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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Jan 24. 2023

우리 국민 피랍과 이라크 파병 뒷 이야기

어느 군사 외교관 이야기 (이집트, 제15화)

미국의 이라크 침공

허둥대던 우리 국민 피랍 사건 대처 

우왕좌왕 한국군 파병지 선정 



허둥대던 우리 국민 피랍 사건 대처

2003년 3월 20일 드디어, 미국이 '대량살상 무기'를 제거한다며 이라크를 기습적으로 침공하였다. 이후의 이라크 정국은 미군에게 우세하게 전개되었지만, 명분 없는 불법침공으로 종국에는 실패한 전쟁이 되었다. 그리고, 그 부작용이나 후유증의 한 단면으로 혼란의 와중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설쳤다.

정국이 불안정한 나라일수록 재외 공관의 가장 큰 의무는 자국민 안전 보호이다. 과거 몇, 몇 이슬람 지역에서 몇 차례나 우리 국민이 납치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외교부는 매번 ‘워낙 이런저런 부족 (部族)들이 산재해 있어서…’라거나, ‘해당국 관련기관이나 단체와 접촉하고 있다’라는 둥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자, 당시 한국도 우방의 요청에 따라 파병을 고려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게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자극한 것일까? 2004년에 이라크에서 우리 국민 ‘김 선일’ 선교사 피랍 및 참수 사건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우리 외교부는 피랍된 우리 국민을 구출하기 위한 현지 유력자 확보에 애를 먹었다. 납치단체와의 협상은 불가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진 국회 청문회에서 드러난 사실에 따르면, 주재 교포들에 대한 현지 공관의 외교적 노력은 다소 미흡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라크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참수 공포(출처: 인터넷)

피랍 사건이 터지자, 긴급한 상황 속에서도 이라크 정부 주요 인사들과 접촉은 어려웠다. 우리 외교관이 설령 친미 세력으로 새롭게 물갈이된 주재국 정부 관리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공식, 비공식적으로 많은 교류를 한다고 하더라도, 납치 세력과 반대편에 서 있는 이들 정부 인사의 도움은 실질적으로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최소한의 정보는 공유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나마 그마저도 없었던 게 현실이었다.  


당시 이라크 내에서 당장 의지할 외교채널이라고는 지금껏 만났던, 영어를 구사하는 일부 현지인이나, 주재국 외교단 행사에서 자주 만났던 미국이나 서구의 외교관밖에 없었다는데… 과연, 그들로부터 필요한 정보를 우회적으로 나마 수집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럴 때 사용하는 적절한 표현이 ‘연목구어 (緣木求魚)’가 아닐까? ‘김 선일’ 피랍 사건으로 모두가 우왕좌왕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우리 외교의 비능률성이 드러난 셈이다.


2004년 ‘김선일 선교사’ 참수 사건과 이라크 파병 건으로 인해 한국인 신변안전을 위해 노심초사하던 정부는 고심 끝에, 동 년 7월 ‘압델라’ 요르단 국왕을 국빈 초청하였다. 이라크와 인접한 요르단은 이슬람 수니파로, 이스라엘은 물론, 팔레스타인, 사우디 아라비아, 시리아, 이집트, 레바논 등과 접경하고 있지만, 친서방, 친 이스라엘, 친미국가이다. 게다가, ‘압델라’ 국왕은 왕자 시절 요르단 공군 장교로서 헬기를 조종하며 미국 NBC-TV ‘앵커 우먼’을 태우고 자국의 ‘페트라’ 관광지를 소개할 정도로 개방적인 인사였다. 참고로, 이 장면이 미국 TV로 고스란히 중계되자 ‘페트라’는 일약, 세계적인 관광지로 떠올랐다. 그의 통찰력을 보여 주는 한 예였다.

요르단 관광지 페트라 입구의 돌조각 

한국-요르단 양국 정상 회동에서, 우리 측이 이라크와 관련된 정보 교류를 요청하였다. 그러자, 요르단 국왕은 요르단에 한국 측 무관부를 개설하도록 제의하였다. 청와대와 정부는, “요르단에 상주 대사관이 있는데… 무관부라니?” 다소 뜻밖으로 생각한 것 같다. 현지에서 군인이 갖는 비중을 몰랐던 탓이다. 어쨌든, 이집트에서 요르단을 겸임하던 필자는 상주 무관부 개설을 위한 본부 지시를 받고자 급하게 출장으로 귀국하였다.


