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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Jan 08. 2023

유럽 속 아시아의 흔적, '헝가리' 이야기

어느 군사 외교관 이야기 (오스트리아, 제19화)

잠자는 게르만을 깨운 흉노와 유럽 대평원에 진출한 헝가리

유럽 속의 아시아 흔적

독일(게르만) 연방의 주도권 다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탄생

한국과 헝가리의 관계 개선

거위 간 요리 만찬 초청 행사 


게르만을 잠에서 깨운 흉노

2,000여 년 전인 BC 100여 년 경까지, 우랄산맥 서쪽에 흩여져 살던 야만인 게르만 족은 인종적으로 노랑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백인으로서, 청동기 말기 정도의 문화 수준이었다. 어느 날, 인류 최초로 우랄산맥을 넘어온 ‘흉노(Hun, 훈)족’이 갑작스럽게 기습하자 혼란에 빠진 게르만 부족들이 수백 년에 결쳐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동하며 점차 당대 최강 로마제국에 흡수되어 갔다. 체격이 훨씬 큰 게르만 족이 아시아인 흉노족의 상대가 될 수 없었던 것은, 흉노가 한나라에 쫓기며 어쩔 수 없이 우랄산맥을 넘었다지만, 당대 최고의 철기문화를 가진 중국 한나라와 40여 년에 걸친 수많은 전쟁으로 단련된 탓이다.  


게르만 족은 유럽 역사에 등장한 후, 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중세 유럽을 주도하며 이들의 후손은 독일, 프랑스, 이태리, 영국 등으로 우뚝 섰다. 그동안, 우랄 산맥을 넘어 게르만 족을 뒤쫓으며 유럽 깊숙이 진입했던 흉노족은 어디로 갔을까? 흉노는 소멸되었지만, 일부 역사학자의 견해는, 오늘날 핀란드를 ‘흉노(훈)족’의 선조로 본다. (훈의 Hun은 핀란드의 Fin으로 ‘바람’이라는 뜻이고, 중국은 흉노를 ‘풍족(風族)’으로 적기도 했다) 2,000여 년 전 게르만 족의 대이동을 촉발시킨 ‘흉노(훈)’는, 게르만과 다투며 큰 제국을 가졌지만, 훈족의 왕 '아틸라'가 급사한 후 세력이 약화되어 밀리다가 스칸디나비아 반도 최북단의 오늘날 핀란드에 정착했다는 설이다. 훈족은 문자가 없어 문화적 흔적이 남아 있지 않지만, 투르크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대부분 유럽이 ‘인도-유러피언’ 어족인데, 핀란드어가 우랄-알타이 어족과 언어적 구조가 같다는데, 주목하였다. 같은 이유로, 유럽에서는 핀란드 외에 헝가리, 튀르키예도 언어적 뿌리가 동양인과 같다고 보고 있다. 


게르만 족이 이동을 개시한 1,000여 년 후인, AD950년경 ‘마쟈르’ 족이라 불리는 ‘파미르’ 고원지대 유목민 헝가리족 (Hungary: Hun흉노의 Hun의 일족이라는 설도 있다)이 오랜 가뭄을 피해, 고원을 뛰쳐나와 유럽 대평원으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이웃 슬라브 족, 게르만 족과 부딪치다 어느덧 ‘헝가리’로서 중세 유럽의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이고 1,000여 년에 걸쳐 유럽 화하였다. 하지만, 언어는 여전히 '우랄-알타이' 식으로 주어, 목적어, 동사의 어순이고, 인종적으로도 완전한 백인처럼 혼혈되지 못했다. 헝가리는 튀르키예,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와 같은 ‘퉁구스’ 어권으로 '터키어권 국가협의회 (CCTS)'에 참관국으로 참여하고 있다. 언어 외에문화적으로도 아시아적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예컨대, 아기를 낳으면 '부정탄다'라고 외부인의 접근을 막기 위해, 새끼줄에 숯과 고추를 끼어 문 입구에 매달아 놓는 것은 우리나라 전통과 유사하였다. 


독일 (게르만) 연방의 주도권 다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탄생

1866년, 이른바 보-오 전쟁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벌어졌다. 오스트리아의 독일연방 내에서 독일 통일을 추구하던 프로이센(훗날 독일)의 '소독일 주의'와, 다민족이 포함된 독일연방의 현상 유지를 바라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대독일 주의'간에 독일 연방 내의 주도권을 둘러싼 전쟁이었다. 7주간의 격전 끝에 러시아 다음으로 큰 제국인 오스트리아는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이태리 연합군에게 참패하였다. 승리에 취한 프로이센은 비엔나로 침공하여 오랫동안 오스트리아에 억눌려왔던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으나,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독일연방에서 축출하고 일부 영토를 할양받는 선에서 종결하였다. 훗날 프랑스와의 전쟁을 내다본 비스마르크가 오스트리아게 굴욕감을 주기보다 자존심을 지켜주어 복수심을 갖지 않게 해 준 것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장 (모든 지배지역 망라)

