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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Dec 08. 2022

문화충격과 국제관계

어느 군사외교관 이야기 (미국, 제2화: 국방언어학교)

처음 느낀 문화 충격

영어공부와 문화체험 프로그램

국제 문제에 눈뜨다

한국의 미 용산기지 이전제의 와 미 8군의 임무 전환

처음 접한 무슬림

장교의 자존심



처음 느낀 문화 충격

외국에 가게 되면 제일 먼저 겪는 게 '시간'과 '언어'의 차이이고, 서로 다른 문화나 생활의 차이에 대한 이질감도 경험한다. 1980년대는 세계 경제는 일본의 전성기였다. 필자는 미국 유학을 위해 제일 먼저, 미국 국방 언어학교에 입교했다. 텍사스주 '샌 안토니오'(San Antonio, TX)에 도착한 첫날 (토요일) 호텔에 체크-인하자 종업원이 "곤니치와"라고 인사한다. 당시의 미국인들에게 동양인은 일본인으로 간주되었던 모양이다. 아마, 1990년대라면 중국인이 많이 와서  "니하오"였을 것이다. 지금은 워낙 동양인이 많으니 그냥, "하이!"라고 하지만...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었다. 저녁 8시쯤, 호텔에서 본 첫 TV 방송은 “This Week in Japan” -  이번 주간 일본 상황을 종합한 뉴스였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니 유사한 방송을 두어 개 더 발견되었다. “세상에, 미국인의 토요일 저녁 프라임 시간대에 온통 일본 이야기라니…?”


미국의 첫인상은 “넓다, 풍요하다, 다인종이다, 친절하다” 등등 사람에 따라 다양하겠지만, 필자는 미국에 오기 전 한미 연합부대에서 2년간 미군들과 합동 근무를 경험한 터라 미국에 와도 크게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그저, “우리보다 잘 사네 정도..?” 그런데, 우연히 만난 현지 미국인이 보여준 일본 호감도는 생각지도 못한 미국의 첫인상이었다.  다음 날, 호텔 수영장에서 잠시 쉬는데, 5, 6세 정도인 예쁘장한 미국인 꼬마 소녀가 다가와서는 “너 일본인이냐? 나는 오사카 성에 가고 싶다”며, 재잘거렸다. ‘한국인’이라 해도 아이는 동양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일본인으로 대하였는데, 곧이어 다가온 아이의 부모도 똑같은 질문을 하였다가, '한국인'이라 하자 “아, 그러냐” 며 얼른 자리를 떴다. 당시에는 한국 하면 거의가 한국전쟁을 떠 올렸으니… 어쨌든, 일본의 위상이 컸던 것 같다.      


사실, 달러가 넘쳐나던 당시의 일본은, 정부나 토요다, 혼다 등 대기업들이 앞 다투어 미국 내 주요 도시에 일본식 정원이나, 문화원, 박물관 등으로 후원이나 기부하며 일본 문화 알리기에 적극적이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일본 문화나 제품에 대한 인지도나 신뢰는 정말 대단하여, 가난한 유학생인 필자조차 일본 중고차에 관심이 많았을 정도였다… 그즈음, 한국의 수출품은 신발, 옷, 라디오 등 경공업 제품 위주였다가, 1986년 말쯤에, ‘포니 엑셀’이라는 한국 현대자동차가 미국에 상륙하였다.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한국이나, 중국 기업도 미국의 각 도시에 많은 기부 등 여러 가지 후원을 아끼지 않지만, 당시의 “일본 문화 알리기”는 가히 독보적으로 보는 이의 부러움을 자아냈다. 한 문화에 대한 선호나 경도 현상은 다른 분야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국이 ‘일본 위안부’ 문제를 제기했을 때, 미국 조야에는 친일본계 정치인이 많았다. 때문에, 미국 측 인사들은 '혈맹'이라는 우리보다도 ‘일본 감싸기’가 적지 않았다. 


80년대 후반, 3년 간 유학을 마치고 귀국 길에 들른 하와이 민속촌에서, 뜻밖에도 일본의 어느 현에서 온 초등학교 학생 수학 여행단과 마주친 적이 있다. 버스로 열몇 대나 되는 대규모였는데, “아니, 일본 시골 초등생들이 수학여행을 하와이로…?” 당시, 하와이의 주지사도 일본계 미국인이고, 일본인 ‘사탕수수’ 농장 이주자도 많은 돈독한 관계였다고 하지만, 한국은 달러 절약을 이유로 “세계 여행 자유화” 조치가 시행되기 전이라서… 그들의 때 이른 '국제화'에 놀람은 더욱 컸다.  


