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동서의 언덕

by 최점순

버스가 고속 도로를 시원하게 달린다. 봄볕에 삼라만상이 연녹색으로 물들이고, 벚꽃이 한 박 눈 내리듯 휘날린다. 문경 석탄 산업이 꽃을 피웠을 당시는 칠 남매가 한 지붕 밑에 살았는데 탄광이 폐광이 된 후 직장 따라 타지로 떠났다. 명절이나 시부모님 기일에 가족들이 모이는 연례행사가 되었다. 한 때 가장 중요한 에너지 자원인 석탄에서 석유로 변함에 따라 사항 길에 들어섰다. 겹겹의 세월이 흘러도 잊힐 수 없는 추억의 장소이었다.

농번기의 시골 행 버스에는 승객이 거의 없다. 몇 명이 널찍하게 타고 가니 룰라 랄 라 달렸다. ‘형님 저는 버스를 탔어요.’ 맏동서는 작은 동서가 온다는 전화를 받고 유모차를 밀고 나왔다. 반가운 재회를 한 후 형님이 가꾸어 놓은 텃밭에서 냉이와, 시금치, 달래를 캐고 된장국을 구수하게 끓였다. 그녀는 밥상을 받아놓고 씩, 웃으며 “평생 내가 밥상을 차렸는데 자네가 차려준 밥상을 받으니 정말 맛있다. “이참에 내 며느리 할래.” 호호호 웃으셨다.

세월이 흐를수록 맏동서의 언덕은 부슬부슬 흘러내렸다. 한 때는 작은 동서 4명과 시누이까지 출산할 적마다 산부인과 의사처럼 노련하게 아기를 받고 탯줄을 잘랐다. 아침이 되면 새끼줄을 꼬아 대문 양쪽에 묶어 그 사이에 숯과 고추를 번갈아 끼워놓았다. 손수 받아준 아기의 탯줄을 이어 놓으면 운동장 한 바퀴 돌렸을 것 같다. 밤중에 아기 한 명만 울면, 신호를 받은 말복 매미처럼 응 앵, 온 동네를 깨웠다.

그때는 다섯 동서들이 한 지붕 밑에 살면서 화장실 문제였다. 출근 시간에 맞추어 줄을 섰던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서로 다른 문화 차이로 재미도 있었다. 사근사근 알심이 있는 동서, 순박한 동서, 천방지축 날뛰는 동서, 고자질하는 철부지 동서 등. 다양한 개성을 마음껏 발휘하였다. 대가족들의 밥상을 차리면 백화점 진열 코너처럼 마루에 한가득 했다. 설거지를 잘하고 유머 감각이 뛰어난 동서들이 자신의 순발력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맏동서는 집안을 편안하게 질서를 잡기 위해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고 엄격한 중립을 지켰다. 동서들을 칭찬과 따뜻한 사랑으로 타일러 가며 일을 못해도 자네가 최고야! 했다.

세월이 흐르고 흘렀다. 큰 시숙은 월남전에 파병되었다가 돌아온 후에 시름시름 앓았다. 나는 객지에서 바쁘게 살다 보니 평소에는 걸음이 뜸했고 명절이나 이름 있는 날에만 얼굴을 내밀었다. 그 시절에는 한 달에 벼 몇 가마니를 방아 찧어 놓고 돌아서면 쌀독이 금방 비었다. ‘새 중에 먹새가 제일 크다.’는 말이 실감 났다. 대가족 먹고 입는 치다꺼리가 빨래와 집안일이 매일 태산 같았다. 시아버지는 흰 바 지저 고를 즐겨 입으셨다. 맏며느리인 그녀는 시아버지 옥양목 바지저고리에 풀 먹여 반들반들하게 해 놓으면, 하루에 몇 벌씩 갈아입고 아궁이 고치는 흙일을 했다. 실은 내식 한번 하지 않고 묵묵히 소리 소문 없이 준비해 놓았다 그때를 돌아보면 맏며느리의 책임에 힘들었을 동서가 마음이 짠해진다. 그 사이에 시어머니의 건강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급한 상황이 수시로 발생했다. “삐요, 삐요.”

구순을 앞둔 시어머니였다. 오랜 지병을 앓다가 의식불명이 되어 구급차에 실려 갔다. 형제들이 모두 어머님의 건강을 지켜 드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병원에서 치료 한 달 후에 의식이 돌아왔지만 “엄마 보고 싶어.” “배고파.”라고 졸라댔다. 치매가 깊어지면서 “한 부모는 열 자식을 거느려도” “열 자식은 한 부모를 모시기 힘들다.”는 말처럼. 잘 모셔도, 못 모셔도 말이 많은 정글 같은 집안이었지만, 맏며느리 역할을 마음껏 발휘하여 신앙으로 화목하게 다독였다.

대가족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주느라 숨 가쁘게 달려왔다. 평생 손끝에 물마를 사이 없이 동서분주하며 삼시 새끼 밥하고, 상을 차리고, 빨래하고, 바느질하고, 농사일까지 일에 치여 살았다. 맏동서의 헌신적인 사랑 덕분에 칠 남매 형제들은 결혼하고 도시에서 둥지를 틀고 자식들과 살아간다. 모두 객지에 살다 보니 명절이 되어야 한두 번씩 큰 집이라고 들락거렸다. 동서는 소문난 효부였다. 병환 중인 시어머님을 정성껏 돌보셨지만 몇 년 동안 치매를 앓다가 회복하지 못하고 소천하셨다. 뒤이어 노모의 치매 수발에 진액이 빠진 시숙님도 시어머님을 따라 시름시름 앓다가 2년 후에 안타깝게도 돌아가셨다.

석탄박물관이 폐광이 된 후 박물관이 되었다. 거미 열차를 운영하고 땅굴을 수 백 마일을 달려 밖으로 나왔다. 맏동서는 왕거미처럼 자신이 모든 진액으로 실을 뽑아 시동생, 시누이들의 비빌 언덕이 되어주었다. 혼자 살고 있는 낡은 고택도 물러진 흙더미처럼 서서히 허물어진다. 종가 집 며느리로 한 평생 살아냈던 중압감을 지탱하느라 마디마디가 휘었다. 바위 같은 언덕이었지만 옆으로 스르르 쓰러지려 한다.

큰 바위 같은 맏며느리였다. 그 언덕에 의지하여 형제들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여러 동서들이 힘과 마음으로 모아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사랑의 돌과 우애의 흙을 섞어 축대를 쌓아 후손들에게는 더 견고한 언덕을 물려주어야 할 때가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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