국방정보본부는 요르단 합참차장의 요청으로 ‘정보교류회의’를 함께 준비하였다. 요르단 군도 즉각 반응하였다. 이라크 상황이 점점 꼬여갔기에, 우리는 요르단을 통한 정보수집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있었고 웬만큼 성과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눈에 띄지 않게 공관과 무관부를 지원해 준 사람이 있다. 그는 오래전에 태권도 사범으로 파견되어 고위 장교들을 지도하며 현지화된 KOICA(국제협력단) 전 직원이다. 국왕 동생인 공군사령관은 물론, 당시 합참차장도 그로부터 태권도를 연수하여 모두 유단자가 되었다. 남다른 애국심을 지닌 그의 주선으로, 이들은 과거에 한국을 수차례 방문한 적도 있었다. 무슬림들도 진심으로 대하면 진심을 느낄 수 있다.


국왕의 관심과 친한 인사들 덕분에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잘 진행되었다. 요르단 대사관은 무관부 개설식과 ‘한국의 날’ 행사 리셉션을 동시에 가졌다. 행사에는 합참차장 등 많은 요르단 고위 간부들이 대거 참석하여 출발은 매우 좋았다. 하지만, 한국 측의 접근방법은 약간 아쉬웠다. 우리 국방부는 특정 군 장교를 요르단 무관으로 선발하였다. 선발 자체를 뭐라 하는 건 아니지만, 만약 국방부의 고려사항이 ‘육, 해, 공 및 해병대 각 군 간의 해외 파견 무관 인원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정부 고위층의 관점과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국민이 납치, 피살당하였는데 아무 조치를 취하지 못해서 나온 후속적인 비상 대책이었다. 어느 군의 누구든, 상관없지만 군별 '나누어 먹기'라는 의심이 있었다면 문제다. 국방부 전체에서 아랍어 가용자 중 최적임자를 선발해야 되는데 특정 군에서만 뽑으니 경쟁 범위가 제한되었다. 또한, 선발 기준도 아랍어가 아니고 영어였고... 물론, 아랍 국가에도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주 임무가 정보 수집이라면 현지어 능력과 문화이해가 필수적이다. 그러다 보니, 여러 말들이 나왔다. 도대체, 무엇이 안보나 국가 이익보다 우선일까...?


우왕좌왕 한국군 파병지 선정 

이라크 전쟁이 이어지자, 연일 계속되는 전황보고와 함께 현지민들의 반미 분위기도 보고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결정된 한국군 파병지 선정과 관련하여 필자는 수 차례 한국군 파병불가를 건의하였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NSC(장: 이종석)는 파병을 밀어붙였다. 그런데, 파병지 선정은 어쩌면 그렇게 위험한 곳만 골라 주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불가하다. 아마도, 미국이 필요한 곳(그만큼 위험한 곳)을 추천해 준 것이라 생각되지만. 도대체 현장 분위기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사실, 한미동맹 차원의 파병은 언제나 모든 논리를 압도하기 때문에, 미국 측 요구를 한국이 거절할 수 없다는 일종의 무저항 의식이 작동한다. 그래서, 군대 파병시에는 해당지역 분쟁에 대한 이해나 접근방식보다, 미국 측 요구에 따라 파병지를 정하는 경향이 있다.


경계 중인 이라크 '자이툰' 부대 병사

당시 중동지역에 파견된 무관부는 아랍지역은 이집트와 S국 등 2개국뿐이었고, 주변 지역에  I국, T국 등이 있었으나, 현실적으로 이집트외에 이들 3개국에게는 파병이 별다른 관심이나 현안 거리가 아니었다. 어쨌든, 최초 한국군 파병지로 고려되었던 이라크의 ‘나시리야’는 중부지역 최대의 시아파 성지였고, 이태리 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우연인지, 한국군 파병 발표 직후 이태리 군에 대한 테러가 감행되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이태리 군은 황급히 철수하여 버렸다. 


이렇게 되자, 정부는 다시 ‘키르쿠크’로 파병지를 바꾸었다. 파병지가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필자가 합참 작전본부의 K 모 부장께 “왜 그곳입니까?” 물으니, 그는 거기가 중동 최대의 석유 매장지라서 란다. “아니, 우리 군의 안전보다 무슨 석유 때문에…? 거기는 인종의 모자이크 지역이라고 불릴 정도로 시아, 수니, 쿠르드, 기독교 등이 모여 살며 서로 테러공격을 가하는 그야말로 중동의 화약고인데요.”라고 강변하였다. 사실, 그곳에 주둔하던 미군 1개 여단은 밤낮 주야로 반군들의 공세에 시달렸다.


그 탓일까? 얼마 후 합참은 파병지를 다시 미국에 우호적인 쿠르드족이 우세한 ‘아르빌’로 파병지를 바꾸었다. 그야말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인 셈이다. 최종적으로 아르빌에서, 한국군 '자이툰' 파병부대는 지역 안정화와 재건지원에 중점을 두고 수년간 체류 후 인명 손실 없이 동맹국으로서 생색을 잘 내고 완전히 철수하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현지 정세에 민감한 지역 무관들의 의견을 참고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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