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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Feb 12. 2023

'카슈미르' 무슬림의 학교와 종교

어느 군사 외교관 이야기 (인디아-파키스탄 유엔 평화유지군, 제11화)

세속주의 교육과 이슬람적 가치관 

파키스탄 ‘카슈미르’ 지역의 무슬림 중학교

집착이 지나친 종교주의



세속주의 교육과 이슬람적 가치관 

이전의 이슬람은 ‘금을 제조하겠다’며 ‘연금술 (鍊金術)을 추구하였다. 한동안, 연금술은 서구의 과학으로부터 ‘엉터리’ 취급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화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알 칼리’ 등 많은 화학 전문용어가 아랍어라는 사실에서 보듯이, 이슬람에서는 화학분야에서 특히 괄목할 만한 성취가 있었고, 중세에는 아랍의 여러 학문이 유럽보다 훨씬 앞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088년에 설립된 이태리 ‘볼로냐’ 대학은, 공식적으로 서구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의대와 법대가 유명하다. 하지만, 대학 설립초기 이 대학 의대는 아랍어 의학서적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사용하였다. 이집트의 ‘알 아자르’ 대학은 9세기경에 세워진 이슬람 최초의 대학이다. 지금도 남아있는 이 대학은 이제는 종교대학으로, ‘샤리아’ 율법 등에서 많은 교육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이슬라마바드소재대 국립과학기술대학(한국의 카이스트)

근세 들어, 이슬람은 서구열강의 식민지가 되었다.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은 인도도 오랫동안 유럽식 교육의 영향을 받았다. 산업혁명으로 발달된 서구를 모방하여야 했기에, 이들의 교육제도는 서구와 유사하다. 인도에서 분리 독립한 파키스탄은 중학까지 의무교육이지만, ‘영어 문법학교 (English Grammar School)’ 등 사립 중등교육 기관도 있어, 교육체계의 틀은 잘 갖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과기대 등 제법 유명한 서구식 대학이 있고, 학비가 저렴하여 일정한 학력을 가지면 누구나 입학한다. 


하지만, 이슬람이 국교인 나라에서는 물질문명의 세속주의와 종교주의 간 갈등은 만만치 않다. 파키스탄의 일부 고위직 관료들은 거의 부유층 자제들로서 영국 유학파나 기타 서구식 교육 기관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인지 중산층마저 외국에 대한 경외심으로 자국 내 외국계 대학을 선호한다. 그렇지만, 대부분 서민은 직업전선으로 내몰리니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언감생심이다. 부유층은 일반 서민과 달리 자본주의 경제 지식과 조상들이 물려준 부로 정치, 경제의 중심에 있지만, 꾸란에서 자신이 속한 사회를 바꾸라는 계시가 없어서인지, 사회를 바꿀 의지는 없어 보인다. 그저, 경제나 행정 관료로서 정부나 군부의 둿바라지 역할을 할뿐이다.


반면에, 대중들에게는 사회적 관심과 우선순위가 종교 제일주의이므로, 교육에서 종교적인 요소를 배제하기 힘들다. 미군의 아프간 침공사태를 통하여 ‘탈레반’ 반군이라는 표현을 많이 들었다. ‘탈레반’의 뜻은 원래 ‘배우는 사람들’이다. 어릴 때부터 주로 ‘마드라싸 (전통 이슬람 학교)’라고 하는 학교에 다니면서, 경전을 읽고 율법을 배우면서 이슬람을 체계적으로 배우는 이들이다. 이슬람은 종교가 사회를 지배하는 규범이다 보니 종교 교육을 받고, '사리아'위원회나 이맘 등 종교 전문가가 되려는 사람도 많다. 


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의 초, 중등 교육에서도 ‘꾸란’이 교육의 초점이 된다. 이들의 교육방식은 원래, 꾸란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무함마드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전통적인 구전에 의한 암송이었다. 마치, 우리 선조들이 오랫동안 ‘하늘 천, 따 지…’ 하면서 천자문을 외운 것처럼. 그래서, 꾸란 전체를 암송하는 사람을 ‘하피즈’라 칭하며 존중한다. 이처럼, 대부분 무슬림은, 꾸란 암송을 최우선으로 하며 그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 알라(신)를 기쁘시게 하는 일에 삶의 주안을 둔다. 


파키스탄 ‘카슈미르’ 지역의 무슬림 학교

'카슈미르' 시골 중학교 선생과 학생들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지역 주민은 거의가 전통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보수적인 무슬림들이다. 어느 날 유엔군 정전감시 임무로 지역 순찰 중, 우연히 길 옆의 한 중학교(‘마드라싸’와 다른 일반 중학교)를 방문하였다. 반갑게 맞이해 준 학교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편성된 교과 과정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이들의 교육이, 우리와는 교육 관점이나 목적, 추구하는 방식 등이 많이 달라서 다소 뜻밖이었다. 


이들은 학교에서 아랍어(꾸란), 우르드어(국어), 영어, 수학 그리고 이슬람 율법을 중점적으로 가르치고, 나머지, 사회, 과학, 가정, 음악, 미술, 체육 등에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는 듯하다. 영어도 공용어로서 대부분 말은 잘 구사할 줄 아니까, 문법에 주안을 둘 뿐이다. 


