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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Dec 22. 2022

'비엔나', 국방무관 첫 부임지

어느 군사 외교관 이야기 (오스트리아, 제3화)

유럽인이 살고 싶어 하는 예술의 도시

외교관은 주재 국어는 물론, 영어에 능통해야 

국제 감각은 밥 먹는 것부터 

공관장의 배려



유럽인이 살고 싶어 하는 예술의 도시

중앙일보 (2018.12.24일 자)에서 ‘공무원들이 즐겨 찾는 출장지’로, 오스트리아가 일본, 미국, 독일에 이어 4번째 선호국이었다고 발표했다. 이어서 프랑스, 체코, 이탈리아 순이었다. 별다른 양국 간 현안이 없는 조그마한 나라인 오스트리아에, 예컨대, 자전거 도로 시찰 등을 핑계(?)로 공무원들이 찾았던 것은 아마도, 유엔 등 국제기구가 많이 있고, 문화 예술, 특히 ‘음악과 춤’의 나라로 알려진 문화대국으로, 비교적 잘되어 있는 사회보장제도, 아름다운 알프스 자락의 경치 관광도 방문 목적(?)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필자가 대사관에 주재할 때에도 여러 공적 임무를 띤 많은 손님들을 맞았었다. 이처럼, 선호도가 높은 중부 유럽의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 (독일어로 ‘Wien’, 영어로 ‘비엔나 Vienna’)에서 생애 첫 국방 무관으로서 근무하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는 너무 큰  보람이었다. 혹자는, "승진을 위해서는 무관으로 나가지 말든지, 나가려면 우리와 교류가 많은 영어권의 큰 국가로 가야 한다"라고 충고를 하였지만, 필자는 독일어권의 조그마한(?) 국가인 오스트리아를 택하였다. 그래서 그곳에서 국방무관, 국제기구 군사대표단, 국제회의 대표로 활동하는 대사의 군사 자문관 역할을 모두 경험하는 것은 군인으로서 남 다른 즐거움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원래 유럽 문명의 근원인인 로마제국의 계승자로 게르만 문화를 기반으로 보헤미아, 슬라브, 마자르 문화를 융합하여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유럽에서 가장 큰 대제국을 이루어, 신성로마제국으로서 합스부르크 왕가가 통치하였다. 하지만, 절대 왕정의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 전쟁 (1803-1815)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빈 체제를 구축하며 유럽의 맹주로 군림하였으나, 독일과의 전쟁 (1865, 보-오 전쟁)에서 패배하며,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이 되었다가, 독일-오스트리아-터키 등 추축국들이 1차 대전에서 패배하자 헝가리가 분리되고 오스트리아가 되었다. 1차 대전 후, 1/10 정도의 영토만 남은 상태에서 다시 독일에 합병되었다가, 독일이 2차 대전에서 다시 패배하자, 패전국 독일처럼 미, 영, 불, 소 등 4대 전승국에 의해 분할되어 점령 통치를 받았다. 근세 들어 줄을 잘 못섰다가 곤욕을 치렀다. 전 영토와 함께 수도 빈이나 그라츠 등 주요 도시도 4등분 되는 등 분할 통치를 받다가 1956년 미, 소 합의에 의해 중립을 표방하며 독립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유럽의 중앙에 위치한 중립국으로 냉전시대에는 동서의 접점으로써 중개 역할을 자임하였지만, 냉전 종식 후에는 나토 가입을 거부하며 국제 평화와, 핵, 환경문제 등으로 관심을 전환하였다. 유럽의 중심으로 오랜 전쟁 역사와 함께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이제는 국제기구가 산재한 곳으로 참 소박하지만 매력적인 도시이다. 유럽인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도시 2위에 오를 정도이니... 오스트리아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이곳 빈에서 '왠지 모를 친근함'을 느낀다고 한다. 전 세계인에게 익숙한 '모차르트' 음악과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이 있는 예술의 도시 말고도 기독교 문화와 게르만 역사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이해하면 할수록 더욱 가까이 느껴지는 나라이다.


언어(주재국 독일어와 영어)의 필요성과 국제 감각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음악에 문외한인 필자가 음악의 수도 빈에 가서 3년간 살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무관 부임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고교 1학년 때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Sound of Music: 1965년작, 줄리 앤드류스, 크리스토퍼 플러머 주연)’을 무척 좋아해서 몇 번을 보고 또 보게 된 것이 계기였다. 뮤지컬도 좋았지만 잘츠부르크와 잘차흐 강, 잘츠캄머굿, 알프스 등 영화의 배경 풍경에 매료되었다. 정말로 아름다운 곳이구나.... 해서 시작된 독일어 공부였고, 독일 육사에 진학하려는 마음으로 육사에 입교해서도 독일어만큼은 선두에 있었다. 


