두의 관심밖이었다. 조선을 병탄 하는 동안 모두가 승리에 들떠 제국의 영광만 생각하였지, 지금껏, 과거 침략사를 반성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승리로 점점 교만해지며 '옥쇄' 등 가혹하리만큼 지나친 군인정신이 강조되었다. 제국의 영역이 확대되었지만, 국민들은 점점 피폐해졌고 국력과 군사력이 이를 받쳐주기에 벅찼다. 무엇보다도 무기체계와 전쟁의 양상이 변하였음에도, 전쟁으로 성장한 국가답지 않게 과거의 영광에 얽매인 경직된 사고를 고집하다 쌓아 올린 모든 탑을 일시에 허물었다.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시작한 조선 정벌로부터 '메이지'의 조선 병탄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한민족을 향해 광란의 칼을 휘두르던 군국의 말로는 원폭 피폭이었다. 자업자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