영어공부와 문화체험 프로그램

미국 유학과정에 선발되자, 바로 한/미 연합 야전사를 떠나서, 6개월 과정의 종합행정학교 유학 장교반 (현 국방 정보학교 어학처)에 입교하여 영어를 공부하였는데, 이때의 집중적인 훈련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당시, 유학을 앞둔 장교들은 대략 20여 명 단위로 종합행정학교의 유학 장교 과정에 편성되어, 틈틈이 출국 준비를 하면서도, 타 업무에 무관하게, 출퇴근 시에도 항상 영어를 듣고, 하루 종일 LAB에서 보냄은 물론, 기숙사에서도 원어민 강사와 함께 대화하고 영자신문을 읽고 토의하는 등 오직 24시간 영어의 생활화라는 학교의 방침에 적극 따랐던 것 같다. 이 과정처럼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영어에만 전념하는 기간이 영어 향상에 매우 유용한 과정으로 기억된다. 이렇게 힘들게 군사영어반을 졸업하였지만, 다시, 원주민과의 영어교육을 위해 텍사스 주 ‘샌 안토니오’에 위치한 미국 국방 언어학교(DLI, Defence Lanaguage Institute)에 입교하였다. 


미국 국방언어학교

DLI 과정에는 당시, 약 120여 개 국가로부터 700명의 장교가 미국 내 각종 군사학교에 입교하기 전 필요한 영어교육을 받고 있었는데, 한국군 10여 명 중에는 국방 군수 과정 등 다른 과정에 입교하려는 대령도 있었다. 우리는 유학 장교반에서 이들이 사용하는 교재인 ALC(American language Course)를 이미 배웠으니, 동일 과정을 반복한 셈이다. 어학은 반복이니까..., 수업은 선생 1인당 약 8명 정도로 편성되어 생활영어는 물론 심화과정 학습이 가능하였다.

자는 요구되는 모든 영어 점수를 충분히 취득한 터라 매주 보는 ECL (English Comhrensive Listening) 시험에 전혀 부담이 없어 편안한 마음으로, 그곳에서는 매우 적극적으로 거의 모든 문화 체험 프로그램에 참가하였다. 이들 미국 문화 프로그램은 , 미국 정부가 유학생들을 보다 확실하게  “미국화”시키기 위해서,  다양한 분야를 소개하였기에, 프로그램의 질도 높았고, 이를 통해 미국 문화에 보다 정교하고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었다. 매 프로그램에는 20-30여 명이 참가하였는데 대부분 잘 아는 사이라 몇 시간 동안 같은 버스로 여행하는 동안 편하게 잡담하였고, 수업시간에 배운 표현을 회화에 적용하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샌 안토니오 도심 운하

국방 언어학교에서 가까운 ‘샌  안토니오’는 텍사스 최대 도시 중의 하나로, 멕시코와의  전쟁의 아픔을 간직한 ‘엘라모 전투’ 등의 이야기가 얽힌 곳이었다. 이곳에는 주로 평일 낮, 당일 프로그램으로 투어가 편성되었다. 그리고, 주말이면, '샌 안토니오' 밖에, 주도인 '오스틴'이나, 달라스/포트 워스, 코푸스 크리스티, 휴스턴 NASA 등 등 많은 지역과 명소를 1박이나 2박 과정으로 돌았는데, 누군가의 안내로 미국 곳곳의 구석구석을 세심하게 돌아본다는 게 현지 문화 이해에 얼마나 효율적이었는지...! 필자는 당일과 주말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하여 '미국 알기'에 집중하였다. 그 결과, 오페라하우스, 워터랜드, 일반 가정 민박, 사슴 사냥을 위한 목장 체험투어, 래프팅 등을 다양하게 경험하였는데, 미국을 주마간산 (走馬看山) 격으로 그저 바라보는 관광보다는 철저하게 체험형 프로그램을 진행해서 더욱더 기억에 남는다. 


