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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Mar 13. 2023

유일신교와 '충효'에 기반한 공동체

글로벌 다양성 이해 (문화 차이, 제1화)

서양의 종교 - '유일신' 교

양대 신성(神性)의 대립 - 정복과 선교

동양의 정치철학 - 유교적 공동체

교역과 선교의 대항해 시대의 피해자, '충효'공동체



서양의 종교 - '유일신' 교

세상의 온갖 종교는 그 자체로 나름의 교리를 갖고 있으며, 그 교리 속에는 반드시 '사후세계', 그것이 천국, 에덴, 열반, 극락, 파라다이스, 도원경, 샹그릴라, 시온이든 무엇이든지... '내세관'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무슨 종교라도 교인들은 교리를 의심치 않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 그런데, 과연, “천국과 내세가 있을까?” 종교는 문화, 인종 이슈 등 다른 부분 못지않게 '정서적 요인'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이해는 문화적 차이에 대한, ‘상호’ 이해의 본질일 수도 있다. 때문에, 많은 분야에서 종교에 대한 이해가 ‘다양성 존중’의 핵심이었다. 그렇지만, 종교에 대한 동, 서 양대 문화의 접근방법과 그 관점은 각각 달랐다.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 (출처: 인터넷)

기독교 선지자 중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준 '십계'(열 가지 계명)에서 제1 계명은, "너는 나 이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이다. 이 계명으로, 유대교나 기독교는 유일신을 섬기게 되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창시된 이슬람교도 유대교와 기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탓인지, 역시, 유일신이 이 종교의 핵심이다. 즉, 이슬람의 5대 실천사항(5행) 중 가장 먼저 나오는 '샤하다'(증언사)는 '알라(신) 외에 다른 신이 없고, 모함마드가 사도'라는 내용을 증언하며 이는 무슬림들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읊는 말이다. 이처럼, 구약에는 여호와의 말씀과 이 말씀을 전한 선지자의 말씀이 중심이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말씀이 중심이다. 그리고, 이슬람도 온통 모함마드의 입을 통한 알라(신)의 말이나, 감정을 기록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 종교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따르는 '내세관'도 필수적이었다.    


양대 신성(神性)의 대립 - 정복과 선교

서구의 역사를 좀 더 되돌아보면 기원이래 역사의 주축은 '기독교'였다. 하지만, 그런 기독교도 처음에는 그냥 종교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예수 탄생 이후 약 300여 년이 지난 후에, 로마제국에 의해 종교로 ‘공인’(밀라노 칙령, AD 313) 되었고, 이어 로마의 ‘국교로 선포’(AD 392)되면서 종교가 국가권력으로 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이미 갖추어진 국가 틀에 종교가 뒤늦게 들어왔다.


이제, 로마의 국교로 선포된 기독교는 로마제국처럼 제국 안에서 또 하나의 제국이 되었다. 로마의 황제처럼 교회에도 교황이 생기고, 로마의 귀족처럼 교회에도 대주교, 주교 등의 계급도 생겼다. 또한, 로마의 법전처럼 수많은 교회의 법률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달라진 모습은 국교가 되면서 종교는 ‘선교의 명분’으로 군인과 더불어 ‘정복의 역사’에 나서게 되었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로마라는 ‘제국의 틀’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섬김과 나눔’의 종교라기보다 ‘승리의 십자가’를 추구하는 종교가 된 셈이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계시를 받는 '모함마드'

한편, AD 620년경 중동의 유목민이 창시한 이슬람은, ‘제국의 틀’을 갖춘 '로마 기독교'를 많이 닮았다. 이슬람은 창시와 동시에 종교 자체가 바로 군사력을 갖춘 국가권력이었고, 종교 확장을 위한 선교의 명분으로 끊임없는 전쟁과 정복으로 이어졌으며, 불과 100여 년 만에 곧 거대한 제국의 건설로 이어졌다. 그리고, 제국은 초기부터 '정교일치'로 종교와 정치 간에는 구분조차 없이 종교가 삶의 전 영역을 포괄하였다. 