하지만, 독일 육사가 2년제에서 5년 제로 학제를 개편하여, 그 해는 뽑지 않았다. 여담으로,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국방부 장관이 독일 육사를 졸업한 덕분일까? 독일 육사 출신들이 국방부에서 승승장구하였다. 어쨌든, 독일어는 포기하고, 우연찮게 시작한 영어로 미국 유학을 떠난 뒤 오스트리아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런데, 국방부에서 (주)오스트리아 국방무관’ (겸 헝가리 무관, 주 비엔나 유엔대표부 대사의 군사 자문관, 구주 안보 협의체 한국군 옵서버 단장)으로 필자를 선발하였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는, 유엔 및 IAEA 등 국제기구가 위치한 유엔본부 (뉴욕, 제네바 등과 함께)가 있어서 다자관계는 영어로, 양자관계는 독일어로 외교활동을 해야 하므로 2개 국어의 구사는 필수였다. 영어와 독일어를 모두 요구하기에 45세의 늦은 나이에, 다시 정보학교 독일어 과정과 서울 남산에 있는 ‘괴테 (독일) 문화원’ 고급과정을 수료하고 오스트리아로 향하였다.


장차, 군사외교관이 되고자 하는 이는 바로 이런 다중 언어 사용에 주목해야 한다. 대부분 타국 군사 외교관도 영어는 물론 주재 국어에 능통하였다. 그런데, 필자가 무관으로 6년간 주재국 2개국, 겸임국 3개국 등 5개국을 방문하면서 느낀 것은, 필자가 근무한 5개국에는 모두 중국 상주 무관부가 있었는데 이들 상주 무관 모두가 주재국 체류 경험이 8-20여 년으로써 주재 국어 구사능력들이 매우 출중하였고, 영어 또한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일본 무관도 적어도 해당국의 지휘참모대를 졸업한 현지어 구사 요원들이어서, '영어 하나만이라도 똑바로 하면 된다'는 우리의 목표가 너무 순진(?)하게 여겨졌다.


필자가 비록 학창 시절 독일어를 배웠고 정보학교 독일어 과정과 괴테 독일문화원을 수료하였지만, 그 정도로는 실무에 충분치 못하였다. 물론, 대부분 주재국 고급장교들이 영어를 잘하여 중요한 업무는 영어로 처리한다고 하더라도, 유럽의 전통적인 강국들은 거의 모든 국정보고를 자국어로 해주기 때문에 주재 국어를 잘 못하면 2류 외교관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우리 대사관 직원들도 아침마다 1시간씩 독일어 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대사관 교육 외에 대사와 우리 부부는 현지인 강사로부터 1년 간을 더 개인교습을 받았다. 영어를 하더라도 주재 국어를 못하면, 비단 공식 외교단 행사뿐만이라 사적인 모임이나 여행 등에서도 많은 불편을 느낀다. 


언어 못지않게 국제감각도 필수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대한 체험이 필요하다. 물론, 한국식으로 한다 해서 현지에서 안 통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려움이 있다. 언어 못지않게 국제감각은 식당에서 밥 먹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필자는 다행히, 미국에서 오래 근무한 덕분으로 별 부담이 없었다. 다만, 와인은 늘 조심스러웠고...  


무관에 대한 대사의 배려

재외공관의 대사는 '대통령 특명 전권 대사'라는 공식 직함으로, 문민 외교관과 군사외교관의 보좌를 받으며 외교와 안보라는 국가이익에 전념하는 직책이다. 그러므로, 대사가 무관을 잘 활용하면 자신의 업무가 더 빛이 난다. 대사로 모셨던 반기문 대사 내외분은 무관과 무관 부인의 활동에 각종 배려를 세심하게 하여 주셨다. 대사의 이런 배려는 무관의 위상은 물론,  군사외교활동에 많은 도움을 준다. 특히, 과거 오랜 시간 군부의 영향력에 강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오스트리아에서는 더욱 그랬다. 반 대사는 오스트리아 대통령에게 신임장 제정 행사 등 많은 주재국 행사에 무관을 대동하였는데, 그의 생각은 적중하였다. 군복을 입고 그를 보좌하는 무관으로 인해 그의 위상이 훨씬 돋보이고, 국력까지 과시하였다. 대사의 착안 하나가 상황을 바꾼 전례이다. 


그래서인지, 반 대사는 오스트리아 내 먼 지역의 조그마한 행사에도 무관을 항상 대동하였다. 한때나마 유럽에서 최강의 군사강국이었던 향수가 보수적인 시골로 갈수록 더 강할 수밖에 없다. 대사는 이 점을 잘 짚었던 것이다. 리셉션 행사에 초청된 많은 주재국 인사들과 인사하는 동안, 한국 대사 내외 옆에 군복을 입고 리시빙 라인에 서있는 한국 무관을 보고 우리의 국력에 대해 재평가를 하였을 것이다. 이는, 행사 후에 행사장 분위기를 전하는 동행한 외교부 수행요원들의 평가였다. 사실, 무관부 운영은 많은 비용이 들어 웬만한 나라는 무관부 운영이 어렵다. 당시, 오스트리아에는 아시아권 무관으로는 한, 중, 일 3개국밖에 없었다.


