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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파이 Jan 18. 2023

시작은 미약하나...

달리기 하고 책 읽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시작 편

  내가 달리기를 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제일 많이 받은 질문"달리기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어요?"이다. 진짜 이 질문을 제일 많이 받았다.  달리기를 하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달리기는 크게 재미있어 보이지도 않고, 힘들고, 고된 운동이라고 느껴지는 것 같다. 이렇게 힘들고 재미없는 운동을 하게 된 데에는 극적이거나 드라마틱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면 어떻게 하면 달리기를 취미로 할 수 있는지 진짜 궁금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달리기를 시작하고 싶은 생각으로 물어볼 수도 있겠다.  책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도 "왜 책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언제부터 책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같은 질문을 몇 번 받은 적이 있다. 사람들은 달리기나 책 읽기의 시작을 궁금해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모든 활동은 그 시작이 궁금해진다. 누군가가 피아노 치는 것이 취미라고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해도 같은 질문을 받을 것이다. 모든 것에는 시작이 그만큼 중요한 것다. 시작이 없으면 좋아하고 즐기고 있는 지금이 없었을 테니까...


나에게 달리기와 독서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너무 거창한가? 그래도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진짜 운명이었다. 나의 과거들은 내가 독서와 달리기를 할 수밖에 없게끔 길을 만들어온 것 같다.   달리기나 독서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 인정할 것이다. 달리기나 독서를 좋아하기 위해서는 이것밖에 돌파구를 찾지 못한 경우가 많다. 너무 힘든 시련이 있었거나, 힘들었던 어느 시점에 달리기나 책 읽기가 자신이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였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나에게 그것들의 시작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나는 얼른 "내 숨구멍!"이라고 단숨에 대답을 하지 못하지만 천천히 되돌려 생각해 보면 나도 그랬던 것 같다.  물론 그런 시련이 없이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한번 달려보니까 재미있었다지,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살도 잘 빠지고 재미있었다든지, 원래부터 가족 분위기가 책을 많이 읽는 분위기여서 자연스럽게 책을 많이 읽게 되었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어렵고 힘들었을 때  내 자존감을 유일하게 올려주고, 내가 숨 쉴 수 있게 해 주고, 내 곁을 지켜준 것으로 자신이 좋아한 것을 꼽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내가 가장 좋을 때 찾아온 것보다 내가 가장 힘들 때 나를 버티게 해 준 것들이 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달리기를  시작하게 된 것은 내가 가진 직업으로 인한 소진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상담을 하는데, 상담이라고 하는 것이 공감이나 경청만 잘해주면 될 것 같지만 나의 에너지를 많이 쓰는 작업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너무 여유가 없이 상담이 계속 이어지거나 내가 감당하지 못할 큰 사안에 대한 상담이나, 내가 자책감을 느끼거나 실수하거나, 그냥 이유도 모르게 지칠 때, 실패한 것처럼 느껴지고,  무기력하고, 도망가고 싶을 때, 이럴 때는 '소진(burn out)이 왔다고 볼 수 있다. 진이 오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무기력하고, 우울하며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나기도 했다. 하기 싫어서 일을 꾸역꾸역 하면서 목적 없이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루를 마치고 자리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도 했다.  '내가 뭘 잘못했지?' '다 내 잘못인가?'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날들도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처음엔 '무작정 걷기'부터 시작했다.  나는 끊이지 않을 것 같은 길을 정해 그저 몇 시간걸었다. 주말이 되면 하루에 20~30Km씩 걸었다. 걸으면서 많은 생각도 하고 아무 생각도 안 하기도 했다. 음악듣고 오디오북 들으면서 몇 시간씩 걸었다. 

  러다가  55Km 걷기 대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냥 항상 물 한 병을 들고 걸었기 때문에 큰 준비 없이 배낭에 물만 한병 넣고 대회에 참석했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이건 정말 나의 패기였다. 55Km를 걷기 위해서 발목과 무릎에 테이핑도 감고 오고, 간식이나 에너지 젤, 여러 가지 힘나는 음식을 챙겨 먹는다는 것을 나는 몰랐던 것이다. 이럴 때 나의 장점은 용감하다는 점이다. 다행히 나와 함께 동행해 준 좋은 분들을 만나서 간식달래부터 시작해서(태어나서 달래라는 열매를 처음 먹어봤다.) 에너지바, 양갱, 사탕 등 종류대로 얻어먹고 여러 가지 조언도 들으며 걷기 대회를 무사히 완주할 수 있었다. 그 대회는 밤을 새우며 걷는 대회라서 30Km  이상 넘어가자 온몸이 다 아프기 시작했다. 내 다리는 더 이상 내 다리가 아니었고, 정신도 몽롱해졌다. 다리가 앞으로 안 나가는 것 같은데, 계속 걷고 있는 게 신기했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걸으면서 나가 왜 이 대회에 참석하게 되었나. 나 자신을 원망하며 걸었다. 같이 동행하신 분들이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어도 며칠뒤에는 또 생각이 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절대 아닐 것이라고 호언 장담했다. 완주 후 나는 나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집에 들어갔지만, 정말 낮잠한숨 자고 나니 거짓말처럼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 몸에서 아마 그 고통을 이기기 위해 엔도르핀 같은 호르몬을 엄청 뿜어댔나 보다. 엄청난 중독성이었다. 그 이후에도 나는 그 중독성을 잊지 못하고 한번 걸으면 4시간 이상씩 걷기 시작했다. 다리가 뻐근하게 아플 때까지 걷고 나야 중독된 그 호르몬들이 나와서 잠깐 산책하는 정도는 성에 차지 않았다. 오래 걷기는 그렇게 꽤 중독적이고 치명적이었다.

