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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Jan 22. 2023

십자가와 초승달

어느 군사외교관 이야기 (이집트, 제14화)

십자가와 초승달의 유래 

정복과 선교를 위한 양대 신성(神性)의 대립

역사를 뒤바꾼 십자가와 초승달의 전쟁



십자가와 초승달의 유래 

서구의 역사를 돌아보면 기원이래 역사의 주축은 기독교였다. 하지만, 기독교도 처음에는 그냥 종교일 뿐이었다. 그런데, 예수 탄생 이후 약 300여 년이 지난 후에, 로마제국에 의해 종교로 ‘공인’(밀라노 칙령, AD 313) 되었고, 이어 로마의 ‘국교로 선포’(AD 392)되면서 종교가 국가권력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미 갖추어진 국가 틀에 종교가 뒤늦게 들어왔다. 


이제, 로마의 국교로 선포된 기독교는 로마제국처럼 제국 안에서 또 하나의 제국이 되었다. 로마의 황제처럼 교회에도 교황이 생기고, 로마의 귀족처럼 교회에도 대주교, 주교 등의 계급도 생겼다. 또한, 로마의 법전처럼 수많은 교회의 법률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달라진 모습은 국교가 되면서 종교는 ‘선교의 명분’으로 군인과 더불어 ‘정복의 역사’에 나서게 되었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로마라는 ‘제국의 틀’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섬김과 나눔’의 종교라기보다 ‘승리의 십자가’를 추구하는 종교가 된 셈이다. 그리고, 종교가 무력을 앞세우며 선교의 길에 나서는 모양새는, 로마 멸망 이후에도 그 뒤를 이은 게르만족에 의해 여전히 로마처럼 제국의 힘을 빌려 정복 전쟁에 나섰다. 

‘십자가 문양’을 그려 넣은 방패들

로마제국 이래, 1천여 년 동안 기독교는 대부분 중세 봉건 왕국의 국교로 자리 잡았으며, 영국, 덴마크, 그리스 등 서구 국가는 그들의 국기에 ‘십자가 문양’을 새겨 넣었다. '십자가'문양은 로마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막센티우스'와의 전쟁(AD312) 때, 로마 군의 방패에 그려 넣었던 것이 그 시초였다. 

 

첨탑 위의 초승달과 밤하늘의 초승달  

한편, 기독교보다 약 600여 년 이후에 탄생한 이슬람은, 이미 ‘제국의 틀’을 갖춘 로마 기독교를 많이 닮았다. 이슬람은 창시와 동시에 종교 자체가 바로 군사력을 갖춘 국가권력이었고, 종교의 확장을 위한 포교활동은 끊임없는 전쟁과 정복으로 이어졌으며, 그 결과 불과 100여 년 만에 곧 거대한 제국의 건설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 제국에서는 '정교일치'로 종교가 삶의 전 영역을 포괄하여 초기 무슬림 사회에서는 종교와 정치 간의 구분조차 없었다. 


 

초승달이 들어간 국기들

이들이 초승달을 상징물로 사용하는 것은,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무슬림들은 부인하지만, 모함마드의 출생인 '꾸라이쉬' 부족이 숭배하던 달 문양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초승달이 상징하는 밤은 무더운 중동에서 밤시간의 시원함은 인간의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사막지역에도 밤이 지나면 초목에 물(이슬)을 맺히게 하여 유목인들에게는 농경민족의 태양과 같은 존재였다. 이런 연유로,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라면 초승달은 이슬람의 상징이다. 영국 등 많은 서구의 기독교 국가가 그들의 국기에 십자가를 그려 넣듯, 이슬람도 터키, 튜니지아, 파키스탄 등 16개 이슬람 국가가 초승달을 국기 속에 그려 넣었다. 이처럼, 이슬람의 상징인 초승달은 전체 이슬람 국가기관과 종교의 상징물로 광범위하게 애용되고 있다.  