(주)오스트리아 한국 대사관 전경

오스트리아 대사관은 재외 10대 공관에 속할 만큼 큰 공관이다. 그리고, 이처럼 비교적 큰 대사관에서 근무할 때는, 대사관 타 동료들과의 인간관계 형성이 매우 중요하다. 필자도 관련해서 많은 선배들의 조언을 들었고 나름 긴장하면서 적극적이고 협조적인 자세를 유지하였다. 그 결과, 근무기간 내내 매우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유익한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물론, L 모 대사 같은 분은 한때 군사독재 시절 군출신으로부터 핍박을 당한 좋지 않은 기억이 있어서 인지, '군인 싫다'며 무관의 부임 인사를 외면하는 등 속 좁은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몇 개 월지나, 후임으로 나중에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한 반기문 대사가 부임하였다. 또, 외교부 C 공사와 다른 정부 기관에서 파견 나온 L 공사도 모두 고교, 육사 선배인 데다가 국제기구를 담당하는 외교부 Y 참사관까지 고교 동기였다. 무슨 학연을 내세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상황이 그러다 보니 이런 조직구성원과 같이 일하니 업무에 많은 도움이 되었던 건 사실이다. 어쨌든, 그런 관계를 떠나서 같이 있었던 동료들이나 그 가족들이 하나같이 인품도 좋았고 친절해서 정말 좋은 분위기에서 공관 생활을 잘 보내었다.  


이렇게 좋은 분위기였지만, 대사관에는 여러 부서 파견자들이 함께 근무하기에 사소한 갈등은 있기 마련이다. 필자가 느꼈던 것은, 우리 국방부 문화와 외교부 문화 간의 약간 상이한 점을 이해하고 항상 ‘나의 방식’이 아니라 ‘그들의 방식’으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당시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직급도 서기관인 H 모 서기관에게 필자는 별생각 없이, 군에서 장교가 민간인 직원에게 하던 대로 "000 씨"라고 호칭하였는데, 뭔지 모르게 좀 어색한 분위기였다. 얼마 지난 뒤에 고교 동기인 Y 참사관이, “그렇게 부르지 말고 'H서기관'으로 불러라.”라고 충고를 해 주었다. 이름 불린 당사자가 엄청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자부심이 강한 외무고시 출신들은 그런 호칭 문제에 매우 민감하니, 이런 각별히 신경 쓰고, 꼭 참고했으면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나이와 직급에 따른 의전 문제인데… 외교부는 대통령 행사로부터 기타 정부 행사에 이르기까지 의전을 담당하는 주무부서여서 인지, 대사관 내 직원들조차 서열에 따라 전화번호가 부여되고, 식사할 때 자리마저 정해진다. 필자의 부임 얼마 뒤, 타 기관에서 나이 많은 C참사관이 부임하였다. 그는 직급 위주인 조직 문화에서 직급보다 나이를 내세워 모두가 불편해했던 기억이 있다. 나이를 들이미는 게 우리가 갖고 있는 독특한 문화이긴 하지만, 공직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무관 교육을 받을 시, 다른 공관에서 국방무관이 타 부서 직원과의 직급이나 나이 문제로 인해 불협화음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해주며 각별한 주의를 환기시켰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모두가 국익을 위해 함께 뛰는 동료들이니, 어떤 경우든 갈등을 최소화해야 한다.   


반 대사님은, 부하 직원들에게 여러 가지로 세심하게 배려해 주신 분이다. 그의 리더십은 우리 군에서 하는 것과 달랐다. 일화를 하나 소개하면, 부하 직원에게 뭔가를 물었을 때, 그 직원이 답변을 못하고 우물쭈물하면, 오히려 대사님 자신이 얼마나 미안해하는지… 괜스레 어렵고 불필요한 질문으로 상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는 마음 때문이었나 보다. 그리고, 얼마 후에 어쩌다 그 직원에게 다시 다른 질문을 하였을 때 또 우물쭈물해도 마찬가지로 미안해하면서 웃어주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두 번 다시 묻질 않고 스스로 답을 찾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문제였던 것 같다. 질문을 받고 답변을 못했던 직원은 그날부터 스스로가 자기의 직무에 대해 얼마나 정진하는지… 결국, 참사관급 2명이 스트레스와 과로 탓인 듯 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고함이나 야단이 아닌 웟분이 미안해하는 리더십’에 고인들이 부하 직원으로서 너무 큰 부담을 가졌던 것일까..?     


그런 불상사(?)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모두 열심히 하였다. 그 인연으로, 귀국한 후에도 필자를 포함한 우리 대사관 직원들은 반 대사님이 외교부 장, 차관을 거쳐 유엔본부로 가실 때까지 지속적으로 친교 모임을 가졌었다. 귀국 후에 필자가 그분을 위해 해 드리 것이라고는, 일선 연대장으로 재직 시, 이 모임의 사모님들을 위해 ‘판문점 안보 투어’를 시켜드린 것이 전부였지만, 그런 사소한 것에도 정부의 고위 관료 사모님들은, 안보현장을 처음 보았기 때문인지 모두들 매우 감사하셨다. 대사님은 장관으로서 후에, 이집트를 방문하실 때도 필자를 찾아 주셨고, 그 뒤에도 파키스탄에서 유엔 평화유지군이던 필자에게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현지 대사를 통하여 개인 격려 서신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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