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간다. 변화무쌍한 날씨에 따라 사람들의 옷차림도 바뀐다. 출, 퇴근 러시아워를 피해 전철을 탔다. 승객들은 경쟁 사회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듯 매일 다람쥐 쳇바퀴를 돌 듯 같은 노선으로 타고 내리며 직장에 출근을 한다. 마스크를 눌러쓰고 까만 눈동자는 핸드폰 화면을 응시하고 엄지 검지로는 가면극 연극배우들이 대사를 외우는 것처럼 보인다. 옛날에는 전철이 없어었다. 남편 월급 타면 가족들이 먹을 쌀과, 토큰을 사놓았다. 어쩌다가 떨어지면 윗집에서 꾸어 쓰고 값았던 정이 생각난다.
오십 대 초에( IMF)가 쓰나미처럼 덮쳤다. 노후된 아파트를 재건축하던 중에 은행돈줄이 막혔다. 조합원들의 명예퇴직으로 입주금을 내지 못해서 공사가 중단 위기에를 놓였다. 가족이 한마음으로 고통분담을 했지만, 연체이자를 내기는 역부족이었다. 큰 건설회사가 부도를 내자 작은 하청 업체들도 도미노 현상으로 줄도산을 했다. 평생 내 집 한 채를 꿈꾸며 살아왔는데, 깡통주택이 될 지경에 놓였다. 평생 전업주부로 살았지만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 연탄배달이라도 해야 할 형편이었다. 컴퓨터 회사에 비정규직으로 취업을 했다. 그동안 안일하게 살아왔던 민낯을 가려줄 철 가면으로 무장을 하였다,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가슴 아픈 사고 현장이 실렸다. ‘수도권 전철 1호선 독산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점검하던 남성 노 모 씨(당시 25세)가 작업용 열차에 치여 사망, 성수역 방음벽 작업 인부 사망사고와 마찬가지로 구의역 스크린도어 정비업체 직원 사망...’ 예나 지금이나 정규직원은 졸이고 하청업체의 비정규직 직원들을 뽑아서 경험이 부족한 젊은 청년들이 항상 위험에 노출된다. 책임자들은 가면을 쓰고 뒤로 한발 물러 섰다. 아무도 사고의 책임을 질 사람이 없는 현장에는 꽃다운 젊은 사람들에게 반복되는 인재가 발생했다. 시민들의 발인 전철의 안전은 누가 지켜 줄 수 있을까.
22년 전 1997년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치고 고금리 정책으로 은행들이 도산을 했다. 시중은행의 금리를 연 기준 29.5%까지 올랐으니 대출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다음 달에 낼 입주 분담금 걱정에 눈앞이 깜깜했다. 막상 내가 돈을 빌려야 할 상황이 되니 주위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고독한 시간을 견뎌내기 위해 미소로 가면을 썼다. 시시때때로 걸려오는 은행 직원들의 협박 때문에 두려움에 하루빨리 극복해서 고통의 시간이 지나갈 수 있도록 처절한 소망이었다.
그런데 죽으라고 일을 해도 급여가 정규직 반도 되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해고 첫 순위가 비정규직이었다. 너무 황당해서 고용노동부로 찾아가서 상담을 하다가 깜짝 놀랐다. 여직원이 켜놓은 컴퓨터 화면에는 회사에서 넘겨진 나의 신상정보가 고스란히 있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인심이 변해간다 해도 이 정도인 줄은 처음 알았다. 모범사원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할 때는 언제고 근태를 트집을 잡아 내보내다니... 고용노동부 직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회사 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를 했다. 왜, 부당하게 해고시켜서 실업급여도 받지 못하게 하였느냐고요. 탈을 바꿔 쓰는데 달인의 대답에 황당했다. 직장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인데, 몇 년 동안 회사에서 벌어먹었으면 보은(報恩) 하는 셈 치고 넘어가야지라며 호통을 쳤다.
