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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의 정원

by 최점순


어머니의 정원 / 최점순


경의선 숲길을 걷는다. 후덥지근한 날씨에도 산책로는 나무들이 많아 시원했다. 바위틈에 활짝 핀 빨간 접시꽃이 눈에 들어온다. 꽃말은 풍요의 상징이다. 작은 잎에 비해 아주 크고 활짝 핀 모습이 아름답다. 꽃잎을 만지다가 유월에 시집살이를 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신혼여행 다녀오다가 소낙비를 맞았다. 가방을 든 신랑은 앞만 보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젖은 치마를 허리에 동여매고 집에 도착하니 식구들이 반겨주었다. 시부모님과 일곱 형제들이 한집에 살았다. 아침마다 한복을 입고 어른들께 문안 인사를 드렸다. 시아버지는 겉보기에도 자상해 보였으나, 시어머니는 체구도 크신데다 말씀이 없어서 조심스러웠다. 신랑은 운동선수협회에서 장거리 훈련을 떠나면 한 달씩 걸렸다. 낯설고 물선 공간에서 무척 외로움을 탔지만, 담장 밑에 활짝 핀 접시꽃을 보며 고된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삼 년 가뭄 끝에 갈라진 논바닥에 빗물이 콸콸 들어갔다. 시아버지는 덕담하시듯 용띠인 며느리가 들어오니 풍년이 들겠다고 하셨다. 식구들은 손을 모아 모심기를 하러 갔고, 나는 고무 다라에 밀가루와 고추장, 된장을 풀었다. 텃밭에 지천인 부추와 붉은 고추를 숭숭 썰어 넣고 새참으로 장떡을 쪘다. 일하다가 집안 풍경을 둘러보니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흙담이 집 둘레는 감싸 안았고, 마당과 장독사이에 심어놓은 접시꽃과 목단, 작약, 수국 나무는 탐스러운 보라색 꽃을 매달고 있었다. 땅에 납작 엎드린 채송화가 처음 본 나를 보고 웃었다.


우리 집은 어머니가 가꾸는 정원이다. 한 탯줄에 일곱 남매들이 우후죽순처럼 자라서, 아들이 장가들고, 딸은 시집가서 사위가 들어왔다. 문화와 칼라가 다른 사위와 며느리도 하나같이 소중했다. 옆방, 뒷방, 아래채, 안방에서 다섯 며느리들이 시샘하듯 임신을 하면 입덧을 연달아 했다. 친 손, 외손자들이 몇 명씩 태어나면, 어머니는 기도의 손으로 정성껏 돌봐 주었다. 한 여름에 소낙비가 쏟아지면 흙 마당은 어린 조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고만고만한 두세 살짜리 아기들이 천방지축으로 뛰어놀곤 했다. 어른들은 사랑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인 꽃들에게 흐뭇한 미소를 보냈다. 이상하게도 사이좋게 놀다 말고 서로 주먹으로 때리고 얼굴을 손톱으로 할퀴었다. 아이들 싸움에 어른 싸움된다고, 우애 좋던 동서들도 가끔씩 얼굴을 붉히곤 했다. 그때마다 시어머니는 한 사람씩 불러놓고 조용조용 타일렀다. 그러다가 이편저편도 들지 못하면, 아기가 없던 나에게 답답한 마음을 하소연을 하신 후 입단속을 시켰다. 어머니 눈에는 아들 며느리, 손주뿐만 아니라 가축과, 과일나무와 채소도 꽃이었다.


처마 밑에 암탉이 피워놓은 노랑꽃이 삐악거리고, 토종돼지가 낳은 새끼들, 집을 지키는 검둥이가 낳은 강아지와 특히 우리 집에 목돈을 만들어 주는 황소와 암소는 그 많은 논과 밭을 갈아주는 일꾼이고, 송아지를 키워서 자식들 살림밑천으로 한 마리씩 몫을 지워주었다. 대가족의 찬거리 감자와 무, 배추, 전구지, 고추 마늘이 눈만 뜨면 넘실거렸다. 아이들 간식거리로 여름철 참외와 수박, 복숭아, 자두가 최고였다. 가을이면 주렁주렁 달리는 황금색 배와 누런 감, 빨간 사과도 어머니에게는 모두가 아름답고 탐스러운 꽃이었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 살면서도 방황하는 신랑 때문에 속을 앓았다. 골목길에 혼자가 서성거리다가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면 밤을 홀랑 새웠다. 그러다가 어느 날 대가족의 수발이 힘겨워 밥맛을 잃었다. 가마솥에 짓은 봉긋한 쌀밥은 먼저 어른들 밥그릇에 퍼 담고, 시숙들, 어린 조카들의 밥까지 푸고 나면 솥 밑바닥에 꽁보리밥만 남았다. 고된 시집살이를 견디려고 밥을 물에 말아 꾸역꾸역 삼키다가 목구멍에 막혀버렸다. 며느리들 중에 몸이 약한 내가 아픈 손가락이었을까. 어머니는 경로당에 다녀올 때마다 간식거리를 치마폭에 숨겨왔다. 어느 겨울밤, 문밖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리면 숨을 죽이고 있다가 문이 닫히면 벌떡 일어났다. 봉지를 풀어보면 따끈한 국화빵에서 달콤한 팥 향기가 방안을 가득 매웠다.


저기, 꽃밭이 일렁거린다. 시어머니의 정원에서 우리 가족은 꿈과 희망을 키웠다. 오래전에 먼 길을 떠났지만,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철 따라 흰 꽃, 빨강, 노랑, 파랑, 검은 꽃이 피고 진다. 유난히 빨간 접시꽃을 좋아하셨는데, 꽃이 되었을까. 나비가 되었을까. 경의선 숲길에 핀 접시꽃을 보니 그리움이 사무친다. 올해는 어머니를 닮은 정원을 만들어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그들이 가꾼 꽃향기가 멀리멀리 날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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