사슴농장에서 방목하는 사슴

사실, 교포 등 일반인은 시간적, 경제적 이유로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프로그램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예컨대, 사슴 사냥 체험의 경우, 목장에서 1박을 하는 동안 주인 내외와 같이 음식을 들며 사전에 사냥에 대한 여러 가지 에피소드 등을 나누고, 다음 날 같이 사냥에 참여하는 식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텍사스 인 특유의 자부심과 그들의 사고를 느낄 수 있었기에, 남부 텍사스 지역민 정서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중에, 텍사스 출신  '부시' 부자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들의 행동이나 발언을 이해하는데도 나름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군 유학생에 대한 이런 미 정부 프로그램은 미국에 체류하는 기간 내내 이어졌는데, 캘리포니아의 '미 해군대학원' 재학 시에도 유사한 프로그램이 있어서 다양한 모습으로 캘리포니아 사회를 경험하였다. 단지, 국방언어학교와 달리, 동행인이 대부분 외국인 학생들끼리 가다 보니 다소 엉뚱한 해프닝도 있었지만...


국제 문제에 눈뜨다.

DLI에서, 만난 많은 젊은 장교들은 하나같이 자국에 대한 자부심을 과시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갓 미국에 도착해서일까? 모두가 젊고 열정적이었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영어 실력이 시원찮으면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였다. 왕실 경호대 출신이라며, 영어가 유창했던 한 태국군 장교 (대위)는 태국왕 이름만 나오면, 갑자기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하며 ‘His Majesty”라는 바람에 구 일본군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터키군 장교(소령)는, 모여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우리는 형제 국가다. 우리의 한국전쟁 파병을 너희가 기억해 주어 감사하다. 한국에서 만든 신발과 라디오가 매우 품질이 좋다.”라는 좋은 말로 항상 친근감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필자의 생각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 있었다. 어느 날, 북한에도 갔다 온 적이 있다는 파키스탄 장교(소령)가 노골적으로 “너희  나라는 왜? 수도에, 미군 등 외국군이 주둔하느냐? 세계 어느 나라도 너희같이 국방을 남에게 의지하는 나라는 없다.”는 정치적 도전으로 일관하여 “미국과 한국은 혈맹관계이다.”라는 어설픈 표현으로 맞섰지만 얼마나 설득력을 가졌을까? 당시, 수많은 미국인은 한국이 지구상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Korea’ 하면 그저, ‘MASH(이동외과병원)’라는 드라마와 ‘전쟁’, ‘고아’만을 떠올렸는데…. 그럼에도, 이런 미국을 ‘혈맹’이라고 하였으니, 필자의 ‘친미 의식화’는 과히 수준급(?)이었다. 하지만, 당시 주변의 반응은 논쟁을 원하지 않아 그쯤에서 그만두었지만, 숙소에 돌아와서도 파키스탄 장교의 비난성 질문이 귓가를 계속 맴돌았다. "그래, 왜 서울에 미국 군인들이 주둔해야 하지..?" 지금껏 생각지 않았던 일을 그곳에서 이런, 저런 사람과 대화하며 저들의 관점에서 국제관계를 알게 된 것은 군사외교관으로서의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한국의 미 용산기지 이전제의 와 미 8군의 임무 전환


주한 미군사령부는 1945년부터 오랫동안 용산 지역에 주둔하였다. 용산 지역은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이 주둔했고, 1904년 일제가 러일 전쟁을 기점으로 ‘조선 주차군’ 사령부 주둔지로 사용한 이래 대규모 병영을 건설하여 1945년까지 주둔하였다. 해방 이후, 일본군 무장 해제를 위한 미군이나, 정부 수립 이후 창설된 국군도 용산의 이들 구 일본군 시설들을 활용하였다. 최근까지, 미 8군이 사용했던 많은 붉은 벽돌 건물 지붕에는 일본 육군을 상징하는 별 문양이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한국 육군본부는 1989년 전쟁기념관에 그 자리를 물려주고 계룡대로 이전하였지만, 주한 미군사령부나 미 8군은 2018년까지 그곳에 주둔하였다. 

