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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는다

by 최점순


길을 걷는다


오늘도 새벽길을 걷는다. 오랜 세월 오고 갔던 발자국이 말을 걸어온다. 꽃다운 젊음을 길 위에 묻었고, 삶의 오르막 내리막을 묵묵히 걸었다. 눈비 내리면 온몸으로 맞았고, 서릿발 같은 찬 바람이 불 때면 낡은 옷깃을 여몄다. 간밤에 내린 하얀 눈 위로 딸과 아들의 손을 잡고 걸으면 뽀드득뽀드득 경쾌한 발소리도 따라왔다. 신앙의 길, 인생의 길을 한 걸음씩 옮길 적마다 울고 웃었던 순간들이 눈에 선하다.


젊은 시절 성당에서 영세를 받았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다는 기쁨이 행복의 지름길이었다. 매일 받은 은혜를 성체조배로 신앙의 기초를 놓았다. 풋 열정을 쏟으며 성경 공부를 했던 순간들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가난이 따라다니는 동안 축복을 많이 받고 싶은 기복신앙이었을까. 입만 열면 엄마에게 떼를 쓰는 아기처럼 “남편과 아이들이 건강하게 해주십시오. 집을 주세요. 자식들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게 해 주세요.” 하며 졸라댔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복은커녕 남편은 이직을 밥 먹듯이 했고, 오랜 실직으로 해가 갈수록 살림살이가 쭈그러들었다.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은 옛말이었다. 가난을 대물림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야속했다. 물질적 축복을 못 받을 거면 차라리 뿌리 깊은 신앙을 물려주고 싶었다.


봄이 되면 오르막은 별천지 풍경이 펼쳐졌다. 긴 겨울 동안 삭 바람이 불고 무덤처럼 황망하던 길섶에도 노란 강아지풀과 보라색 제비꽃이 화사한 얼굴을 내밀었다. 길동무가 되어준 흰나비 노랑나비, 재잘거리며 머리 위로 휙휙 날아다니는 참새, 굴뚝새들의 노래를 들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아침에 성당으로 출근하면 종일 일거리를 찾아 봉사를 했다. 한낮에 집으로 내려오면 봄을 밀치고 여름의 가마솥 햇볕이 얼굴에 내리꽂혔다. 뜨거운 열기를 식혀줄 소낙비가 한소끔 쏟아지는 날 아이들과 손잡고 걸음아 날 살려라 뛰어오면 나는 늘 꼴찌였다. 돈 한 푼들이지 않고도 가족의 행복한 비명이 메아리가 되어 집안 가득히 울려 퍼졌다. 허영에 들뜬 세상 욕심을 비워내고 초라한 본연의 모습을 받아들였다. 행복이 뭐 별건가 건강하면 만족해야지. 우리 형편에 천지개벽이 일어난들 신앙과 돈,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을 수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했다.


눈만 뜨면 오르막 내리막길을 뛰어다녔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성능이 뛰어난 스위스 시계보다 정확하다는 말했다. 내가 성당 갔다 내려오면 아침밥을 하는 시간이라며 농담을 하곤 했다. 언덕에 올라서면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일흔한 분의 성직자 묘지가 기다렸다. 험한 세상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손에는 묵주를 들고 무덤을 몇 바퀴 돌았다. 잠시 숨을 고르다 보면 그늘진 마음에 환한 빛이 깃들었다. 매일 암송하는 성경 구절은 꿀송이보다 더 달달해서 허기진 영혼에 큰 위안을 주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늘었다. 삶의 유일한 낙이라면 성당에 앉아 성체조배 하는 시간이었다. 한 해 두 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허탈하던 마음이 영성적으로 성장하여 영혼의 허기도 해갈되었다.


세상 물정을 잘 몰랐다. 높은 꼭대기에서 서울의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저 넓은 지역에 빌딩과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섰는데 우리의 둥지만 없었다. 신앙으로 세상에 대한 욕망을 겨우 다독이던 중에 기복신앙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아이들과 함께 살 집이 절실했고 근근이 모아 놓은 종잣돈으로 작은 집을 샀다. 우연인지 축복인지 88올림픽을 유치한다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그동안 간절하게 바쳤던 기도 덕분이라고 믿고 받아 들렸다. 신기루같이 달동네가 햇볕 동네로 변신하는 붐을 타고 우리 집도 재건축을 하게 되었다. 이웃들과 한 동네 살면서 울고 웃으며 어려움을 나누었던 사람들은 하나 같이 변두리로 밀려났다. 젊은 시절 소중한 사람들과 헤어지게 하는 변화가 행복만 주는 것은 아니었다. 돈이 많은 낯선 사람들로 물갈이를 하는가 했는데 새 아파트 평수에 따라 친구가 갈리는 이상한 세상으로 변질되어 갔다. 살림이 윤택해질수록 인심은 삭막해져갔다. 주차장에는 외제 승용차들이 빼곡하게 들어찼지만 소외감만 짙게 드리워졌다.


삶의 길을 걷는 동안 기쁨과 슬픔이 교차했다. 설렘으로 걷다 보니 무지개 색깔로 물들어갔다. 나의 인생의 계절도 알록달록한 단풍처럼 익어가는 것일까. 아니면 굴곡이 많았던 삶의 길에서 속도가 붙은 것일까. 오르막길 내리막길을 걷는 동안 관절 뼈마디가 헐거워지고 눈도 침침해졌다. 길가 나무들은 겨울을 맞이하기 위해 여름내 무성했던 잎을 땅으로 떨어뜨리고 있다. 내게도 나무처럼 하늘 높은 줄 몰랐던 이기와 욕망을 비워내라는 신호일까. 고사리 같은 손 잡고 앙증맞은 운동화 삑삑이 소리로 새벽을 깨웠던 시간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혼자 걸어가는 길 위에 청춘의 발자국은 세월의 비바람에 휩쓸려가고 자식들은 성장해서 출가를 했다. 늘 아웅다웅하며 지내던 우리 부부의 이런저런 푸념도 이제는 미소로 번지는 황혼을 맞이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인생의 사계절이 휙 지나갔다. 이제 홀로 걷는 새벽길에는 상큼한 봄꽃 향기가 코로 스며들고, 벌 나비도 나를 향해 춤을 추는 듯하다. 언덕길에 심어진 나무가 낙엽을 떨어뜨리듯 인생의 붉은 잎을 비워내서 중년이 된 자식들의 앞날에 거름으로 깔아 주고 싶다. 언젠가 그들도 나와 함께 걸었던 이 길을 자식들의 손을 잡고 걸어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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