  오래 걷는 것은 중독이라는 것 말고도 마음의 안정과 걱정거리를 덜어주는 것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걱정이 많을 때 다리가 아프고 더 이상 못 걸을 때까지 걷고 나면 그 걱정들이 작아져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을 때가 많다. 이런 이점 때문에는 나는 걷는 것을 아주 좋아했지만 오래 걷기는 주말에만 할 수 있는 점과 시간이 많이 든다는 점 때문에, 또, 뭔가에 중독된 사람들이 내성 때문에 더 강한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되는 것처럼 나도 자연스럽게 달리기로 갈아 뛰게 되었다. 걷기보다 빠른 시간에 빠른 몰입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30분만 달려도 중독성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호르몬이 나왔다. 나는 결국 운명적으로  달리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누구나 그렇듯 처음에는 100미터도 달리기 힘들다. 내가 풀코스마라톤을 뛰는 것을 보고 주변 사람들은 5분도 뛰기 힘든데 4~5시간을 어떻게 뛰냐고 물어본다. 나도 처음에는 2~3분 뛰는 것이 한계였다. 하지만 달리기 만큼 빨리 느는 것이 없다. 처음에는 2~3분 밖에 못 뛰지만 점차 시간을 늘려서 뛸 수 있다. 오늘보다 내일은 더 오래 달릴 수 있다. 일 달리면 어제보다 성장한 내가 눈에 보인다. 그렇게 늘려나가다 보면 5Km, 10Km, 하프, 풀코스 마라톤을 국은 뛸 수 있게 된다.

   하고 많은 운동 중에 달리기를 선택한 이유는 또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나 혼자,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다른 운동은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맞춰야 하고, 그 운동하는 장소까지 가기도 해야 한다. 수영이나 헬스를 하려고 해도 수영장과 헬스클럽  문 여는 시간에만 할 수 있다. 워킹맘인 나는 운동을 위해서 따로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출근하면 일을 하고 퇴근하면 다시 육아시작이다. 퇴근이 없는 인생이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이 운동하는 시간에 규칙적으로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달리기는 새벽 4시에도 나가서 달리면 그만이었다. 헬스클럽처럼 돈을 지불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나가서 달리면 되니까 시도해 보고 아니다 싶으면 접으면 그만이었다.  리기는 나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동시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책을 열심히 읽게 된 계기도 내가 힘들 때였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어릴 때 대학가 앞에서 만화가게를 운영하셨다. 집이랑 붙어 있는 가게 구조여서 자연스럽게 많은 책(만화책)을 접하게 되었다. 그 만화책들이 어렸던 내가 보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만화책도 있었지만 엄마의 검열로 내가 봐도 크게 문제없을 책을 골라주셨다. 그 당시 내가 읽었던 책은 어른들이 보는 만화책, 박봉석, 고행석, 이현세  이런 작가님들이  쓴  만화책으로 나와 같은 세대의 친구들은 잘 모를 것이다. 나는 6~7세 때부터 대학생들이 즐겨보는 만화책을 보기 시작했고,  글자도 잘 모르던 때부터 만화책을 읽으며 한글을 뗐다.(이런 내 기억에서 왜곡된 부분일 수도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만화책만 보고도 한글을 떼는 천재 어린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때부터 글짓기를 좋아했었고 책도 제법 많이 읽는 편이었다. 특히 시험기간에 읽는 제인에어, 폭풍의 언덕과 같은 브론테 자매의 책 특히 좋아했고, 문고판 세계문학들은 왜 그렇게 재미있었는지 모르겠다. 조금만 읽고 공부를 할 거라고 서서 보기 시작해서 몇 시간 동안 책을 읽고 시험공부를 못하기도 했다. 그런 10대 시절을 거쳐 대학교 다닐 때는 책을 잘 읽지 않았다. 책을 읽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임용시험공부를 할 때는 공부에만 몰입한다고 책과는 거리가 멀어지기도 했다. 직장인이 되어서도 읽기는 했지만 지금만큼 읽지는 않았다. 내가 책을 연간 100권 이상 읽기 시작한 것은 육아휴직을  할 때부터였다.  