미 8군이 사용하던 구 일본군 막사 (출처:서울시 용산공원 전) 사진 좌상단 원형 안은 구 일본군 상징인 검은 별 

미군의 서울 주둔은 북한의 침략 위협을 제어하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 빛과 그림자가 있듯이, 수도 서울에 주둔하는 미군으로 인해, 정치적 입장이나 위상 그리고 문화적 차이로 인한 심각한 ‘대국민 불상사(不祥事)’도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때때로, 미군의 심각한 범죄행위로 우리 국민이 피해를 입어도, 양국 정부는 ‘한‧미행정협정(SOFA)’를 근거로 개인의 문제보다 ‘혈맹’을 내세우며 상호안보협력에 주안을 두었지만, 미국도 그런 부분에 많은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재임 간 서울을 방문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용산 미군기지 순방 간에, 미군이 서울에 주둔하는 게 적절치 않은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었다. 하지만, ‘미군을 서울 밖으로 이전하려면, 이를 제기하는 쪽이 이전비용을 부담한다’는 한‧미 정부 간 합의가 있었다. 용산기지 건물들이 낡았고, 한국 정치정세 변화로 기지 이전이 필요한 미국도 이전비용 문제로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이 느닷없이 자주권 확보를 내세우며, ‘미군의 서울 이남 이전’을 제기하였다. 언젠가 해야 할 일이었지만, ‘민족적 자존심’을 내세운 노 정부는 역대 정부가 북한 위협에 대비한다는 ‘안보상 이유’로 지난 60여 년 동안 온갖 수모에도 지켜온 한강 이북에서 ‘인계 철선’ 역할(전쟁 발발 시 자동개입)을 하던 미군을, 후방인 평택에 기지를 짓고 이전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미군의 한강 이북 주둔을 풀어 준 것이다.


이에 대한 평가는 논란이 있다. 경제적으로 한국은 가만히 있으면 내지 않아도 될 약 12조 원(당시 예상 3~4조 원) 정도의 엄청난 비용을 부담하고, ‘전시작전통제권 전환’과 더불어 ‘미군의 재배치 및 용산기지 이전 사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 사업은 보수 정권하에서 2차례 연기되다가, 2017년부터 2018년까지 2년간 용산과 전방에 있던 미 2사단 등 미 군부대가 평택으로 이전하였다. 서울시는 용산 지역에 2027년까지 민족 대공원’을 조성한다”라고 발표하였다. 이로써 100여 년 이상 외세에 의한 굴욕의 역사는 일부 매듭지어졌다.


처음으로 접한 무슬림

여러 나라 장교들과 대화하였지만, 아프리카에서 온 장교들과는 솔직히 교류가 없었는데,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흑인에 대한 거부감이나 배타적인 편견이 있었을까? 필자는 의도적으로 인종적 편견을 갖지 않으려 한다. 수업 과정이 바뀌자, DLI에서 첫 흑인 무슬림을 만났다. 그는 수단군 공군 대위로, 구 소련에서 공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소련 공군 미그 전투기를 자국에 도입하였던 인물이었다. 친소 정권이던 수단에서 쿠데타로 친미정권이 들어서자, 이번에는 미국 정부가 원조로 제공하는 팬텀 전투기를 인수하러 왔었다. 국제 안보적 측면에서 한창 미-소가 냉전 중이어라, 두 강대국을 경험한 그에게 양국을 비교 평가해 달라고 하였더니, 뜻밖에도 군사적 관점이 아니라 ‘종교적’ 관점이어서 자못 흥미로웠다.


그에 따르면, 소련은 비록 많은 전투기를 주지 않았지만 한 대를 주더라도 본체와 더불어 수리부속품, 예비부품 및 필요 공구, 심지어 탄약까지 한꺼번에 무상으로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은 처음에는 다수의 전투기를 무상으로 제공하여 주지만, 나중에 탄약은 물론, 각종 수리부속품이나 공구류를 별도로 구매해야 했다. 마치 ‘잉크젯’ 프린트를 사면 프린트는 싸지만, 갈수록 더 비싼 잉크를 사게 하는 방식인데…


이슬람은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와 타 종교를 믿는 ‘이교도’를 모두 환영하지 않는다. 그래도, 종교가 아예 없는 무신론자보다 '신앙의 씨앗'이 있는 이교도를 약간 다르게 보긴 하는데… 여기에 '물질추구'가 가미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슬람에서 ‘신성’을 추구하며 살아온 유신론자인 그로서는, 세계 적화를 지향하던 무신론자인 소련인에게 화를 내어야 하지만, ‘물질’보다 ‘정신’적 경건함을 추구하는 무슬림에게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였던 미국인의 태도에 더 화가 났던 것 같다. 이 때문일까? 그는 “무신론자 소련인은 ‘마음이 따뜻’하지만, 이교도 미국인은 ‘마음이 친절’하다”라고 평하였다. 미국은 원조를 제공하면서도 왜? 준 만큼 감사받지 못할까? 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혼적인 인간’으로서 ‘꾀’를 내는 인간의 모습 즉, ‘지금 내게 무엇이 최선일까?’를 고민하며 정신적인 계략이나 전략으로 물질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서이다.