머리 위에 천장이 빙빙 돌았다. 손에 들고 있던 전화기를 노동부 여직원에게 건네주었다. 얼떨결에 전화를 받은 여직원이 “안녕하세요. 여기는 고용노동부입니다.”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급반전이 되었다. 명주실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전화기 구멍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아하, 사실은 사무 착오로 아끼는 직원이었는데 다시 복직을 시키려고 노력 중이라는 감언이설로 설명을 했다. 옆에서 듣자니 금방 태도 변화도 변화지만 나를 죽은 사람처럼 취급해버렸다. 순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어느 행성에 떨어진 외로운 별처럼 참담한 심정으로 흐릿한 형광등 불빛만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인생의 위기는 기회였다. 평생 전업주부로 살다가 강철처럼 단단한 여전사로 거듭 태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쳐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딸이 약혼하고 새 아파트에 입주하면 결혼을 시키기로 계획을 세워 놓았지만, 사돈댁과 의견 불일치로 딸 가진 죄인의 가면을 쓰고 그쪽 의견을 존중했다. 산더미 같은 빚을 끌어안았지만, 딸에게 선물을 주는 간전한 엄마의 심정으로 우아한 한복을 차려 입고 남편과 나란히 혼 주석에 앉아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꼬리표처럼 외환위기 후유증이 따라다녔다.
인생은 살아가 수록 산 넘어 산이었다. 절박했던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딸은 결혼 초부터 문화 차이, 성격차이로 아웅다웅했다. 어느 날 도저히 더 이상은 참고 견딜 수 없다며 가방 들고 친정으로 달려올 적마다 얘야, 인생이란, 다 그렇게 사는 거란다 라며 타일러 돌려보냈다. 엄마의 인생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저도 비법을 터득했는지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갔다. 그런 고단한 삶이었지만 외손자들이 년 연생 세 명이 태어났다. 귀여운 인 꽃을 키우는 동안 쓴 나물을 씹는 고통은 꿀꺽꿀꺽 속으로 삼켰다. 그렇게 저렇게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약한 부분을 보안해가면서 살았다.
모든 사람들은 가면을 쓴다. 많은 사람들은 다양한 직업이나 기분에 따라 가면을 썼다가 벗었다 한다. 나도 살아오면서 수 천 개의 가면을 쓰고 살아왔다. 어린이나, 어른이나, 낯선 사람이나, 친분이 있는 사람이나, 상황에 맞추어 주기 위해 그럴듯한 포장을 하면 부드럽게 살 수 있다. 사십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이 있다. 내 모습은 남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늘 신경이 쓰였다. 성격이 소심해서 티는 역할은 못하고 어느 단체나 모임에 가도 조연 역할을 많이 했다. 주어진 배역에 충실했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을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은 주역이 되어 관객들의 박수를 받고 싶을 때가 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고 베풀어 준만큼 뒤돌아왔다. 인생의 무대에서 일인 다역을 하는 동안 긍정적인 마인드의 노하우의 쌓을 수 있었다. 그때 고생으로 수업료를 지불했다고 생각하니 살아 볼만했다.
생명체들은 환경에 따라 변해야 살아남는데 유리하다고 한다. 평생 한솥밥을 먹고, 같은 불을 덮고 사는 부부간에도 적당한 가면이 필요했다. 이제는 겹겹이 쌓였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살고 싶다. 누가 나의 칼라를 존중해 주고, 나와 다른 그의 칼라를 내가 존중해 줄 수 있는 사람이면 된다. 그런 사라이 옆에 있으면 차 한 잔을 함께 마셔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고, 마음 편하게 진솔한 소통을 할 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지 않을까. 위드 코로나로 전환되길 간절하게 바란다. 이년 동안 코로나 19 전국에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 자연을 사랑하고 동물들과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은 만들어야 할 것이다. 미래에는 전철 승객들의 다양한 마스크처럼, 칼라 가면이 문화로 자리매김을 하는 시대가 오지 않까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