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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찾아 삼만리

by 최점순



첫딸이 세 살 무렵 추운 겨울, 둘째인 아들을 출산했다. 산후조리 기간에 남편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한 달이 지난 뒤에 당당하게 취업을 했다며 돌아왔다. 군대에서 부상당한 허리와 다리가 재발을 할 때마다 희망을 잃곤 했다. 남편은 아이가 태어나자 가장의 책임이 크게 다가왔던 모양이었다. 서울로 올라가 학원에서 쪽잠을 자며 안간힘을 쓰며 살았다고 했다.

그날 밤 친구들과 어울려 아들 낳은 턱을 낸다고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 낯선 여자 이름을 중얼거렸다.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남편에게 취업한 회사와 전화번호를 받아냈다. 남편이 서울로 올라갔는데 나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우리 집에는 대가족이어서 눈이 많았다. 살짝 큰형님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설마,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을 거라며 말끝을 흐렸다.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8월 15일 광복절 날이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로 ‘김 서방네’를 찾아가듯 올라갔다. 아기를 업고 서울로 가는 완행버스를 타고 마장동 터미널에 도착했다. 공중전화에 백 원짜리 동전을 넣고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음이 울리더니 아가씨가 전화를 받았다. 김** 부장님을 바꿔 달라고 했다. 회사 직원 명단에 없는 이름이라며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순간 건너편 여인숙 아크릴 간판에 뜨는 전화번호가 보여 재빨리 불러주며 연락을 기다릴 거라고 했다.

구석진 방 하나를 잡았다. 어둑해지는데 감감무소식이었다. 종일 밥도 먹지 못해 몸과 마음은 천근만근이었다. 방바닥에 누워 아기에 젖을 빨리다가 살짝 잠이 들었다. 꿈결인 듯 방문이 스르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번쩍 뜨니 남편이었다. 어이가 없는 듯 나와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조용한 폭풍전야 같았다. 남편이 주먹으로 방문을 ‘쾅’ 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혼절할 뻔했다.

“첫 순정을 당신에게 바치고 사랑했는데, 왜, 믿지 않아….”

여자들을 한 트럭을 싣고 와도 관심 없다며 소리를 질렀다. 여인숙 문밖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남편은 입장이 불리할 때마다 첫 순정을 소환해서 써먹곤 했다. 아기를 재워 놓고 서로 자기주장이 옳다며 옥신각신 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회사에서는 신입사원이라 눈코 뜰 사이도 없고 여자의 여자도 모른다며 딱 잡아뗐다. 나는 궁지로 내몰렸다. 우리는 서로 등을 돌리고 빗방울 소리가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긴 밤을 새웠다.

남편의 끈질긴 설득에 마음이 서서히 풀렸다. 이튿날 십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내 손에 쥐여 주면서 추석에 내려갈 테니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터미널 식당에서 국밥 한 그릇을 사주었다. 내가 아기를 안고 밥을 먹는 동안 남편은 밖으로 나갔다. 식당 아주머니가 아기를 봐 줄 테니 따뜻할 때 먹으라고 권했다. 그러고는 눈짓과 턱짓으로 누구냐는 듯 물었다. 나는 웃으며 아기 아빠라고 말했다. 초면인데도 아주머니에게 내가 서울에 온 이야기를 했다. 아주머니는 혼잣말처럼 팔자가 꼬이게 생겼다고 했다. 아주머니도 남편의 직장 때문에 떨어져 살았는데 6년 만에 올라오니 딴 여자에게 태어난 자녀가 몇 명이 있더라는 것이었다. 남자는 본능에 충실하다며 서울에는 돈만 있으면 모두 해결되니 올라오라고 넌지시 말했다.


버스가 시골에 도착했다. 동네 사람들에게 남편을 따라 서울 간다고 소문을 냈다. 시집올 때 해온 돈이 될 만한 세간살이를 정리하기로 했다. 자개장롱은 오만 원, 책상 만 원, 큰 들통, 밥그릇 세트, 냄비 세트, 밥상까지 종이에 가격을 써 붙여 놓았다. 금방 소문이 퍼져나갔다. 저녁 무렵 몇 사람이 집으로 찾아와서 몽땅 떨이해 갔다. 시어른들과 형님들이 나의 당돌한 행동에 혀를 내둘렀다. 철도 없이 가족들과 한미다 상의도 하지 않고 혼자 결정을 했다고 야단을 쳤다. 개를 쫓아도 나갈 구멍을 열어 놓아야 한다지만 나의 마음속에는 국밥집 아주머니의 말만 생각났다.


추석에 남편을 따라 서울로 이사를 왔다. 건설회사에 다니는 남편은 지방 출장을 자주 갔다. 아기를 업고 손을 잡고 강원도 산골까지 찾아다니곤 했다. 국밥집 아주머니가 해준 이야기를 되새기곤 했다. 그분의 조언 덕분에 여자로서 긴장하고 살게 되었다. 가끔 신뢰가 무너지는 일이 생기곤 했다. 그런데도 남편은 가정에 성실한 사람이었다. 돌아보면 내 옆에서 세상의 비바람을 막아주는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남편을 바라보았던 일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아침상을 차린다. 남편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나란히 놓는다. 나를 도와주려고 청소기를 돌리고 분리수거를 해준다. 한바탕 꿈인 듯 젊음이 흘러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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