무슬림은 이슬람적 '가치관'으로 사람을 평가한다. ‘신적인 경건한 삶’으로 살아가려는 무슬림에게, 미국은 자본주의라는 ‘인성’으로 자신을 이용하려는 영리적이고 타산적이며 ‘기계적인 인간’의 모습에 불과하였다. 자본주의의 '냉정한 잣대'로만 사물을 재단해서는 결코 상대의 따뜻한 마음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 익숙한 무슬림은 누구로부터 물질을 받아도 결코 감사하지 않는다.


장교의 자존심

텍사스 ‘샌 안토니오’ 인근의 Lackland  공군 기지에 자리 잡은 미국 국방 언어학교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미국의 각급 군사학교에 유학하려는 약 120여 개 국가의 장교들이 각급 학교 입교 전에 먼저 영어 수업을 받는 곳이다.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미국의 군사교육 학비는 유상과 무상으로 구분되었다. 유상교육은 한국, 일본, 대만과 일부 유럽 나토(NATO) 국가 장교들이 원조가 아닌 국비로 왔었고,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많은 국가는 미국의 '무상 군사원조' 수혜 국가로 수업료 이외에 미군이 주는 생활비도 함께 받았다.

무상 원조국 장교들 생활비는 매 2주마다, 학교본부에서 현금으로 지급하는데, 모두가 이 날만 기다린 듯, 생활비 지급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수업 도중에도 모두가 우르르 몰려 나갔다.


당시, 한국은 미국의 무상 군사원조(IMET)에서 막 탈피하여, 학비 외의 나머지 생활비 등은 우리 정부가 주었기에, 매주 화요일마다, 종을 치면 수업 도중에 미국 군이 주는 생활비를 받기 위해 우르르 몰려 나가는 대열에 참여하지 않고 남아서 수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당시 한 반은 선생 1명에 학생 8명씩이었는데, 이런 날은 각 반에 남아서 수업받는 학생은 한국, 일본 등 1-2명 정도였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비록, 우리 정부의 생활비가 미국 정부가 원조로 주는 돈에 비해 그리 많지 않았지만, 어린 장교의 눈에 이러한 상황은 가슴을 뿌듯하게 하였다. 이런 식으로 국력이 얼마나 자존심을 갖게 해 주는 지를 해외에 나와서 정말 많이 실감하였고, 이러한 자존심은 건방지거나 겸손하지 않게 하려는 본인의 행동과 마음가짐을 스스로가 잘 갖게 하도록 추스르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이는 법이니 여유가 더 생긴 지금,  우리 후배들에게도 마찬 가지일 거라 생각한다.          


우리들은, 구내식당에서도 돈을 지불하고 먹어야 해서, 늘 알맞게 먹고 영수증을 챙겼지만, 대부분의 무상 원조 수혜국 장교들은 공짜라서 그런지 음식을 수북이 가져와서는 남기거나, 일부는 갖고 나가는 등 좀 점잖지(?) 못한 모습도 있었다. 상황이 이러니, 일부 미군 병사나 종업원들이 이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하였던 경우도 있었다. 그때마다 비록, 돈을 얻어 쓸지언정 그래도 장교라는 자존심은 있어서, 간혹 돈을 나누어 주는 미군 병사들의 태도가 불손하다며 분노하는 외국군 장교들도 있었고, 식당 계산대의 미국 아줌마(Cashier)의 거만한 태도에 반발하며 이들과 언쟁을 벌이거나, 반미 발언을 서슴지 않는 중동, 아프리카 출신 장교도 있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장교 식당 벽면에는 아랍어 등 수많은 외국어로 뭔가를 잔뜩 써 놓은 글들이 많이 있었다. 한 아랍국 장교에게 그 뜻을 물어보니, 그런 글 대부분이 미국을 비난하는 내용이라 해서, 필자는 처음에, “원조받는 처지에 무슨 비난은…” 이라며 어쭙잖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저들 모두가 각국의 군 엘리트들로서, 저들이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때 가졌을 그 꿈과 동경을 이해하고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당시, 미국인 평균 소득은, 병사나 식당 아줌마도 저들 후진국 외국군 장교보다 훨씬 높았다. 그러니, 병사나 아줌마의 눈에 비친 외국군 장교는, 그저 작은 돈이나 음식에 집착하는 무지하고 교양 없는 인간으로 무시나 경멸의 대상이었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미국이 많은 돈을 들여 미국을 이해시키는 프로그램이, 몇몇 병사나 민간인 직원의 무성의, 무신경으로 외국군 장교의 분노를 사고 역 효과가 나는 모습을 보며 좀 안타까웠다.


