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정신이 된 ‘발상의 전환’과 일본에 대비되는 조선
1852년 조선에서는 고종이, 일본에서는 메이지가 태어났다. 둘은 동갑내기로 각각 1864년(12살), 1867년(15살)에 왕위에 오르지만, 둘의 운명과 그들이 통치하던 제국은 극과 극일 정도로 달랐다. 원인은 군주 자신의 성격이나 능력, 애국심 등도 물론 꼽을 수 있으나, 무엇보다도 신하들의 충성심과 능력에 따라 군주의 평가가 갈라졌다. 부국강병으로 일본제국을 성장시키고, 강대국의 일원으로 편입된 메이지는 일본에서 가장 완벽하고 위대한 군주상으로 추앙받는다.
반면에, 조선의 고종은, 정조 이후 신하들이 붕당을 지어 자신들의 입맛대로 왕을 세워 자신들의 정치를 하였던 안동 김씨 등 이른바 ‘세도 정치’가 횡횡하던 가운데, 아버지 대원군의 기지로 왕에 즉위하였다. 하지만, 거의 10여 년간 기가 드센 아버지가 ‘수렴청정’하다가, 1873년에 친정을 하였으나 이번에는 왕비와 ‘처족 민씨 일가’들도 세도를 부리며 권력을 휘둘리자, 신하들은 백성과 나라보다는 자신의 안일과 가문의 안녕에 매달리며 왕을 첨점 무능하게 만들었다. 이웃 일본은 신하들이 ‘존왕’을 외치며 막강한 막부에 대항하다 죽어갔는데.
그런데, 권력욕에 사로잡힌 왕비나 아버지가 서로 반목하며 싸우는데 둘 다 힘이 없으니 청, 일, 러시아 등 외국군을 끌어들여 상대를 제압하려 한 것은 최악의 행위였다. ‘아편전쟁으로 중국의 일부 영토마저 ’식민지‘화 되는 것을 목도한 일본의 시각은, 아무리 권력투쟁이 격렬해져도 외세가 내정에 개입하는 일에는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기에 누군가가 ‘외세와 결탁했다’라는 꼬리표가 붙는 순간 엄청난 정치적 손실을 입어야했다.
덕분에, 일본은, ‘보신전쟁’으로 치열한 내란을 겪으면서도 유신군을 지원하던 영국이나 막부를 지원하던 프랑스를 절대 내정에 끌어들이지 않았는데... 결국, 조선은 이들이 끌어들인 외세에 좌지우지되며 망국의 길을 걸었다.
고종은 조선의 황제까지 되었지만, 조선을 온통 비리와 부패로 이끌다 그나마 가문의 명맥을 잇고자 늦으막에 일본의 일개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이씨 왕가’(李氏王家) 후손들의 운명은 더욱 기구하였다. 이런 고종과 달리, 메이지는 신하 복이 많았다.
메이지 유신은 ‘서구화의 완성’이라고도 한다. 전 세계에서 일부 서구 국가를 제외하고는 아시아권에서 산업혁명과 의회정치를 함께 이룬 국가는 일본이 유일하다. 그야말로, 극적이고 거대한 사회변혁이었다. 이 변혁의 동력은 '메이지'를 섬기는 '존왕' 사상에 찬 무사들이었다. 즉, 유신은 ‘사농공상(士農工商)’ 신분제도에서 ‘사’에 해당하는 지배계급인 사무라이 중 ‘하급 무사’들에 의한 '쿠데타'로, 반란이었다.
조선도 '사농공상' 신분제였지만, 조선의 '사'는 문인, 즉 선비로서, 이들은 형식주의에 치우친 '주자학'에 따라 '옳고, 그름'의 논쟁에 목을 매었다. 책만 읽지 아무런 생산력이 없는 선비는 공자와 맹자를 논하며 현실 안주를 원했다. 변화는 자신들의 위상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추구하였고, 변화와 혁명을 억압하고 적대시하였다. 조선의 사(士)가 선비를 지칭하지만, 일본의 사(士)는 무사를 의미한다. 당연히, 항상 싸움을 준비해야 하던 무사는 논리를 다투었던 조선의 선비와는 달랐다.