               

함께 구호활동을 하는 적십자사와 적신월사 요원들

예컨대, 국가기관과 모든 이슬람교 사원 첨탑도 이 문양으로 장식하여 이슬람 국가의 정체성을 상징하고 있으며, 전 세계 ‘적십자사(Red Cross)’의 이슬람 지부는 적십자 대신 적색 초승달(새 달)을 그려 넣고, 명칭도 ‘적신월사(赤新月社: 붉은 초승달 기구, Red Crescent)’로 쓴다. 당연히, 응급차 앰불런스에도 '적십자' 대신 '붉은 초승달'이 그려져 있고... 



정복과 선교를 위한 양대 신성(神性)의 대립

모함마드가 이슬람을 창시한 이래, 그의 추종자인 ‘정통 칼리프’ 시대에는 이슬람을 믿는 아랍 세력이 급격히 팽창하여, 아랍계 세습 ‘우마이야’ 왕조(AD661-750)가 득세하였다. 그러나, 이어 건국된 ‘압바스’ 왕조(AD 750-1258, 1261-1517)는 이슬람 내 아랍계와 비아랍계가 더불어 사는 ‘무슬림 평등’ 원칙을 확립하여, 사실상 ‘아랍’이 몰락하고, 비아랍계의 ‘이슬람’으로 진화하였다. ‘압바스’ 시대는 비록, 칼리프와 술탄 간의 세력다툼은 있었으나, 두 제국 모두 이슬람이 지배하는 사회로 이슬람은 항상 이들 제국의 중심에 있었다. 


이슬람은 먼저 발전한 유대교와 기독교의 영향으로 그 종교적인 신앙방식은 유대교나 기독교와 매우 유사하다. 다만, 이슬람은 종교가 사회생활 전반을 망라한 삶의 생존 양식을 가르치므로, ‘내세와 현세를 동일하게 여기면서도, 현세의 삶을 중시’하고, ‘신앙과 실천의 세계’를 주요 관심사로 보았다. 이는, 세속과 종교의 영역을 구분하고 내세관이 뚜렷한 서구 기독교의 가치관과 본질적으로 다르며, 문명의 성격도 대립적이다.


'비엔나'나 ‘카이로'에서 각각 국교로 믿는 기독교나 이슬람은 둘 다 일신교라는 측면에서는 같지만, 이들 유일신교는 자신이 믿는 신 이외의 모든 존재를 부정하므로, 모든 사고를 ‘우리’와 ‘그들’이라는 양방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종교만이 진실하고 유일한 신앙이니 모든 인간이 추종해야 하므로, 이교도를 자신의 참다운 종교로 개종시켜야 할 의무라며, 두 종교는 정복과 선교에 커다란 비중을 두었다. 이 때문에 성경(구약)과 꾸란은, 정복과 선교의 수단인 ‘전쟁’을 주요 이슈로 보면서도, 모두 자유, 평등, 박애 사상을 강조한다. 이는, 자신의 신앙을 강조하는 보편주의 측면이다. 바로 이 부분이 꾸란과 성경 이해에 꼭 유념해야 한다.


예컨대, 기독교가 말하는 보편적 소망은 자기 종교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자유, 평등, 생명을 전하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이 소망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믿는다. 다시 말해, 자유는 억압으로부터 해방이고, 평등은 차별로부터 해방이며, 생명은 영속성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모든 민족이 염원하는 가치의 대상을 하나님 안에서 이루는 것이 기독교인이 주장하는 보편성이다. 


반면, 이슬람적 보편성은 알라’()을 같이 믿는 무슬림 형제에게는 한없는 관용을 베풀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이교도는 개종시키거나,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이슬람은 ‘무슬림의 세계’를 꿈꾸는 편협성을 보이는데, 이는 모함마드가 초기 ‘메디나’에서 머물 무렵, 유대교인과 잦은 접촉을 하는 동안, 이방인을 배척하는 유대교도의 ‘선민의식’을 모방하여, 선민의 대상을 이슬람교도로 바꾼 것이 아닌가?”라는 견해도 있다.


