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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Mar 14. 2023

'내 편, 네 편' 그리고, '내 것, 네 것'

무슬림의 ‘내 편이냐?’ vs ‘네 편이?’

'네 편'이 되면 죽을 수도 있는 문제타 종교에 둔감한 사람들

서구의 '내 것네 것'



무슬림의 ‘내 편이냐?’ vs ‘네 편이?’

‘할 바(할랄)’와 ‘안 할 바(할렘)’를 가리는 무슬림은, 누군가를 대할 때는 반드시, 내 편이냐? 아니냐? 는 ‘편 가르기’를 한다. 이는 같은 신을 믿는 이슬람 종교의 영향도 있지만, 유목민의 전통이기도 하다.

「이슬람은 종교와 정치를 통합하여 ‘다르 알 이슬람(이슬람교도)’와 ‘다르 알 하르브(이교도)’의 구분 선을 날카롭게 긋는다. 그래서 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서로 적응하는데 별다른 어려움 없이 그런대로 어울려 살아가지만, 이슬람교도는 타 종교를 믿는 집단과의 화합에서 상대적으로 더 큰 어려움을 느낀다. 이는 이슬람의 전투성, 화합 불능성과 비 이슬람교도와의 물리적 근접성 등의 지속적인 특성 때문이다.」 (‘문명의 충돌, 샤무엘 헌팅톤, pp359 - 360)


이처럼, 처음부터 낯선 이들을 ‘같은 편’이나 ‘다른 편’으로 갈라놓다 보니, 저들과의 좋은 관계를 위해 평소의 이미지 관리는 물론, 중간에 있는 사람과의 인간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비즈니스에서는 이들과 얼굴을 터는 것이 어렵지, 한번 트고 나면 다음부터는 일사천리다. 한국인에 대한 일반 무슬림의 생각은 ‘같은 편’에 가깝다. 역사상 한 번도 저들의 정치에 간섭하거나, 그들과 이해관계를 놓고 다툰 적이 없고, 종교에 관대하고,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있고, 한류나 경제성장 등 좋은 이미지 탓이다. 이들은, ‘같은 편’으로 간주하면 먼저 선물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중동 아랍국 지도자는, 우리를 ‘같은 편’으로 여겨서, 무슨 일을 하려면 선물을 요구한다. 저들이 선물을 요구하면, 한국에 대해 우호적이라는 것이니, 우리에게는 고마운 일이다. 따라서, 아랍 외교에서는 대통령이나 장관부터 실무자들까지, 선물 요구에 화내지 말고 대비해야 한다. 


특히, 이집트 같은 후진국의 관리는 자국의 지리적, 정치적 중요성을 큰 흥정거리로 여겨 국제 관행이나 규범보다, 개인이나 패거리 이익추구에 집착하는 편이다. 그러니, 우리가 선물을 주면 독재정권의 충성 유도에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물에 대한 저들의 감성적인 정서를 이해하여 얼마만큼의 선물을 주고라도 적극적으로 만나면 국익에 도움이 된다. 분위기 파악이 중요하다. 


하지만, 서구인은 무슬림과 달리 누군가가 접근해 오면 처음부터 ‘우리 편이냐? 아니냐?’를 구분하기보다, 상대의 반응이나 행동을 지켜보며 '유익'에 따라서 ‘같은 편’을 정하는 편이다. 그리고, 같은 편이라고 무슨 대단한 편애를 하기보다도, '지킬 것은 최대한 지켜주며 서로 이익을 나누는 정도'라고나 할까? 매우 계산적이다. 이런 모습은 서구의 ‘나’ 중심 사회에서는 개개인 모두가 독립적인 인격을 가지고 ‘합리성’을 추구하며 서로서로의 관계에 따라 접촉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얼마만큼의 ‘유익’이냐가 상대를 대하는 중요한 잣대이다.


그런데,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50여 년간 비즈니스맨으로 살아올 때, 이런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무슬림처럼 적과 아군을 미리 판단하여 '좋은 고객'과 '나쁜 고객'으로 상대를 나누어 대했다고 한다. 그가 선입견이나 편견이 갖는 위험성을 몰랐을까? 다만, 둘 간의 차이점은 무슬림은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절대로 바꾸려 하지 않았지만, 트럼프는 ‘당연한 것’에 대해서 항상 “Why (왜)?”라는 질문으로 당연한 ‘가정 (Assumption)’을 파괴하고, 모두가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는데... 어쨌든, 편을 나눈 것은 나눈 것이다.     