무사에게는 순간순간이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다. 안주는 죽음이니 살기 위해서라도, “더 낫게”를 찾아야 했다. 왜란 이후, 이어진 ‘에도 막부’는 전쟁 없이 평화가 200여 년 이상 지속되어, 물자가 풍부하고 사회의 경제력은 증대되었다. 하지만, 사무라이는 무술 이외에는 별다른 기술도 없으니, 전쟁이 없으면 그저 '무위도식'하는 군인이었다. 그럼에도 무사이기에 매일같이 '어떻게 싸울까?'를 고민하며 심신을 단련해야 했지만, 평화가 길어지자 사무라이 중에서 하급 사무라이들은 풍요는커녕 가난에 시달리며 자연히,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에, 막부는 각 번마다 학교를 짓고 무사들에게, 학문을 강조하였다. 학문의 기회는 사무라이의 위상에 큰 변화를 주었다. 이들, ‘책을 읽게 되자’, 자연스레 유학(儒學)이라는 인간사에 대한 학문을 익히게 되었고, 자기가 속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즉,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정치를 알게 되자, 천황의 존재와 쇼군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정통성이 없는 무인 정권인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 체제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 결과, '황실에 의한 통치'를 추구하는 사무라이들의 집단이 점점 크게 형성되어 갔다. 이른바, ‘존왕’ 의식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작스레 서구 열강의 군사력과 기술의 위협이 찾아왔다. ‘에도 막부’가 미국의 철선(黑船)에 굴복하자, 여태껏, 맹목적으로 주군에게 충성하였던 사무라이들은 어느 순간 머리가 커지자 ‘어떻게 하면 국가를 지킬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하며 무능한 막부에 분노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대 일본주의 팽창론’을 주창한 ‘요시다 쇼인’의 사상적 가르침에 경도된 ‘쇼카손주쿠’ 문하생이었던 ‘책읽는’ 하급 사무라들의 ‘막부 타도’ 운동이었다. 이른바, '존왕양이'의 발단이다.
그중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에도 막부 통치 내내 소외되었던 ‘조슈’와 ‘사쓰마’ 등 ‘도자마’ 다이묘(大名, 번주)의 사무라이들이 적극적으로 ‘양이’와 막부 타도에 앞장섰다. 사쓰마는 서양 지식을 바탕으로 ‘철과 무기를 제조하자’는 실용적인 방법에, 조슈는 ‘천황으로 막부를 대체하자’는 정치적, 정신적 방법으로 ‘존왕양이’에 집착하였다.
이처럼, '존왕양이'를 주도한 사쓰마와 조슈 번은 1863년 각각 '양이'라며, 사쓰마는 영국과 '사쓰에이' 전투를, 조슈는 네덜란드 등 3국과 '시모노세키' 전투 등으로 큰 전쟁을 치렀다. 전투의지와 무관하게 구식무기로는 당연히 패배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들은 이 전쟁을 계기로 '양이'를 버리고, '대양이'로, 서구의 신식 무기체계와 군사적 제도를 받아들였다.
이 점이 조선과 달랐다. 조선은 프랑스 군함의 도발인 '병인양요'와 미국 군함의 '신미양요'를 치르면서 큰 희생을 입었지만, 압도적인 힘을 가진 '외세의 위협에 어떻게 대처할까?'를 고민하기보다, 전국 각지에 '척화비' 따위를 세우며 쇄국주의를 강화하여, 오히려 더욱 닫고 움츠리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사쓰마와 조슈 양 번은 8.18정변 등으로 서로 싸우는 일련의 전투를 겪었지만, ‘막부타도’라는 대의를 내세운 '사카모도 료마'의 중재로 우여곡절 끝에 ‘삿-쵸동맹’을 맺고, 사쓰마는 조슈에게 신식무기체계 획득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막부와의 전쟁을 앞둔 조슈는 신식무기와 군사제도의 개편으로 군사력을 획기적으로 증대시켰다. 논쟁의 상대가 아니라, 피 흘려 전투를 벌인 상대와 '막부 타도'라는 하나의 정치적 목표 달성을 위해 동맹을 맺었다. 서로를 죽이고도 필요에 의해 '의기투합'한다?는 게, 조선의 ‘사색당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이 맺은 ‘삿-쵸동맹’의 파괴력은 엄청났다. 조슈는 '제2차 조슈-막부' 전쟁에서, 세간의 예상과는 달리, ‘다웟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조그마한 1개 번이 전 일본을 호령하는 막부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새로운 무기체계와 신식 군대 편제는 구식 장비와 군제를 압도했다. 이후에도, 이들 양 번은 여느 번들과 다르게 점점 더 신식무기에 집착하였고, 국민 병역의무제까지 도입하여 군사력을 더욱 증대시켰다.