이슬람은 먼저 발전한 유대교와 기독교의 영향으로 그 종교적인 신앙방식이 유대교나 기독교와 매우 유사하였다. 하지만, 이슬람은 종교가 사회생활 전반을 망라한 삶의 생존 양식을 가르치므로, ‘내세와 현세를 동일하게 여기면서도, 현세의 삶을 중시’하고, ‘신앙과 실천의 세계’를 주요 관심사로 보았다. 이는, 세속과 종교의 영역을 구분하고 내세관이 뚜렷한 서구 기독교의 가치관과 본질적으로 다르며, 문명의 성격도 대립적이다.


기독교나 이슬람은 둘 다 '하나의 신'을 섬긴다는 측면에서는 같지만, 이들이 믿는 신은 같은 신이 아니다. 그리고, 유일신교는 자신이 믿는 신 이외의 모든 존재를 부정하게 되므로, 모든 사고를 ‘우리’와 ‘그들’이라는 양방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종교만이 진실하고 유일한 신앙이니 모든 인간이 추종해야 하므로, 이교도를 자신의 참다운 종교로 개종시켜야 할 의무라며, 두 종교는 정복과 선교에 커다란 비중을 두었다.


이들은 동일한 사건을 바로 보면서도, 그 관점은 꾸란이나 성경에서 보듯이, 그 내용이 서로 다르고, 자신들의 신앙을 강조하는 방식도 다르기 때문에, 경계를 맞대고 있는 두 종교 간 상호 불신의 계곡은 매우 깊어, 자연스레, 공존보다 분쟁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역사적 사실에서 보듯이, 로마의 국교가 된 기독교가 로마의 힘을 빌려 정복 전쟁에 나선 것처럼, 이슬람도 창시 초기부터 정복을 통하여 교세를 넓혔다. 때문에, 전쟁은 이 두 종교의 선교의 영역이며 교세 확대를 위한 주요한 수단이 되었으니, 이슬람의 세력이 점점 커져가자 기존 세력으로 존재하던 기독교와의 충돌은 어찌 보면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그래서일까? 이슬람이 기독교를 공격하고, 기독교가 이슬람을 이단으로 단정하여 전쟁하는 일들이 이슬람 발흥 이후 오랫동안 이어졌다.


동양의 정치철학 - 유교적 공동체

인도에는 힌두교, 이슬람, 불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였다. 영국의 인도 지배(1857 – 1947)가 종료되자, 인도는 종교에 따라 나누어져, 영국 지배하에서 독립이전까지 어느 정도 자치권을 가진 각 번왕국(藩王國)들은 힌두교도인 '국민의회'(인디아)나 '무슬림 연맹'(파키스탄) 둘 중 한쪽을 선택하였다. 이슬람은 유일신을 믿고 배타적이지만, 인도 최대 종교인 힌두교는 온갖 신을 숭배하면서, 종교적 관용으로 단일한 종교적 믿음이나 관습을 요구하지 않았다. 

수행하는 스님들

힌두교로부터 나와 중국과 아시아에 영향을 미친 불교도, ‘득도(得道)하면 누구나 부처의 경지’에 이르니, 신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굳이 자신의 종교적 가치를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이처럼, 인도의 분할은 종교에 의한 것으로 겉보기에는 평화롭게 진행된 듯하다. 하지만, 실상은 무슬림이나 힌두교 인구수에 따라 압박과 배척을 피해 자신의 종교가 우세한 지역을 찾아 떠나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서구나 중동, 그리고 인도와 달리, 동양은 그 사유의 특징이 ‘가치의 근원’이 무엇이든 그 실현은 '신앙'이 아니라 ‘인간의 심성’으로 부터 나온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자기 성찰, 자기반성 등 인간의 자각 능력을 통하여 초월적 가치를 도출해 내었다.  즉, ‘내적 지향성’은 인간의 내면에서 구현할 수 있는 절대적 가치에 의해 존재의 의미를 깨닫고 그로부터 ‘공동체적 질서’를 확립해 나가는 것이었다. 이는, 존재의 온전함을 자각함으로 공동체의 질서에 화합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 목표로서, 곧, 동양 정치철학의 근간이 되었다. '내적 지향성'을 추구하는 이런 가치관은 어떤 면에서는, 불교의 법도와 일맥 상통하기도 한다.