1867년, 패전으로 절대주의 체제하에 억눌린 소수 민족들이 동요하자, 오스트리아는 제국과 황실을 보존하기 위해 가장 강력한 저항 세력인 헝가리인과 대타협을 맺고 이중 제국 체제를 만들려 했다. 여기에, 헝가리는 부유하고 산업화가 잘된 오스트리아와 연합이 더 이득이라는 경제성과, 헝가리의 정치적 위상 제고로 헝가리 내 소수 민족 견제라는 정치성을 내세웠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국민생활 수준이나 사회보장제도는 최고 수준으로 노숙자가 없었고, 교육도 무상이었다. 이처럼, 양측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외교, 국방, 재무 분야는 오스트리아 황제가 갖고 나머지 부분은 통치지역을 2개로 나누어 각각의 수상들이 관장하도록 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후, '오-항' 제국으로 약칭)이 탄생하였다. 


오-항제국이 이처럼 물리적으로 결합하였지만, 화학적인 결합은 얼마나 되었는지 의문이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서유럽보다 헝가리, 폴란드, 크로아티아 등 과거 오스트리아의 속국이었던 나라에 미녀들이 많다고 한다. 다민족을 통치하던 오스트리아가 '대독일주의'를 표방하며 혼혈을 장려하였던 탓일까? 그리고, 비록 전쟁에는 패했지만, 보수적인 카톨릭 국가라는 이미지와 달리 남녀 간의 교제는 상당히 자유로워, 여성들 사이에서는 기혼 여부와 상관없이 특히 젊은 군인과 짧게 연애하고 헤어지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그런 영향일까? 오늘날 헝가리의 길거리 애정 표현은 굉장히 자유로워 보였다.  


그러나, 헝가리인은 지금껏 공공장소에서 맥주잔을 부딪히며 건배를 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 저항하던 수많은 독립 운동가를 '맥주잔을 부딪히며 마시는' 전통을 가진 오스트리아 군대가 처형했기 때문이란다. 오-항 두 왕국은 언어도 각국의 언어를 사용하였으나, 국방권을 가진 오스트리아가 군대만큼은 독일어 사용을 강요하여 헝가리인의 불만이 컸었다. 더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의 60% 이상이 슬라브 등 소수민족이어서, 오스트리아 연대급 부대에 3~5개 언어로 된 명령문이 하달되는 경우도 많았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시 전쟁 포고문이 무려 15개의 언어로 될 정도였다고 하니까... 전투가 가능했을까? 

 

한국과 헝가리의 관계 개선

알프스의 끝자락에 위치하고, 끝없는 유럽 대평원의 시발점인 헝가리는 19세기 한 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원으로서 오스트리아의 자치국이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독립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화되었다. 이후, 구 바르샤바체 체제의 해체와 나토가입, EU 가입으로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었다. 


한국과의 관계는, 6.25 전쟁 이후 한반도의 공산 측 중립국 감시단으로 친북 국가로 활동하다 1990년에 소련 붕괴 직전 한국과 수교하였다. 수교와 동시, 부다페스트에 우리 대사관이 설치되자 국방 무관부도 함께 창설되었다. 헝가리는 헝가리어가 모국어지만, 오스트리아와 소련과 함께한 만큼, 독일어와 러시아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하지만, 2000년 NATO에 가입하고 EU의 일원이 되면서 영어가 주요 외국어로 자리 잡았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무관을 겸한 필자는 헝가리를 자주 방문하였다. 비엔나에서 부다페스트까지 고속도로가 있어 자동차 한 시간 반 정도면 도착할 수 있었고, 열차로 가더라도 쾌적하게 여행할 수 있어서, 월 1회 이상 방문하여 웬만한 국방부 행사에는 거의 참석하였고, 군부대 방문도 자주 하였다. 당시, 헝가리 국방부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나토 가입에 따른 준비활동과 '나토 PFP'(NATO Partner for Peace) 훈련 등을 지원받아, 무관의 업무가 상당하였다. 특히, 헝가리가 나토가입이 확정된 터라, 러시아제 무기체계에서 서구식 무기체계로 이전해야 할 시기여서 각국 무관은 자국 홍보에 여념이 없었다. 비록, 나토 국가는 아니지만 한국의 각종 장비도 이미 그 우수성이 널리 알려져 헝가리가 우리에게도 이런저런 정보를 많이 요구하여 무관도 바빠졌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비록 겸임국이지만 대사가 무관 업무에 무관심하였다. 당시, 바르샤바 동맹국으로서 러시아 무기체계를 보유한 헝가리는 나토 가입에 맞추어 많은 미국 식 무기가 필요하여, 외교부와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는데, 부서 간 협조가 어려웠던 부분은 매우 아쉬웠다. 대사는 '대통령 특명전권 대사'인 만큼 외교와 국방을 모두 아울러야 하는 데..., 개인적인 취향을 떠나 국가적으로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 분은 그의 후임 대사나, 후에 기술할 튜니지아, 요르단 대사들과 많이 달라서 개인적인 성향으로 생각한다. 대사가 무관심하다고, 피하기보다 무관이 적극적으로 해당국 국방현안을 제공, 토의하고 관심을 이끌어 내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헝가리 공관 직원들이 무관 업무에 매우 협조적으로, 헝가리가 추진 중인 각종 나토 PFP 등 국방 관련 자료와, 셍겐조약과 EU 가입 등 현안과제를 많이 공유하였다. 


