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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소소한 일상

by 앤노트

난 어릴 때부터 정치, 시사에 관심이 많았다.

중학교 때도 특별활동은 늘 시사토론반을 선택했던 기억.

어쨌든 중국교환 학생을 다녀오고 대학 3학년의 나는 어학시험을 준비하느라 강남의 모 학원을 다녔었다

그런데 수업을 같이 듣던 남학생이 어느 날 나에게 필기

노트를 빌려 달라고 했다.

나는 기꺼이 노트를 빌려줬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고 돌아가려는데 그 남학생이 같이 밥을 먹고 가자고 했다. 노트를 빌려줬으니 자기가 사겠다고.

... 아 이건 제법 하트 시그널..(그때는 몰랐다는 게 문제)

하지만 학원이 끝나고 제법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가 제안한 파스타집을 가기에는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가게는 가격대가 좀 있었던 곳이어서 그 친구에게 비싼 돈을 쓰게 하는 게 좀 미안했다.

내 노트의 가치가 그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참 단순..ㅋ)

그래서 나는 거긴 됐고 맥도날드나 가자고 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남학생의 표정은 미묘했다.

그렇게 늦은 시간에도 대낮처럼 환하고 시끄럽게 북적

대는 강남 시티극장 아래에 있던 맥도날드로 갔다

그리고 나는 가장 큰 햄버거를 주문했다.

그 남학생은 나에게 [여자들은 치즈버거만 먹는 줄 알았

]라고 했고 나는 [그 맛없는 걸 왜 먹죠]라고 말하고는

내 큰 햄버거를 신나게 먹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정치 이야기를 했다.

역시나 아주 신나게.

그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내 이야기를 다 들어줬고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그 이후 나는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고 [미쳤구나]라는 일관된 평을 들었다. ㅎㅎ

그리고 그 조언을 받아들여 나는 더 이상 남자에게는 정치 얘기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사실 놀랍게도 나는 그 남학생이 꽤 마음에 드는 상황

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되는 바와 같이 그는 더 이상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리고 20여년이 훌쩍 지난 오늘,

갑자기 그가 문득 생각났다.

잘 지내시죠?

저 요즘 정치에 흥미가 떨어졌어요

시사, 정치 얘기 잘 안 해요.

그리고 누가 비싼 밥 사준다고 하면 거절 안 해요

하지만 치즈버거는 여전히 안 되겠어요.

맛이 없어요.

역시 우리는 인연이 아니었나 봐요.

아무쪼록 잘 지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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