‘유신 3걸’과 유신의 완성자들
‘존왕양이’를 내세우며,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사쓰마와 조슈 출신 하급 무사들 중, 특히 ‘유신 3걸’로 불리는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는 공통적으로 하급 무사 출신으로 ‘사무라이 정신’을 가진 군인으로서, 급진개혁적인 혁명론자들이었다.
그들은, '막부-조슈' 전쟁에서 승리하자 곧바로 '쇼군'에게 ‘천황에게 권력을 반환하라’는 ‘대정봉환’을 촉구하였다. 막부가 어물쩍거리며 권력 이양을 미루자, 다시 ‘왕정복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즉, '메이지 유신'은 ‘책 읽는’ ‘하급 사무라이’들이 '왕을 받들며' 군사력을 동원한 반란이었다. 다시 말하면, ‘막부 대신, 천황’을 원하던 ‘도자마’ 번주들이 ‘존왕양이’를 내세운 하급 무사들에게 힘을 실어주자, 이들 하급 무사들은 막부를 타도한 후, 천황을 내세우며 ‘서구화’를 이루어 가는 모습이었다.
1868년 유신에 반대하는 막부 세력 잔재와 사실상 일본의 '마지막 내란'이라고 할 수 있는 ‘무신전쟁’이 발발하자 유신 군은 이번에도 군사력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이 과정에서 막부와 유신 군 각각 프랑스나 영국 등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나, 어느 쪽도 상대를 제압하려고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았다. 외세에 매달려 비굴한 모습을 보인 조선 조정과는 대조적이다.
조선도 변화의 몸부림을 쳤으나, 정조 이후에 줄이어 등장한 무능한 왕들과 지독한 당쟁, 그리고 선비들의 보신주의적 세도정치에 경제, 문화의 발전을 이루기는커녕, 경세제민을 외친 실학사상마저 그 빛을 잃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시간이 지나서야, 일본을 거부하고 얕보던 조선은 뒤늦게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찾았으나, 이미 늦어도 너무 늦었고 실속도 없었다.
유신 세력이 근대화를 위한 재정확보를 위해 ‘판적봉환’까지 이루자, 곧이어 1871년 천황에게 중앙집권적 권위를 몰아준 ‘폐번치현’과 무사들의 권위를 부정하는 '산발탈도령'(무사의 상투를 자르고, 칼을 버리라는 뜻)을 시행하였으나, '무신전쟁'으로 힘이 빠져서인지 사무라이들은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그리고, 유신 정부의 대표로 서구로 견문을 넓히려 떠난 '이와쿠라' 사절단의 고위직 무사들도 '서구식'에 맞추기 위해 거의 ‘촌마게’라는 무사(士)의 상징인 상투를 잘랐다. 이들 중 일부는 서구문물을 보고, 배우고, 돌아와서, ‘부국강병’을 앞세워 ‘서구화’ 개혁을 강행하였다. ‘책 읽는’ 무사들의 염원이 점점 현실화되고 있었다.
같은 문제에 대한 조선의 접근은 달랐다. 일본보다 약 24년 이후인 1895년, 김홍집 내각은 단말마적인 발악이랄까? ‘서구화'를 향한 개혁과 '위생상의 문제'로 '모든 성인 남성은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을 내렸으나, '딸깍발이' 유생 '최익현' 등 선비들은 '신체발부 수지부모...'(모든 신체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으로 감히 다치지 않는 것이 효의 근본) 라며, '손발을 자를지언정 머리는 깎을 수 없다'며 완강하게 반대하였고, 항일 의병운동까지 일어났다. 외국 문물을 견학하겠다는 진취적인 생각은커녕, 개혁을 하겠다는 마지막 안간힘조차 '이대로'를 고집하던 '딸각발이' 유생(士)들에게 외면당하였다.
’대정봉환‘과 '메이지 유신'으로 황권을 회복하고, ’판적봉환‘과 '폐번치현'으로 재정확보와 중앙집권제를 확립한 유신 세력의 다음 목표는, 경제산업 발전을 가속화하기 위한 '서구화'와 국방안전을 위한 '정한론'이었다. 둘 다 오랜 시간 꿈꾸어 온 대륙진출을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특히, ‘정한론’은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과 ‘팽창정책’의 망령이 되살아난 것이다. ‘부국강병’으로 ‘군국주의’의 선봉에 섰던, 유신 세력은 하급무사 출신이었던 ‘요시다 쇼인’의 ‘존왕양이’와 ‘대일본 팽창주의’를 신봉하여, ‘조선을 지배하자’는 ‘정한론’으로 국론을 이끌었다.