국방무관은 겸임국의 아그레망도 받아야 한다. 주재하는 곳만 다르지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이야기다. 전술한 바와 같이, 주재국 오스트리아의 국방성이 주관하는 스키 주간 행사에는, 무관단 대부분과 일부 국방성 인사 등의 가족 약 80여 명이 참석하였는데, 여기에는 주재국을 겸임국으로 두고 있는 헝가리 주재 네덜란드, 캐나다, 핀란드 등 일부 국가의 무관 부부가 거의 항상 적극적으로 참석하여 같이 어울렸다. 그래서, 필자도 헝가리 국방성이 주관하는 사관학교 졸업식 행사, 나토가입과 관련되는 각종 행사나 부대 방문 등 거의 모든 행사에 참석하여, 헝가리 당국자나 헝가리 무관단도 필자를 마치 주재 무관처럼 편하게 대해 주었다. 


헝가리 문화행사 소개와 '거위 간 요리' 만찬 초청 행사 

어느 날, 헝가리 국방성에서 문화 소개라며국방부 영빈관에서 '프랑스 왕실에서 먹는다'는 유명한 푸아그라’ 요리에, 헝가리가 자랑하는 '토가예'라는 전통 포도주를 곁들인 거위 간요리(Foie gras, 푸아그라)’ 만찬을 베풀며 주재 무관단 부부를 초청하였었다. 우리 식탁에 함께한 헝가리 장교가 들려준 '푸아그라' 이야기는 필자에게는 매우 흥미로웠다. BC 2500 년경, 고대 이집트인은 오리나 거위를 과식하게 먹이면 간이 부풀어지는데 이를 식용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이 그 기원이다. 이후, 고대 로마와 유태인을 거쳐 1500년 경 프랑스로 유입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이 산업에 3만여 명 이상이 종사하고 있다는데.. 

거위 간으로 만든 푸아그라 요리

영국, 독일, 이태리, 덴마크 등은 거위 간 식용을 동물 학대라며 금하는데, 헝가리인은 전통식이라며, 거위의 간을 키우기 위해 '거위에게 강제로 먹이를 먹여 살찌우는 법'이나, ‘거위를 화나게 만드는 방법’과 어떻게? 요리하는지를 고민한단다. 요리는 소고기처럼 웰든이나 미디엄, 레어 등으로 간 1~2 조각으로 만든다. 그런데, 참석자 중 한 명이 동물학대와 관련하여 엉뚱하게 논란거리인 우리나라 보신탕 이야기를 느닷없이 꺼내어 필자를 당황하게 하였다.


거위를 ‘왜, 먹는지?’로 대화를 이어가다, 갑자기 '개' 이야기가 튀어나오다니...? 개를 좋아하는 서구인에게 우리가 미개인쯤으로 보였을까? 아무튼, 헝가리 장교가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여러 역사 이야기로 어물쩡하게 대화를 돌리는 바람에 그냥 그렇게 지나갔지만, 개 문제는 늘 곤욕스러운 대화 주제였다.


이처럼, 헝가리 국방부가 주관하는 무관단 문화 행사는 국방성 초청 만찬, 왕궁 만찬, 의사당 소개와 주요 특산물 소개 행사가 많았다. 특히, 헝가리인이 굉장히 자부심을 가지고 소개하는 전통 와인 ‘토가예(Tokaji Aszu)’는 지하저장고 벽에 있는 곰팡이균이 포도주 원액으로 침투하여 발효된 와인으로 맑은 노란색이나 황갈색을 띠고 있으며, 약간 단맛이 나고 독특한 향으로 모두에게 인기가 있었다. 


또한, 헝가리의 도자기 문화는 과히 세계 최상급이었다. 금빛 도색 테두리로 유명한 '헤렌드' 도자기는 영국의 '웨지우드' 등과 함께 세계 4대 브랜드로서 굉장히 고가인데,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남서쪽으로 차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헝가리 최대 호수 '발라톤 호수' 근처에 '헤렌데' 본사가 있어 이 일대에는 관광객이 많았다. 그리고, 도자기와 함께, 빨강, 노랑, 파랑, 초록, 보라 등 각양의 색갈이 들어간 크리스탈 와인 잔도 '보헤미안' 크리스탈 못지않다. 이외에, ‘발라톤’ 호수와 로마 유적, 고성 만찬, ‘홀로하저’ 도자기 생산지, 센텐드레 민속촌 등지도 볼만한데, 마상 활쏘기, 매사냥, 가면 탈, 포크 댄스 등 다채로운 민속 전통이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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