소득이나 교양 수준은 상대적이다. 비록, 저들 후진국 장교가 미국인에 비해 소득은 낮았을지 모르나, 나름 자존심이나 국가에 의해 선택된 자라는 자부심이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보기보다 뒤 끝이 강한 듯하다. 후에, 국제관계 업무를 하면서, 미국에 유학하였던 아랍권 장교를 많이 만났는데, 이중 상당수가 공개적으로 반미, 반 서구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미국과 우방국이랍시고 각종 혜택을 받았지만, 받은 것은 ‘주니까 받은 거’로 생각한다. 게다가, 받는 과정에서 느낀 모멸감은 서구로부터 받은 역사적 아픔과 더불어, 오랜 기간 그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비단, 아프간, 이라크 사태를 언급지 않더라도 많은 무슬림 고위직은 여전히 반미 성향이 강하다. 더구나, 이들이 물질보다 신앙적 가치에 더 큰 비중을 둔다는 사실에 소홀하였던 미국은 많은 돈을 들이고서도 저들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하였던 것 같다.


숨겨졌던 이야기

이번 이야기는 국제화와 우리 전통음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미국에 도착한 후 LA를 거쳐 미 국방 언어학교가 있는 텍사스의 산 안토니오로 이동하였는데,  공항에서 미군의 마중을 기다리는 동안 같이 입교할 W 대위를 거기서 만났다.  갑자기 친해졌는데 매우 활달하고 적극적인 친구였지만, 국제적인 감각이 전혀 없는 전형적인 군인의 모습을 지닌 후배였다.  급하게 개설된 전산분야 단기과정으로 선발되어 급히 오다 보니 군사영어반 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왔다고 푸념한다. 이 후배 장교가 만든 많은 에피소드 중 한 가지가  군사외교를 논하는 우리와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가 아니라서 소개한다. 그는 영어는 비록 매우 서툴렀지만 항상 웃으며 매사에 과감하게 임하는 자세여서 주변과 친하게 지내보기에 좋았다. 하지만, 지나치게 매사를 한국식으로 접근하다 보니 종종 문제를 야기시켰는데, 그 한 가지 예가 청국장 (된장국) 사건이었다.


당시, 우리들 학생들은 장교용 숙소에서 지냈는데, 40도를 넘는 텍사스의 8월 여름 열기는 과히  살인적이라 문화프로그램이 없는 날은 모두들 교육 후에 숙소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중앙 냉방 에어컨에서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냄새가 강하게 흘러나왔고,  복도가 떠들썩하였기에 필자도 밖으로 나왔다. 냄새의 원인을 찾느라 모두 코를 킁킁거리고, 개중에 누군가가 MP를 불렀는지 사이렌 소리와 함께 헌병하사관 두 명이 급히 뛰어와서 모두의 방문을 열어 달라고 소리쳤다. 모두가  각 방의 문을 열고 이상 유무를 확인하였는데, 단지 W 대위 방문만 굳게 닫혀있었다.  아마도 그의 부모님께서 정성껏 준비해 주신 청국장의 맛을 한껏 느끼고 있던 중이었으나 , 그 강한 냄새가 중앙 공급식 냉방시스템을 통하여 각 방으로 배급된 줄도 모르고… W 대위의 당황해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무튼, 사태는 그리 해결되었고… 그 사건은 W 대위에게도 많은 공부가 되었던 것 같다. 몇 년 후 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다시 미국에 유학을 갔으니…     

단순한 예에 불과하지만, '내가 좋아한다 해서 남들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소박한 뜻이 함축되어 있다. 이런 경험을 거치면서, 보다 성숙된 행동이 나오는 게 군사외교관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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