'네 편'이 되면 죽을 수도 있는 문제타 종교에 둔감한 사람들

지난 편에서 잠시 언급하였지만, 오래전, 중앙일보(24면, 2017년 7월 25일) 문화란에 ‘코란에 발을 올리고, 비키니에 히잡… 무슬림이 뿔났다’는 기사가 실렸다. 지상파 공영방송인 모 방송국의 드라마 ‘죽어야 사는 남자’가 이슬람 문화 희화화 논란에 휘말렸다. 이 드라마에서 히잡을 쓴 여인이 비키니’ 복장 차림으로 수영장에 누워있고, 무슬림인듯한 인물이 와인을 마시며, 메인 포스터에서 주인공이 꾸란’ 바로 옆에 발을 갖다 댄 자세를 취하는 등, 이슬람에서 금기시하는 장면들이 가감 없이 방영되었다. 


이슬람 문화가 우리와 여러모로 달라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작진이 '몸의 일부라도 드러낸 여성', '음주', '꾸란'에 대한 모욕 등등... 이슬람 금기사항을 알지 못하고 이를 단지 ‘웃기려는 소재’로만 보았을까? 1980년대 아닌 2017년도에...? 만일 그렇다면, 이슬람에 대한 이해도는 그야말로 ‘천진난만’한 수준을 지나 ‘최악’이다. 이슬람은 그들의 신(알라)이나, 예언자 모함마드, 성전, 꾸란 등 종교 관련 사항과 여성에 극도로 민감하다. 많은 무슬림은 제작진이 사소하게 보는 것조차 금기로 여기고 ‘목을 맨다’. 


더욱이, 요즘은 국내 방영 드라마도,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지는 세상이다.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나라는 지구상에 무려 57개국 약 16억여 명 정도의 대단한 규모다. 그러니, 제작자들은 글로벌하게 소비되는 콘텐츠들은 타 문화 존중, 인종, 소수자 차별금지 등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는 감각을 가져야 한다. 방송 제작진이 느끼는 잣대나 종교의 무게에 무관하게, 어떤 이들에게는 종교 그 자체가 삶일 수도 있다.  


지난 20여 년간 한류의 인기몰이 영향으로 이집트 등 중동의 많은 젊은이는 한국을 배우려 하였다. 어설픈(?) 아이디어로 우리에게 호감을 가진 그들이 ‘신적인 삶’을 살려하며 '절대시'하는 종교를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된다. 만약, 상대를 잘 모른다면 우리 방식으로라도 저들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 '존중하겠다'는데 누가 시비를 걸겠나? 입장을 바꾸어, 누군가 우리 문화를 폄훼하고 모욕한다면 참을 수 있겠나? 종교 묘사는 철저하게 전문가의 자문을 구해야 한다. 자칫, ‘웃으려다가’ 드라마의 제목처럼 ‘죽을 수도 있다’. 국내에 과격 무슬림 수가 적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낭패를 볼 뻔했다. 이 방송국은 국내외 네티즌의 비판이 이어지자, 뒤늦게 한국어, 영어, 아랍어 등 3개 언어로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였다.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17명 사망 부른 이슬람풍자만화 테러희생자 추모(출처: 한겨레)

2015년, 프랑스에서 '샤를리 엡도'라는 매거진의 만화작가와 경찰 등 17명이 이슬람 총격 테러로 사망했다. 그런데, 이들이 그린 만화 내용을 보면, 2012년에는 모함마드의 나체 그림을 그리고, 터번과 코의 모습이 마치 남성의 거시기처럼 보이게 그려, '모함마드'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하고, '웃다가 죽지 않으면 태형 100대에 처한다'라는 말을 하는 등의 그림인데.. 일반인이라면 그냥 우스꽝스럽게 여기고 지나칠 수 도 있을 거다. 


물론, 기독교인에게 그리스도를 이런 식으로 희화화한다면 여간 불쾌한 게 아니겠지만..., 우리나라 어느 진보화가가 대통령 부부의 음란 그림을 그렸다. 이슬람을 이런 식으로 그렸다면 그는 벌써 죽었을 수도 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기준과 혐오의 눈높이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같은 해에, 파리 시내 7곳에서 총기 테러로 130여 명이 사망했다. 프랑스는 무슬림 인구가 많다. 이슬람에 대한 몰이해로 큰 낭패를 당했다. 


