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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선물

by 최점순

두 개의 선물

대청소를 했다. 책장 위에 먼지를 닦기 위해 의자를 놓고 올라갔다. 오른쪽 구석에 꽂혀 있던 앨범을 거실 바닥에 내려놓았다. 때가 찌든 사진첩을 물티슈로 꼼꼼히 닦으며 들추었다. 빛바랜 사진들 사이에 편지 봉투가 툭 불거져 나왔다. 언제 누구한테 받은 것일까. 긴 잠을 자고 일어난 듯이 표지가 낡고 부스스했다. ‘부모님 전 상서’라고 쓰여 있다. 아들이 경기도 306부대로 발령을 받은 시기에 보낸 글이었다. 그 편지를 다시 읽게 되어 반가웠다. 손글씨로 깨알같이 빼곡하게 써 내려간 사연을 읽는데 말문이 막혔다. 어디선가 들어 본 말이었다.


45년 전, 문경 가은으로 시집왔다. 남편은 탄광촌에 살았지만 운동선수였다. 입대를 앞두고 월남전이 한창이라 늦추었다. 다시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남편이 군대 가기 전날 얼굴 보고 헤어지기 어려우니 나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알았다고 말하고는 역 뒤에 숨어서 보았다. 역장님이 표를 검사하고 깃발을 올렸다. 칙칙폭폭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쪽을 향해 부디 무사하기를 간절히 기도를 바쳤다. 앞으로 신랑 없는 시집살이를 어찌 하나, 한숨도 나왔다. 그때였다. 기차에서 사슴 한 마리가 훌쩍 뛰어내렸다. 양복 주머니에서 봉투와 메모지를 꺼내더니 내 손에 꼭 쥐여 주었다.


“여보, 군대 가면 돈이 필요 없어, 차비 해서 친정으로 가서 기다려.”


가은역에서 출발하는 기차였다. 남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뛰어올랐다. 망부석처럼 서 있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양손으로 입에 나팔을 만들어 소리쳤다. “엄마한테는 당신 친정 꼭 보내 달라고 말했으니 걱정하지 마.” 역장님이 출발 신호로 호루라기를 후루루 불었다. 기차가 철로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꽁무니를 쫓아가다가 주저앉고 말았다. 손에 쥔 봉투가 물먹은 종이처럼 허물거렸다. 시부모님과 형제들이 십시일반으로 군대 가서 배곯지 말라고 준 돈이었다. 말씀드릴까, 고민 끝에 시어머니의 젖은 얼굴이 떠올랐다. 부부는 일심동체라 하지만,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보다는 많이 부족했다. 만약에 시어머님 같았으면 맨발로 뛰어 올라가 찔러 주었을 것이다. 남편이 준 봉투 속에 십만 원이 들어 있었다. 당시 공무원 한 달 월급이 3만 원이니, 몇 달 신랑 없는 시집살이에 나를 지켜 준 돈이었다.


시어머님이 부르셨다. 그 녀석이 집사람 친정에 빨리 보내주라고 했다며 혀를 끌끌 찼다. “내일 친정에 가 있다가 명절에 한 번씩 오너라.” 하셨다. 하얗게 밤을 지새고 대구행 기차에 올랐다. 몇 달 전 신혼 여행길에 둘이서 보았던 밤하늘의 성근 별이 총총 빛났다. 친정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기차를 타고 시외버스와 완행버스까지 타고 종일 갔다. 저녁 무렵에 도착했다. 캄캄한 밤에 달과 별들도 잿빛 속으로 숨어버렸다. 친정에 도착한 후 편지가 연일 날아왔다. 훈련 받고 특수 부대로 발령받았다고 했다. 간밤 꿈에 남편과 바닷가를 거닐다가 깨어났다. 꿈은 반대라고 했던가? 전보가 빗발쳤다. 남편이 군대에서 사고를 당해서 부산 통합병원으로 이송 중이라고 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새벽에 집을 나섰다.


그날 고속버스가 개통되었다. 동대구역에서 부산 가는 그레이 하드였다. 나는 면회하러 가기 위해 고속버스를 탔고 빠르게 달렸다. 부산이 친정인 어느 임산부가 고속버스를 타고 가는 중에 진통이 시작되었다. 안내양은 떨리는 목소리로 승객들에게 도움을 호소하였다. 여자들이 웅성거렸는데도 내 귀에는 무슨 소리인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부산역에 내렸다. 택시를 타고 국군통합 병원으로 달려갔다. 군번을 말했더니 헌병이 병실로 안내해 주었다. 월남전에서 부상당한 환자들이 즐비했다. 일 년 만에 남편은 휠체어를 타고 나타났다. 움푹 들어간 눈은 나를 바라보지 못하고 먼 산을 향했다. 두 시간 면회하고 돌아오는 기차 안으로 붉은 달빛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남편은 군에서 일 년 동안 재활 치료를 했는데 의사가 군 생활이 어렵다고 진단을 했다. 실낱같은 희망은 끊어졌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남편의 재활을 위해 친정에서 돈을 벌었다. 한 달에도 몇 번씩 편지로 회복 상태가 좋아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어느 날 차라리 죽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편지를 읽고 나는 걱정이 되어 몇 날 며칠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휴가를 내서 면회를 하러 갔다. 그의 얼굴에는 해거름이 내려앉았다. 목발을 짚고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모습을 보니 현기증이 났다. 그는 이상하게도 나를 만난 반가움보다는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준비해 간 돈을 탈탈 털어 주었다. 그래도 부족했는지 내 목에 걸린 목걸이와 손에 낀 반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통증을 무디게 하는 모르핀 주사를 맞아야 한다며 얼버무렸다. 그 와중에도 병실 친구들은 와이프가 예뻐서 고무신 거꾸로 신겠다는 농담을 하였다. 그날 결혼 패물을 모두 빼서 주고 돌아왔다.