일본은 이미 1876년, '운요호' 사건으로 조선에 발을 디뎠고, 1884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조선의 유사시 청국과 동일하게 '양국 공동출병'권도 확보하였다. 1894년 조선이 '동학운동' 진압을 위해 청에게 다급하게 병력을 요청하자, 공동출병을 명분으로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이, 느닷없이 조선 왕궁을 급습하여 고종을 유폐하자, 조선은 순식간에 '일본 점령하의 조선'으로 전락하였다.
너무나 손쉽게 조선을 장악한 일본은 1894년 곧바로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자신들이 수천 년간 섬기고 배워온 중국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청일전쟁 종전으로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은 청으로부터 조선을 떼내기 위해 '조선이 독립국'임을 제1조에 명시하였다.
그리고, 압도적인 ‘청일전쟁’ 승리는, 일본 국민의 자존감을 일깨웠고, 번에 종속되었던 일본인에게 일본을 국가로 알게 하고, 국체인 ‘천황’에게 충성하게 하였다. 또한, 청나라로부터 받은 막대한 ‘청일전쟁’의 배상금으로 새로운 군사력 건설에 치중하여, 단시간에 엄청난 군사적 강국으로 발돋움하며, 중국까지 세력을 점점 확대되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방해세력으로 나서자, 일본은 10여 년 동안 절치부심하여 러시아 남하를 염려하던 영국과 ‘영일동맹’을 맺고, 그 도움으로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였다.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마저 승리하자, '조선 독립국'론은 허울 좋은 명분이 되었다. 본색을 드러낸 일본은, 메이지 유신 공훈자로 전직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를 특사로 파견하여, 조선을 겁박하여 을사(보호) 조약을 맺고 외교권을 강탈하며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조선이 망해가는 과정에서 보인 조선 지도층 인사들의 행태는 일본의 하급 무사 출신들과는 사뭇 달랐다. 사대부 집안에서 어릴 적부터 삼강오륜을 달달 외우고, 평생 '충효'를 자나 깨나 외치며 왕에게 충성을 다짐하였던 조선의 고관대작들은, 조선이 망해가자 왕을 저버리고,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 '을사 5적'이 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반면, 불과 3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요시다 쇼인'의 '쇼카 손주쿠'에서 '존왕양이'를 심득하였던 90여 명의 문하생들은 대부분 유신의 투사로서 죽어갔거나, 살아남은 자는 평생동안 '존왕'에 충실하였다.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든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 통감이 되어 조선국 접수 작전을 주도하다가 죽었다. 하지만, 5년 뒤 1910년에 이루어진 ‘조선 병합’은 '메이지 유신' 최대의 공적이었다.
‘메이지’ 시대에 청일전쟁, 러일전쟁, 조선 침탈 등 수십 년간 계속 승리를 이끄는 동안, 전 국민은 전쟁 승리에 열광하였고, 군인들이 얻은 전과에 고무되었다. 계속되는 ‘승전’ 에 고무된 일본은 세계를 무대로 온갖 수탈과 정복을 이어 갔다. 개구리가 황소를 삼킨 관점의 차이는, 생각의 차이였다. 양반 정신으로 ‘이대로’에 안주하던 대가로, 어떻게든 승리를 추구하는 ‘발상의 전환’에 의해 씻을 수 없는 수모를 당하였다.
조슈출신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군인에 의한 군국주의를 이끌었다. 그러면서, 오로지 천황만 숭배하는 수많은 장군들로 '야마카다' 파벌을 만들어 결속시키고, 이들을 러일전쟁부터 주요 전투를 이끌게 하였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와 ‘아베 신조’ 등 수많은 총리와 많은 장군을 배출하였던 ‘조슈’ 번(야마구치 현)‘은 여전히 혐한과 반한 정서의 본거지로 남아있다.
일본 패망 이후의 근대 정치계에서도, 사쓰마와 조슈 출신들은 유력한 '우익 정치세력'의 빅 2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총리 배출은 조슈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일본 정계는 '아베'파니 뭐니 해서 총리직을 정할 때마다 합종연횡하며 여전히 '끼리끼리'의 문화가 남아있다. 최근까지 일본정치에서 조슈 파의 대표로 '아베 신조'가 있다면, 사쓰마 파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있었다. 둘 다 총리였지만 둘의 공통점은 지독한 '혐한' 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