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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점순 May 07. 2024

작은 오두막집

작은 오두막집

   40년 전 시린 기억이다. 그날도 무거운 마음으로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갔다. 딸과 아들은 어제 일은 잊었는지 아무 일도 없는 듯 마당에서 신나게 뛰어논다. 엄마 없는 동안 조용히 놀라고 했는데 말을 듣지 않아 주인집에서 이사 나가라고 했다고 어젯밤에 야단을 쳤던 일이 마음에 걸렸다. 신부님에게 성사를 보기 위해 고백소 문을 열었다. 고백성사를 보고 보석으로 주신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치 오색 무지개 사이로 별들이 한꺼번에 내 머리 위로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아침부터 감동과 감사함이 출렁거렸다.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튿날 성당반 모임에 가자고 구역장님이 찾아왔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따라나섰다. 찬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판잣집에 도착하니 먼저 온 자매님들이 환영해 주었다. 삼십 명이 넘는 신자들이 성경책을 읽고 나눔을 하는 동안 따뜻한 형제애가 느껴졌다. 점심은 된장찌개와 김치와 깍두기가 전부였지만 소박한 밥상이 허기진 영혼까지 든든하게 채워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집이 같은 방향인 할머니 한 분과 동행을 했다. 나를 새댁이라 부르며 이 동네로 언제 이사를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때다 싶어 셋방살이하며 겪는 하소연을 털어놓았다.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시다가 생각난 듯 산동네에 작은 오두막집이 부동산매물로 나왔다고 그 집을 사서 이사 오면 좋겠다고 하셨다. 순간, 귀가 뻥, 뚫렸다. 고백소에서 신부님이 하시던 말씀이 현실로 이루어질 듯했다. 하느님이 우리 가족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시는 걸까? 퇴근한 남편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오죽 울고 짰으면 신부님이 그런 말을 했을까 하며 핀잔을 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마음속에는 이미 작은 오두막집을 선물로 받았다는 강한 믿음이 생겼다.


  “자매님, 하느님께서 곧, 집을 마련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예, 믿겠습니다. 고백소를 나오면서 나의 오두막집으로 이사하는 상상을 했다. 한껏 부푼 마음이라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다음 날 할머니가 알려준 집 약도를 마음속으로 그리며 찾아갔다. 손이 떨려 간신히 초인종을 눌렀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이를 어쩌나. 내일 집을 구경시켜 준다고 해놓고 급한 일이 생겼나, 아니면 남편 말대로 내가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는 것일까.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돌아오는 발길이 휘청거렸다. 부푼 설렘이 물거품처럼 사그라지나 싶어 안달이 났다. 이틀 후 할머니를 또 찾아갔다. 나를 보자 아들 집에 다녀왔다며 작은 오두막집을 보여주었다. 셋방살이하는 것보다는 백번 좋을 것 같아서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썼다. 전세금으로 잔금을 치를 생각에 기쁨이 벅차올랐다.


  30대를 돌아보면 나는 순박하고 내성적이었다. 남편은 건설회사에 다녔는데 월급은 몇 달 치씩 밀렸다. 쌀독에 쌀이 떨어져도 이웃집에 한 바가지를 꿔 달라는 말도 못 했다. 전세를 살고 있는 집에서 주인은 6개월마다 방세를 올렸다. 빚을 낼 곳이 없어 이사를 가려고 단독주택 처마 밑에 부엌 딸린 방을 계약했다. 주인집에도 고만고만한 아들딸이 있어 좋아했는데 막상 살아보니 아이들끼리 은근히 텃세가 심했다. 혹시라도 주인 눈 밖에 날까 봐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었다. 어린것들을 예쁘게 보아 달라고 머리를 조아려도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예방책으로 명절에 소고기 한 근과, 설탕 3kg을 인사로 드리고서야 겨우 마음이 놓였다. 

  당시에는 아이 세 명이면 방 구하기가 어려웠다. 옆집 친구는 극성스러운 아들만 세 명이라, 두 명이라고 속이고 이사 후에 막내를 데려왔다고 했다. 그쯤에 시부모님이 병환 중이라 새벽 기차로 내려갔다가 돌아오면 한밤중이었다. 7살 딸과 4살짜리 아들이 차려놓은 밥도 먹지 않고 엄마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다. 새벽녘에 어깨를 들썩거리며 이불 속에서 울었다. 깜짝 놀라서 왜 우느냐고 했더니 딸이 입을 삐죽거리려 대답을 했다. 동생하고 놀고 있는데, 안집 오빠가 쫓아와서 시끄러워 못 살겠다며, 너희들 내일 당장 이사 나가라고 했단다. 내 품에 파고드는 아이들을 끌어안았다. 얼굴에는 눈물범벅이 되었고, 천장에 매달린 흐릿한 형광등 불빛이 고무줄처럼 늘어지다 오그라드는 밤을 새우며 아이들과 동요를 불렀다.


  문간방에 세들어 사는 처지라 주인집과 공용화장실을 사용했다. 얘들이 제 때에 이용을 못해 바지가 칙칙하도록 종일 오줌을 지렸다. 집이 없는 설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어린 자식들이 무슨 잘못이 있나. 무능한 부모를 만나서 고생을 시킨다는 자책으로 가슴을 쳤다. 곤하게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니 엄마가 죄인 같았다. 한 잠도 못 자고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날을 지새웠다. 내일 당장 쫓겨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눈앞이 캄캄했다. 그날 성당에 가서 신부님에게 고백성사를 보고 보석 같은 말씀을 받고 생에 처음으로 내 집을 살 수 있었다.


  한 달 만에 작은 오두막집으로 이사를 했다. 큰마음 먹고 방앗간에서 시루떡을 두 말 쪄서 집집마다 돌렸던 때를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살다 보니 위기는 호기였다. 그날처럼 절박한 상황에 놓이지 않았다면 집 장만을 못했을 것 같다. 이웃들과 처마를 맞대고 어울려 사는 곳에 행복이 있었다. 하느님이 신부님을 통해 하신 말씀을 굳게 믿었더니 그대로 이루어졌다. 우리 가족은 작은 오두막집에 둥지를 틀었고, 딸과 아들이 성장하는 동안 미래에 대한 꿈을 꾸었다. 달동네에서 오래 살다 보니 낡은 집을 재건축하게 되어 햇볕 동네로 탈바꿈되었다. 새로 입주하게 된 아파트는 대형 평수로 당첨이 되었다. 이 집에서 아들을 출가시켰고 딸도 시집보낸 후, 손주들이 줄줄이 태어났고, 귀여운 재롱을 지켜보며 인생의 보람을 찾았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삶의 의미가 되었다. 작은 오두막집은 가족들의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그날 고백소에서 신부님이 주신 회개의 보석은 기적을 일으켰다. 나를 굳건한 믿음으로 이끌어 준 신부님, 손목을 잡아끌어 집을 사게 해준 할머님과는 오랜 세월 정을 쌓았다. 살아갈수록 잊을 수 없는 특별한 일이라 항상 그리움에 사무친다. 나도 누군가의 시린 손을 잡아주고, 꿈을 심어주고, 사랑을 베풀어 싹을 틔우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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