역사적 사실에서 보듯이, 로마의 국교가 된 기독교는 로마의 힘을 빌려 정복 전쟁에 나섰고, 이슬람도 창시 초기부터 정복을 통하여 교세를 넓혔다. 때문에, 전쟁이 선교의 영역이며 교세 확대를 위한 주요한 수단이 되었으니, 이슬람이 발흥하자 이 둘 간의 충돌은 어찌 보면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역사를 뒤바꾼 십자가와 초승달의 전쟁

첫 번째 충돌은, ‘십자군 전쟁의 중심이 된  예루살렘이었다. 이슬람은 창시 이후 계속 확산되고, 급기야 ‘예루살렘’을 차지하자, 이 지역에 대한 기독교 순례자의 진입을 통제하였다. 기독교인은 기독교 발상지인 ‘예루살렘’에 대한 성지 순례를 종교적인 의무로서 순례하였지만, 이슬람은 자신의 성지라며 기독교인의 출입을 불허하였다. 


‘예루살렘’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지이기도 하지만, 이슬람에게는, 메카나 메디나와 함께하는 3대 성지로서, 아브라함과 예수 등 여러 선지자의 활동 무대였으며, 예언자 모함마드가 이곳에서 천상에 다녀왔다고 전해지는 각별한 곳이다. 순례자의 길이 막히자, 기독교는 서구의 각 영주에게 ‘이슬람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예루살렘을 탈취하라’는 교황의 명령으로, 11C 말- 13C 말까지 약 200여 년간 8차례에 걸쳐 ‘십자군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서구와 아랍의 전쟁이었다. 전쟁 초기에는 ‘카놋사의 굴욕(AD 1077)’에서 보듯이, 종교적 권위(신권-교황)가 세속적인 권위(왕권)를 압도하였지만, 십자군 전쟁 중 자행된 무차별한 학살과 인신매매 등 범죄행위와 ‘십자군 전쟁’에서의 패배로 민심은 신권을 떠났고, 결국 왕이 교황을 내쫓아 가두는 ‘아비뇽의 유수(1309-1377)’로 이어져 서구의 신권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한편, 이슬람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배하던 술탄인 ‘살라딘’이 1187년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십자군의 왕을 사로잡았지만, 그동안 약탈과 살인을 자행했던 십자군과는 달리, 패배자들이 떠날지 남을지 선택하게 해 주었다. 서구는 그의 관용성에 놀랐지만, 성경에도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구절이 있다. 하지만, 이슬람은 정복한 지역 주민을 학살하지 않는 것이 그동안의 관행이었다. 

그렇지만, 그 이후에도 십자군 전쟁은 8차례나 계속되어 아랍인의 가슴속에 깊은 증오심으로 남아있어, 지금도 ‘기독교와 십자군’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이 많다. ‘살라딘’ 사후에 이어진 십자군 공격은 모두 실패하였다. 이런 연유로 지금까지 아랍 무슬림은, ‘살라딘’을 알라 신의 은총으로 서구를 이긴 이슬람 세계의 해방자이며, 구원자로 추앙하며, 서구세력이 이슬람권에 개입할 때마다 ‘살라딘’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고 외친다.


다음 충돌은, ‘오스만 터키’의 술탄의 ‘매흐매트 2세’에 의한 ’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이었다. 1453년, ‘매흐매트 2세’는 2달여에 걸친 공성전에서 역사상 최초로 대포를 동원하여 1,000년 제국의 견고한 성벽을 깨뜨리는 한편, 흑해 상의 함선을 육로로 이동시켜 ‘콘스탄티노플’ 항구로 진입하였다. ‘베네치아’에서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연합군을 결성하여 동로마를 지원하려는 회의도 하였지만, 천주교와 다른 ‘동방 정교’라는 서로 다른 지파여서일까? 그들의 지원은 없었다. 