군 병원에서 치료를 했지만 한계라는 통지가 날아왔다. 이병 제대를 한 후에 대학병원에서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한번 해보라며 권했다. 시부모님은 살아온 것만으로도 하늘의 도움이라며 좋아했다. 집에 돌아와서 남편은 다리 절단 수술을 거부하였다. 대신 문밖 출입을 하지 않고 매일 술통에 빠졌다. 폐인이 되어가는 동안 심한 갈등으로 보따리를 쌌다 풀었다 반복했다. 천주교에서 관면혼배 때 신부님이 하시던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다.’는 말씀은 나를 주저앉혔다. 그런 세월도 흘렀다.


결혼 25주년이 되던 날, 남편에게서 삐삐가 왔다. ‘여보, 우리 외식하자.’ 모처럼 만에 딸과 아들이 좋아하는 갈비를 원 없이 먹었다. 아이들이 잠든 사이 남편은 내 손가락을 잡아당겼다. 예쁜 포장지를 떨리는 손으로 벗겼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환하게 웃었다.


“면회 와서 당신이 패물 다 빼주고 갔잖아. 돈 벌면 제일 먼저 해주고 싶었는데 많이 늦었어.”


봉투에 십만 원을 쥐여 주며 친정 가서 기다리라고 했던 그날처럼 오늘도 따뜻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들이 입대 영장을 받았다. 대학 2학년 2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갔다. 그때 우리 집은 외환위기 직격탄을 맞았다. 아파트를 재건축하던 중이었다. 입주금 연체이자를 내고 나면 돈이 없었다. 날이 갈수록 살아가기가 녹록하지 않았다. 딸과 아들이 기죽을까 어려운 형편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가족들이 고통 분담을 하고 알바를 하러 다녔다. 입대하는 아침이었다. 아들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마당 한쪽에 멀찌감치 물러서서 벚꽃잎을 따서 입에 물었다. 그런데 마음은 두 갈래였다. ‘훈련소까지 따라갈까. 아니면 출근을 해버릴까.’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입안에서 단내가 나도록 꽃잎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님, 이것 받으세요. 입대하면 생필품 다 공급받는다고 선배들이 말해 주었어요.”


봉투를 엄마 손에 꼭 쥐여 주었다. 따라오지 말라는 손사래를 치며 쏜살같이 달려갔다. 잘 다녀오라는 말 한마디 못한 채 넋이 빠졌다. 한참 만에 눈물이 났다. 그러고 보니 손에 편지가 있었다. 뒤통수도 보이지 않는 그에게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아들이 주고 간 30만 원이 든 봉투를 들고 무거웠던 마음을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그래, 배곯지 말고 군대서 잘 견뎌라.’ 그 돈은 방학 때마다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것이었다. 피눈물이 났다. ‘엄마가 되어서 차비는 못 줄망정 이 돈을 받다니….’ 그러다가 내 마음 편하기 위해 감정을 수습했다. 제대하면 이 돈을 몇 배로 불려서 갚아 주리라, 마음을 먹으니 위로가 되었다. 그런데 돈이란 놈은 발이 달렸는지 순식간에 다 달아나 버렸다. 며칠 동안 죄책감에 시달렸지만, 제대하고 돌아오도록 까맣게 잊고 말았다.


한나절을 책꽂이 앞에서 보냈다. 기차 소리가 칙칙폭폭 들린다. 아들의 편지 봉투를 들고 얼굴이 붉어진다. 두 남자한테 수십 년 간격으로 봉투를 받았다. 부자지간이 듣지도 보지도 않은 일을 그대로 재현했다. 이런 것을 보면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 아니랄까 봐 똑같은 행동을 하다니. 편지를 빳빳하게 다림질해서 사진첩에 끼웠다.


가은역에서, 그리고 대문 앞에서 손에 땀을 쥐고 서성거린 순간이 소환되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말해주리라. 내 인생에 가장 큰 선물은 부자간의 마음이 담긴 돈 봉투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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