동양을 대표하는 중국은 오랫동안 농경문화에 정착한 나라로 안정지향적이었다. 여기에 위와 같은, 동양적 사고는 중앙집권적 국가에게 안정된 사회적 공간을 형성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왕조는 개인의 다양한 목소리인 ‘백가쟁명 (百家爭鳴)’을 수용하기보다는 사회적 제도와 규범을 중시하는 ‘공동체’를 추구하였다. 특히, 유교에 바탕을 둔 ‘유교적 공동체’는 국가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간주하였고, 개인의 권리보다 사회적 권리를 우선시하였다. 그리하여, 유학적 가치관은 한, 중, 일 동북아 삼국의 도덕적 지주로서 사회의 정신적 기둥이 되었다. 


공자나 맹자로 대표되는 유교는 인간의 기본적 심성과 '마음'을 다스리는 행동에 주안을 두었지만, 그 종교성이 옅었다. 예컨대, 공자의 논어(論語)는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데 주안’을 두었고, 중국의 대표적인 고서(古書) ‘한비자(韓非子)’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데 주안’을 두었다. 이처럼, '인간의 심성'을 강조하였기에 동양에서 신의 존재는 미미하였고, 비록 있더라도 ‘절대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세속화, 현세화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타 종교에 대해 관대하고 타 교리를 흡수하기도 하였다. 


교역과 선교의 대항해 시대 피해자, '충효'공동체

'오스만 터키'군의 '콘스탄티노플' 공략 (동로마의 멸망)

로마제국 멸망 이후, “암흑기”라 불리는 1,000여 년 이상 문화예술을 포함한 모든 생활의 중심은 '유일신'인 '하나님의 신성'을 높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쟁에서 기독교가 '십자군 전쟁'에서 패퇴하고, 동로마 제국마저 무슬림에게 멸망하여 동방진출의 길이 막히자, 기독교의 서구는 부득이 해양 국가들로 '대항해 시대'를 개척하였다. 다행히, 항해술의 발달로, 17세기 중엽부터는 교역과 선교를 위해 기독교 선교사들이 상인과 함께 군함을 앞세우고 인도를 지나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선교는 기독교도의 사명'이었으나, 중국인은 종교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중국에서는 수천 년 동안 종교분쟁조차 일어난 적이 없었다.


오랜 시간 유교적 의례와 가부장적 대가족 제도하에서, 중국인은 개인이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가 강조되는 사이, 개인의 존재감은 ‘우리’라는 사회의 한 부분으로 재구성되어, 상호의존적으로, 다른 구성원과 조화를 이루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삼강오륜적 가치관을 내우는 공맹 사상은, 공동 유익을 추구하는 학문으로서, 개인의 심성을 ‘충효’에 기반한 사회 정의로 이끌었다. 그 결과, 자연스레,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이익은 희생해도 좋다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살아있는 '실체'에 대한 '충효사상'에 길든 중국인의 관점에서는 '무형의 신'을 섬기는 서구인은 특이한 존재로 보였다. 그런데, 신만 섬기는 줄 알았던 서구인이 '무력과 종교가 뗄 수 없는 사이'라는 걸 아는 순간, 중국인은 적잖이 당황하였다. 이후, 서양과의 전쟁에서 서구 열강의 따끔한 포탄세례를 맛본 중국인들이 폭죽의 재료로만 알았던 화약의 위력에 놀라 허둥대는 동안, 중국에 와 있는 서구인들은 치외법권을 누리며,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렸다. 부녀자 추행과 폭행은 기본이었고, 심지어, 선교사들조차 지역 농민들을 노예처럼 부렸다. 무력을 앞세운 선교가 현지인을 짓밟아버렸던 것이다. 


'의화단' 사건으로 연합군의 '베이징' 공략 (청조의 몰락)

이런 횡포에 참다못한 산동성의 무술단련 민간조직 '의화단'이, 1899년, 외세배척 운동을 일으키자 수많은 군인, 농민들이 순식간에 합세했고, 청 황실도 이를 배후에서 지지했다. 결국, 성당과 교회는 불탔고, 선교사들은 죽거나 도주했다. 하지만, 영국, 일본 등 8개국이 연합군을 결성하여 보복하자, 충효사상과 민족적 정의감으로 궐기했던 의화단의 부적이나 칼로는 근대적인 연합군 화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무기력한 청조는 다시 무릎을 꿇었고 '충효사상'은 청조의 몰락으로 매듭을 지었다. 19세기말, 조선 사회의 유생이라고 중국인과 달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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