야외에서 수업 중인 학생들. 한국도 1960년대까지 교실이 모자라 야외학습을 많이 하였다.

교장은, "한국 학생들이 수학과 과학을 잘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하면서도, "그런 지식은, ‘사회가 풍요롭게 발전하는 데는 도움’이겠지만, 한 ‘인간이 자기만족 속에 경건하게 살아가는 삶’과는 거리가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마치, 밴담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 (1806-1873)이 말한 “만족한 돼지보다 ~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라는 철학과도 일맥 상통하는 듯하다.


그들은 조상이 물려준 전통, 지금껏 살아온 생활을 그대로 이어가는 것을 자기들만의 생활 방식으로 강한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보다 나은 미래에 대비하려고 매 순간 아등바등(?) 거리는 우리와는 가치관이 전혀 달랐다.


학생들 등굣길. 좁아도 차만 타면 즐거운 하루의 시작이다. 

삶에 대한 가치관이 이러니, 자신의 현세 처지가 비록 어렵지만, 오히려, ‘불신자’인 우리들을 가엾게 생각하거나 '물질 지상'을 외치는 우리의 모습을 경멸하기도 한다. 특히, 생활이 어려운 길거리 노점상조차 자신들이 ‘완벽한 신’을 믿는 일에 감사하며, 자신의 고통조차 신께서 정해준 것이라며 불평 없이 순응한다. 거기에는 내세의 운명에 대한 강한 믿음이 깔려 있다. 이를 보면, 마치 우리 고전인 ‘흥부전’이 연상된다. “가난하지만 선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라는 거다. 지난 1400여 년 동안 이들에게 이슬람은 종교지만, 율법이고, 사회생활 그 자체였다.


사회를 보는 시각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한 인간의 삶보다 꾸란을 비롯한 이슬람적인 것에 더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교육 목표는 서구나 우리와는 확연히 다르다. 물질문명을 추구하는 세속주의 학문과, 경건한 삶의 가치를 종교에 두는 종교주의 두 가지 중에 종교에서 더 큰 비중을 두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니, 문득, ‘인간의 기쁨과 행복을 위한 진정한 학문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춥고 배가 고팠던 우리 한국은 어느덧, 세계 최상급의 생활 수준과 과학기술 등 물질의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서열화와 점수 위주 교육으로 인간적 유대감과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모습을 잃었다. 2023년 발생된 튀르키예 대지진을 보면, 얼마나 많은 생존자들이 부모 형제는 물론, 사촌이나 조카까지 찾아 헤매는지...? 이들의 절규는 공동체를 잃은 우리에게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물질이 삶의 중심이 될까? 


어느 명문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에 따르면, "전공 학생 10명 중 1명 정도가 정치를 꿈꾸지만, 나머지는 로스쿨 입학 준비에 바쁘다"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많은 공대생들도 진로를 의대로 바꾸겠다고 하니... 변호사나 의사가 좋다지만 우리가 얼마나 세속주의 물질에 올인하는 건지...? 그런 가치관 때문일까? 한때, 우리 교육도 '인류의 복지를 증진한다'는 '홍익인간'의 개념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종적을 감춘 듯하다... 


그런데, 살다 보면, ‘무엇을 소유했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가 사람을 더 나아가게 한다. 세속주의적인 미국에서도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살도록 교육하는 유명한 '크리스천 스쿨' 사립대학도 많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종교마저 각자의 영역이 되었다. 그렇다고, 사회 교육적인 측면에서 물질이 개개인의 정신적 행복과 정서적 발달을 추구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물질에 찌든 병폐를 보면, 무슬림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우리의 입장이나 잣대로 재단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집착이 지나친 종교주의

물론, 이들에게도 문제는 있다. 이슬람 교리가, 1,400여 년 전, 우리 한반도에서 ‘신라’가 3국을 통일할 즈음에 만들어진 교리임에도, 오히려, '가장 늦게 만들어진, 가장 완벽한 종교'라며 무슬림들에게 오늘날의 과학이나 어떠한 상식보다도, 절대적인 정당성을 점하고 있다. 이처럼, 많은 무슬림은 물질 지상주의를 배격하고 경건한 삶을 살고자 하기 때문에, 어떤 일이 교리나 율법에 맞다고 하면, 그것이 공격적이건, 도전적이건, 말 바꾸는 법이건 간에 사회적으로 허용되었다. 심지어, 일부이긴 하지만 테러든, 명예살인이든… 온갖 만행도 자행한다. 그들의 인성이 나쁜 것이 아니라 교조주의에 물든 사고방식, 그게 그들의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서구의 관점에서 ‘반문명적, 반인륜적 행동’이라고 비난하더라도, '교리에 부합하는 일'이라는 확신이 있으면, 당하는 사람의 인권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이질성이나 괴리, 그리고, 이슬람의 비화합성으로, 가끔씩, 무슬림과 비무슬림 간에는 서로 충돌을 회피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기곤 한다. 필자가 만난 중학교 교장선생님 등 교육자들의 생각이 바로 아이들에게 그대로 투영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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