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남편과 저녁을 먹으려고 상을 차려놓고 기다렸다. 그런데 금방 도착한다고 메시지가 온 지가 언제인데 감감 소식이었다. 그때였다. 따르릉, 핸드폰이 울렸다. 남편 전화였다. 다짜고짜, “여보, 압력밥솥에 물을 잡는 것을 좀 알려주시게?” 이분이 잠자다가 봉창을 두드리시나. 너무 황당해서 “그건 왜, 물어요.” 음, 한참 뜸을 들이다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딸이 갑자기 야근이라며 아빠에게 강아지 산책시키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 밥 좀 챙겨 먹이라고 sos 왔다고 했다. 남편은 마치 복권 당첨된 사람처럼 들떠 있는 목소리를 듣고 할 말을 잃었다. 젊은 시절 집안일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던 날들이 당겨왔다.
결혼 후, 경상도 특유의 보수적 상남자를 자처하며 살아왔다. 크고 작은 집안 대, 소사로 東西奔走해도 여자들이나 하는 일을 남자에게 시키다니, 날, 뭘 로 봐. 도리어 화를 내고 딱 잘라 거절했다. 내가 놀고먹는 사람이야, 회사 가면 위, 아래로 치여서 얼마나 힘이 드는지 당신은 잘 몰라. 김장철에 힘 좋은 팔로 마늘이라도 좀 찧어달라고 하면 못 들은 척 밖으로 휭 나가버렸다. 혼자 며칠 동안 부글부글 가슴앓이를 할망정 넘어갔는데, 압력솥에 밥물 맞추고, 세탁기 세제를 몇 수 푼 넣느냐고 묻는 말에 은근히 심통이 났다. 여보, 쌀을 씻어 밥솥에 넣고, 네 손가락 사이에 물이 잠기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남펀은 딸 바보다. 잠자다가도 도움을 청하면 벌떡 일어난다. 그날도 남편은 친구 모임을 다 접고, 버스와 전철을 몇 번씩 갈아타고 신길동 외 손주들이 기다리는 집에 도착했다. 초등학교 다니는 년연 생 삼 남매가 헐레벌떡 현관문을 여는 외할아버지에게 배고프다며 울상을 지었다. “할아버지, 쫄쫄 굶어서 배고파요.” “아, 그랬니? 너희들 배가 많이 고프겠구나. 내가 맛있는 짜장면 사줄게.” 손주 세 명이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며 엄마는요, 툭, 하면 중국집 가락국수, 짜장 시켜 주어서 먹기 싫어요.” 할아버지, 제발 따끈한 밥해주세요.” 애원하는 눈치였다고 설명을 했다. 딸한테 수시로 호출을 받으면 아랫도리에서 요롱 소리 나도록 뛰어다녔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이제는 전업주부 이상으로 청소하고, 밥하고, 세탁기 돌리는 선수가 되었다. 특히 딸네가 애지중지 여기는 두산이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일은 남편이 아니면 아무도 할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이었다. 미리 동창회 간다고 남편에게 저녁은 딸네 집에서 외 손주들과 맛있게 드시라고 말해 두었다. 모처럼 만에 만난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다가 늦게 집으로 왔다. 띠, 띠.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역한 라면 냄새가 집안에 진동을 했다. 부엌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편이 티셔츠와 짧은 반바지를 입고 앙상한 다리로 엉거주춤하게 섰다. 싱크대 옆에 김치 한 조각을 놓고 라면사리 몇 가닥을 젓가락으로 끌러 올리는 참이었다. “여보, 당신 외 손주들과 저녁 드신다고 하셨잖아요.” “아참, 그랬나.” “ 오늘은 애들이 피자와 통닭이 먹고 싶다고 해서 세 마리 사주었더니, 게 눈 감추듯 먹었다고 했다.” “당신도 닭다리 하나 뜯지 그랬어요.” “새끼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바라만 봐도 나는 배가 불러서..” “오호, 군침만 흘리시다가 쫄쫄 굶고 집에서 라면으로 떼 우시는구려.” 빈정거리듯 한마디 날리고 돌아서는데, 은빛 머리카락 밑에 쭈글쭈글한 주름이 목덜미를 덮고 축 처진 어깨 사이에 시선이 꽂혔다.
갑자기 속에서 뜨거운 무엇이 치밀어 올랐다. 울컥울컥. 젊어서는 운동선수라서 튼튼하게 다져진 몸이었다. 그러나 평생 처자식을 먹여 살리느라 자신의 등뼈가 휘어지는 것도 잊어버린 그였다. 아침부터 밥하고, 청소하고, 세탁기 돌리고, 어린 손자들 간식까지 챙겨주느라 하루해가 너무 짧았다. 집으로 오기 전에 강아지 우울증 안 생기게 하려면 밖에 더리고 다니며 산책을 시켜주고 목욕까지 개운하게 해 주어야 한다나. 세상 별일 다 보지 개가 상전 노릇하는 세상에 살게 될 줄이야. 이 세상 모든 부모는 자식에게 바보가 되는 것일까. 목을 뒤로 젖히고 냄비 속에 남은 국물을 입속에 들어부었다. 아, 국물 맛이 시원하다며 싱겁게 웃는 멋진 우리 남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