공성전에서 대포를 동원한 이슬람 군 

이슬람과 기독교(지파인 동방 정교)와의 전쟁에서 다시 무슬림이 승리하였다. 대포가 성벽을 이긴 것은 포신 길이 8미터, 포구 구경 0.5미터의 거대한 대포 덕분이다. 무슬림은 정복지의 기독교 성당에서 몰수한 큰 종들을 녹여 대포의 포환으로 사용하였다. 중세의 철옹성은 대포와 화약에 무력화되었다. 이처럼, 뛰어난 지략으로 ‘오스만 터키’는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발칸반도 등 유럽의 1/3과 중동과 북아프리카 일대를 지배하여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동시에, 동로마 제국의 경제적-문화적 풍요를 물려받았다. 뿐만 아니라, 승승장구하던 이슬람권은 한때 금을 제조하겠다며, ‘연금술’까지 지향하였다. 하지만, ‘슐레이만’ 대제(1520-1566) 이후 정치적 침체기를 맞았고, 점점 과학과 기술문명의 발달에도 무심하였다. 


십자군 전쟁의 패배와 동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서구는 어쩔 수 없이 이 지역과 실크로드를 포기하고 멀리 대서양을 거쳐 해양으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 동로마를 통해 들어오던 소량의 향료 등 동방의 풍요로움은 서유럽 지배층에게 보물 취급을 받았지만, 공급이 끊기자 해상무역으로 이를 충족하려 했던 것이다. 1492년, 때마침 발달한 항해술 덕분에 인도로 향한 동방 무역을 추구하며 ‘대서양’으로 진출하고, '대항해 시대'로 서인도 등 신대륙을 발견하고 영역을 확대하여 결과적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1683년은 서구의 역사에서는 매우 의미 있는 해였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세 번째 대결은 서구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서 벌어졌다. 발칸반도에서부터 치고 올라온 이슬람군이 ‘비엔나’까지 진출하자, 전 서구 기독교 사회가 공포에 떨었고(‘이슬라모포비아’), 이슬람은 한껏 서구에 대한 우월을 과시하였다. 공포에 떨던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서구 기독교(구교) 연합군과 함께 ‘비엔나’에 진입한 터키군을 물리치고, 퇴각하는 터키군을 추격하여, 발칸반도의 상당한 영토까지 확보하면서 서구는 안정을 되찾았다. 250여 년 전 무슬림과의 전쟁에서 동로마를 외면하였던 것과 달리 기독교도가 결속하였다. 패배의 총격 때문일까? 이슬람은 1683년 패퇴 이후부터 계속 밀리는 형세가 되었다. 

터키군의 '비엔나' 포위전

1757년, 인도에 주둔하던 영국 군대가 이슬람군을 물리쳤다. 1798년에는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그리고,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스 산맥으로 진출했고, 네덜란드는 일찌감치 인도네시아로 진출하였다. 서구를 압도했던 이슬람이 점점 약해지는 동안, 서구는 18세기 이후, 산업혁명과 기술의 발달로 생산력이 크게 증가하고 급속한 경제성장과 발전을 거듭하면서 서구와 이슬람 세계의 힘의 균형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이후, 서구와 무슬림의 대립은 세계 각 분쟁지에서 계속되었지만,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극에 달했다. 결국, 이스라엘과 이집트, 요르단은 4차례의 전쟁 끝에 미국의 중재로 극적인 화해를 이루고 평화를 얻었다. 하지만, 이라크에서는 '사막의 방패'와 '사막의 폭풍'이라는 이라크 1, 2차 전쟁이 벌어져 미국의 공격으로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었다. 그렇지만, 9.11 사태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아프간 '탈레반'을 압박하던 미국은 20여 년 간 전쟁을 치르고도 엄청난 상처만 남긴 채 자진하여 철수하여 버렸다. 서구와 이슬람의 대립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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