  나는 남매 쌍둥이를 낳았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은 어느 정도는 짐작을 할 수도 있겠다. 정말 내 시간이 너무 없다는 것, 머리는 2~3일에 한 번씩밖에 감지 못하고, 하루종일 기저귀 갈고, 수유를 하면 하루가 다 갔다. 아이들은 너무 이뻤지만, 나는 그때 당시 우울했던 것 같다. 잠도 잘 자지 못하는 데다 1년 동안 할머니들처럼 집에 있는 물건들을 버팀목 삼아 집고 다녀야 겨우 걸어 다닐 수 있을 만큼 몸은 망가져 있었고, 거울 속에 나는 임신으로 인한 살이 빠지지 않은 부스스한,  나이보다 10년은 늙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몸에서 생기나 좋은 것은 다 빠져나가버린 그런 몸을 가지고 하루종일 말도 안 통하는 아기들을 돌보는 일은  행복하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부스스함과 우울 속에서 나를 찾으려고 발버둥 친 것이 독서였다. 육아휴직으로 내가 월급이 없었기 때문에 궁핍한 가계 사정으로 책을 다 사보지는 못하고, 나는 동네 도서관에 가기 시작했다. 쌍둥이를 키웠지만 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 키우는 형편이라 도서관에도 우리 쌍둥이들을 데리고 가야 했다. 걷지도 못하는 애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나는 도서관까지 걸어갔다. 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는데, 거의 평지를 가다가 도서관 올라가는 길이 오르막길이어서 마지막에 힘쓸 일을 각오하고 가야 했다. 그 와중에도 누군가가 나를 도와준다고 할 까봐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유모차를 힘차게 몰았다. 나는 누가 나를 돕는 것을 싫어한다. 그 와중에도 자존심이 센 편이다.  우리 쌍둥이들은 유모차를 타고 걸으면 잘 잤는데, 유모차를 세워놓아도 10분~20분 정도는 자는 편이어서  그동안이 내가 책을 빌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열람실 앞(다행히 유리문이었다. )에 유모차를 주차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고, 곁눈질로 혹시나 깨지 않았는지 확인을 해가며, 책을 봤다. 원래 잘 못하는 환경에 있으면 더 하고 싶은 법이다. 공부도 하지 말라고 하면 기를 쓰고 하고 싶어지는 것처럼. 책을 보기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면 나는 책을 안 읽었을지도 모른다. 10일에 총 5권을 빌릴 수 있었다. 남편 카드도 발급받아 10권씩 빌리기도 했다.  그렇게 빌린 책으로 시간을 쪼개가며 책을 읽었다. 유모차 지붕 위에 올려놓고 걸으면서 책을 보기도 하고 아이들이 낮잠 자는 시간에 옆에서 누워 같이 책을 읽기도 하고, 새벽에 4~5시에 일어나 책을 읽기도 하였다. 지금은 그렇게 읽으라고 해도 못 읽을 것 같은데, 그때는 허기진 사람처럼 허겁지겁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쌍둥이를 키우면서 책을 1년에 130권씩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서 책을 보는 것은 꽤 컸다. 아마 책을 본다는 핑계로 다른 집안일과 육아를 소홀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책을 보는 것 때문에 육아와 집안일을 소홀히 하면 나 스스로 납득이 되고 합리화할 수 있고, 괜찮은 것 같았다. 사실 지금 그때 무슨 책을 읽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하지만 책이 없었으면 내가 더 힘들고, 우울하고, 안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때 읽었던 책이 분명 지금의 나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달리기와 독서를 좋아하는 것은 내가 힘들 때 나를 버티게 해 준 것들이 때문이다. 지금은 내가 힘들었던 시기만큼 힘들고 어려운 시기는 아니지만 이 둘은 아직도 내 옆을 지키고 있다. 나는 지금 힘들지 않지만 아마 달리기와 책 읽기 덕분에 힘들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다. 나에게 힘든 일이 와도 나는 잘 견뎌 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숨구멍을 찾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달리기와 책 읽기의 시작은 내가 현재를 더 잘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시작이었을 것이다. 렇게 더 잘 견딘다는 것을 성장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 힘든 시간을 통해서 나는 달리기와 책을 만나게 되었다.


55Km걷기대회 참가한 사진 2019.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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