다른 사례도 있다. 2018년 6월 어느 날, 중국 여성 2명이 말레이시아의 관광지로 유명한 ‘코타키나발루’의 한 모스크 사원에 들어가 ‘배꼽춤‘을 추는 동영상을 올렸다.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는 관광객에 매우 우호적이지만, 이 사건으로 모든 여행객의 모스크 사원 출입금지 등으로 발끈하였다. 이슬람에서 '모스크' 사원은 일종의 성지(聖地)이다. 남성은 물론, 여성도 손발도 씻고 입장해야 한다. 남성은 모자를 쓰면 되지만, 여성은 손과 발만 제외한 신체의 모든 부분을 가려야 한다. 


그런 '모스크'에 여성이 들어가 몸을 드러내고 엉뚱한(?) 춤을 추다니…? 영웅심일까? 치기 어린 호승심일까? 댄스 강사인 자신들의 '작은 만족'을 위해 남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종교적 가치'를 대놓고 무시하거나 조롱하는 방자한 태도나 그 무지함에 간담이 서늘해진다. 현지 언론이 여행객의 무지함 정도로 보도했다지만, 전 세계 많은 무슬림들은 매우 불쾌했을 것이다. 자칫, 중동지역의 일부 원리주의자 등 과격분자의 테러 대상으로 걸리면 큰 화를 입을 수도 있었다. 


신장성 감옥에서 재교육 중인 위구르인 (출처: 조선일보)

이 이외에도, 중국 정부가 ’신장-위구르‘ 자치구 무슬림을 탄압하는 것처럼, 무슬림을 무시하거나 탄압하는 사례는 전 세계에 비일비재하다. 예컨대, 1990년대 초반, 미국주도 다국적군에 의한 '사막의 폭풍' 작전 때, '모스크' 안으로 도주한 이라크 군을 쫓던 미군 수십 명이 모스크 안으로 따라 진입했다. 군화를 신은 채로...?” 이 사건의 후폭풍은 컸다. 쿠웨이트에게 몹쓸 짓을 한 이라크를 응징하던 미군에 우호적이던 무슬림마저 미국을 증오하게 되었다. 9.11 테러의 주범 '오사마 빈 라덴'도 그중의 한 명이다. 이런 증오 덕분에 미군의 이라크 작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들은, 종교문제에 관한 한 겉보기보다 '뒤끝이 엄청난' 사람들이다. 


서구인의 생활은 낮 중심으로, 퇴근 시간 이후는 밤 문화가 거의 없고 거리는 조용하다. 저녁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다. 서구와 달리, 우리는 업무는 낮에 보고, 퇴근 후에 직장이나 사회 동료들과 인간관계를 위해 잦은 술자리 회식을 갖는다. 그런데, 만약 밤늦게까지 부인이 아닌 여자와 어울려 돼지고기를 구워 먹으며, 술에 취해 고성방가나 주사를 부린다면...? 아무리 한국에서 한국 사람끼리 좋은 뜻으로, 같은 ‘밤 문화’를 즐기는 것이라 해도 그 모습을 바라보는 무슬림은, 마음속으로 예외 없이 그런 사람을 매우 ‘동물적인 인간’으로 경멸할 것이다. 더구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무슬림 국가에 여행까지 가서 돈 몇 푼으로 유사한 일은 '보란 듯이' 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 돼지고기, 술, 여자는 이들의 금기어(禁忌語)로, 이들 나라에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자세히 보면, 우리들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 뻔뻔스럽다. 낯선 문화에 서로 느끼는 감정은 다르겠지만, 제발 에게 잘하는 만큼 을 존중하는 성숙함을 가졌으면 한다. 필자의 염려는 무슬림을 위해서라기보다, 현지에 사는 동안 종교 문제에 매우 예민한 무슬림의 습성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주의하자’고 강조하는 것이다. '문화의 둔치'는 상대에게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참고로, 필자는 이슬람과 전혀 무관하다.


서구인의 '내 것네 것'

내 편이냐네 편이냐?”를 확실하게 따지는 무슬림과 달리, 서구인은, 내 것네 것에는 확실하게 달려든다. 이들은, 그만큼 계약을 중시하고, 물질 중심적이고 계산적이며, 자기 신용이나 자기 영역, 각종 금전관리에 철저하다. 만약에, 부부 사이라도 이혼하게 되면, 몇 센트 단위까지 확실하게 따진다. 이처럼, 서구는, ‘셰익스피어’ 소설 ‘베니스의 상인’에서 나오는 것처럼, 차용금 변제 불가시 ‘살 1파운드’를 떼어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계약이 엄중하다. 그러니, 잘, 잘못에 대한 판단보다 계약서에 쓰인 문구에 대한 해석을 놓고 법정 다툼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당연히, 세상에서 변호사가 가장 많기도 하고 그 업이 성행하는 곳이다. 


그래서일까? 계약과 신용, 서명을 목숨같이 여기는 외국인이 한국에서 가장 황당하게 보는 것은 ‘신용카드 대리서명’이다. 지금은 5만 원 이하는 무서명이지만, 얼마 전까지 카드를 사용할 때마다 서명하였다. 그런데, 카드를 받은 일부 상점 주인이 마치 자기 것처럼 대충 사인한 뒤 결제를 하는 것을, 나야 귀찮은데 상점 주인이 대신하니그러려니...” 하고 용인하였지만, 외국인에게는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이들은, 아니어떻게내 서명을 타인이 아무렇지 않게 대신하며또 그게 금융기관에서 승인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던 거다.


이처럼, 금전 관리가 주변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대충 하는 우리와 다른 것처럼, 소유물에도 ‘내 것’과 ‘네 것’이 분명하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개인소유 토지’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한다. 경계를 침범하면 자칫 총에 맞아 죽는다. 실제로, 어느 ‘핼러윈 데이’ 날 어린아이가 이웃집에 사탕 얻으러 갔다가, 무단침입으로 총에 맞아 죽은 사례도 있다. 아이 부모는 통곡하였지만, 총을 쏜 이는 법적 책임이 없다.


필자가 근무했던 사무실은 미군 현역 장병들의 전출, 전입이 잦았다. 하지만, 전출, 전입자를 위한 파티가 많음에도, 이들을 위한 예산은 한 푼도 없다. 한국 공무원은 부서장 업무추진비가 있지만... 대부분 부서별로 자원한 행사 주관자가 “000을 위한 환송 파티에 음식이나 돈을 기부해 달라”라고 요청한다. 그러면, 일부는 현금으로, 동료 부인 등 다른 가족은 한, 두 가지 음식을 준비하여 일종의 ‘파틸락’으로 모두가 ‘십시일반’ 하기도 한다. 이럴 때, 자원자인 주관자가 대부분 사전에 음식량을 조율하지만, 가끔 돈과 음식이 남기도 한다. 


그런데, 자원한 주관자에게 '돈은 조금이라도 남으면' 곤란하다. 이들은, 설령, 돈이 남으면, 1/n로 나누어 되돌려 주거나, 아니면, 남은 돈에 차라리 자기 돈을 조금 더 보태 행사용 물건 하나를 더 사더라도 그 돈을 모두 사용하려 하지, 나중 일을 위해 보관하거나, 최초 의도한 일 이외에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않는다. 부정, 부패 소지를 없애기 위해, 돈이 남지 않도록 조치한다. 그 정도 사명감이 없으면 아예 돈을 만지지 말아야 한다. 


또, 사무실에서는 가끔, 전출자 사정으로 외부에서 식사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각자 먹은 만큼 식사비를 지불한다. 하지만, 만약에, 이들과 한국 식당에서 회식할 때, 누군가가 일괄적으로 회식비용을 지불한 뒤, 전체 금액을 1/n 인원수로 나누어 돈을 걷으려면 큰 곤욕(?)을 치른다. 이들은 누가 ‘공깃밥 한 그릇을 추가로 먹었는지?”, “맥주 한잔을 더 하였는지?”를 확실히 따진다. 한국말은 모르나, 각자의 셈법은 확실하다. 


여기에 비하면, 우리 사회의 방식은 많이 다르다. 부서에서 회식하거나 기념패 등을 제작하는 경우, 대부분 똑같은 금액을 내지만 애매한 잔돈이 남았다며 돌려주겠다고 하면, 그거 몇 푼이나 된다고 나누어서 돌려주려고 그래그냥 두었다 나중에 쓰지라며 대범하게 말하든지, 아니면 누군가가 호기롭게, 다음 행사에 보태 쓰라”라고 말하면, 모두가 속 내와 달리, 꿀 먹은 벙어리처럼 '이하동문'으로 동조한다. 


이런 분위기라, 누군가가 회계 담당에게 금전 출납 관련 세세한 설명을 요구하기라도 하면, 그 시간부로 ‘쫌생이’로 낙인찍혀 “저 xx와 같이 할 수 없다며 왕따나 기피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자연히, 잔금을 흐지부지 주관자에게 맡기게 된다. 마무리까지 꼼꼼하게 하지 않는 것, 그게 우리 방식이다. 그리고, 그렇게 투명하지 못한 문화가 우리 사회의 부정부패에 기여하였다. 이런 모습은 더 큰 일을 위해 서로 믿고 맡긴다는 신뢰에 기반한 거였다. 계약에 따라 한 건, 한 건 처리하고 돌아서는 서양과 달리, 동양은 사람 간의 관계가 맺어지면, 한 건이 두 건이 되고... 이게 단골이 되어 점점 커진다. 


예컨대, 무슨 모임이나 조직에서 한, 두 번 금전관리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당연직 총무로서, 각종 친목, 상조 행사까지 연락을 도맡아 하였고, 이게 또 다른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식이다. 그러니, 총무가 잡일을 맡아 하지만, 조직을 위해 헌신하는 일은 할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인연이 점점 커지면 능력에 비해 과분한 자리에서 한껏 행세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분수에 맞지 않는 책임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화무백일홍’이다. 과거, 대통령을 했던 몇 분이 평생을 함께했던 총무의 비겁함이나, 저지른 부정에 발목이 잡혀 감옥행을 당하였다. 권력이 없어지고 돈 떨어지면 믿지 못할 사람을, 마치 자신의 분신인 양 무한 신뢰한 탓이다.


사막에서 낙타를 타고 가는 이집트 인

그러나, 무슬림의 셈법은 서구나 우리와는 더욱 궤(?)를 달리한다. 어느 모임에서, 한 서구인이 웃자고 들려준 이야기지만 공감이 가는 낙타와 이집트인을 비유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낙타를 타고 사막에서 여행하던 주인이 밤이 되자, 천막을 치고 잠을 자려고 하였다. 이때, 낙타가 천막 속으로 코를 들이밀며, 주인님너무 추우니 코만 천막 속에 두도록 허락해 주세요.”라고 간청했다. 마음 약한 주인이 이를 허락하자. 얼마 후에 다시 낙타가, “이제 코는 괜찮은데 머리가 너무 추워요머리만 좀 넣을게요.” 주인이 마지못해 허락하자, 얼마 뒤에는, “몸 전체가 너무 추워요 하고 아예 천막 속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주인이 천막 밖으로 쫓겨났다.


이 이야기는 일견, 일부 이집트인의 행동거지를 연상하게 한다. 언젠가, 대사관 행사준비에 열심히 일한 비서에게, 위로의 말과 함께 약간의 위로금을 주었다. 그런데, 그는 '한 번 급여를 더 주었으니 앞으로도 계속해서 더 준다'는 뜻으로 이해하였고, 또, 운전기사는 무슨 장거리 행사에 참석한 뒤, 수고했다며 점심을 사주었더니, 그다음부터 행사 성격에 무관하게 의례히 점심을 기대하였다. (식사비는 급여에 포함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현지 공무원이나 사업가는 자신이 ‘문서로 약속한 사항’조차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면서도, 우리가 ‘구두로 말한 내용’까지 잘 기억하여 약속을 지켜라”라고 요구한다. 때문에, 이들과의 협상 시는 꼭 필요한 말만 해야지, 괜스레 호기롭게 던진 말은 부메랑이 된다. 이들은, 너희가 우리보다 잘 살지 않니그러니부자로서 할 바를 다하라며 윽박지른다. 이런 나라의 지식인과 정부 인사, 가진 자들은 영악(?)스러울 정도로 기억력이 총명하고, 재빨라서 환경에 잘 적응하는 것 같다. 


하지만, 대부분 서민은 순수하고 착하다. 무슬림은, 비록 현실이 어려워도 정치나 빈부 차이에 대한 불만보다, 내세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경건하게 살아간다. 아마, 현세에 받을 만큼 받지 못한 것을, 알라()께서 내세에 채워 주시리라” 생각하는 '정명' 신앙 탓이다. 꾸란도 '알라()께서는 계산에 확실한 분'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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