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간의 외출
불청객 바이러스는 삶의 질서를 바꿔놓는다. 삼순이가 되었는데 덤으로 주어진 여유로움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전시관, 음악 감상도 하고, 책도 읽고, 글을 써본다. 젊은 시절에는 시간에 쫓겨 정신없이 살았다. 기회가 되면 내 마음 가는 대로 여행을 다니고 싶었다.
집을 떠나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아 늘 망설였다. 어렸을 적부터 조용한 곳에서 사색하는 것을 좋아해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어디로 갈지 계획도 세우지 않고 가방부터 쌓아 놓았다. 남편의 일주일 치 국과 반찬을 준비해놓았다.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를 탔다. 혼자 가는 여행이라 두려움과 설렘으로 두근거렸다. 창밖에는 진녹색 풍경이 스쳤다. 낯선 시골 정거장에 내려 주변에 있을 법한 민박집을 찾아 나섰다. 부엌이 딸린 방을 구했다. 등산 가방에 챙겨온 짐을 풀어놓고 한적한 오솔길을 걷다 보니 지나간 시간이 아슴아슴 떠오른다.
무엇을 위해 들소처럼 앞만 보고 달려왔을까. 남들보다 특별한 것을 이룬 것도 없다. 어른 들이 어릴 적에 주입해 놓은 여자의 일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동안 일상이라는 틀에 갇혀 탈출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재래시장에 갔다. 빨간 사과, 누렇게 익은 감, 야채, 안동 간 고등어 한 손, 불고깃거리 한 근을 샀다. 소박한 밥상을 차리기 위해 낯선 부엌에서 뚝딱거리며 반찬을 만들었다. 혀끝으로 밥알을 낱낱이 새어보는 듯 씹고 또 씹다 보니 단맛이 느껴진다. 민박집 할아버지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강변을 싱싱 달려간다. 제철을 만난 금계국꽃이 나를 반겨주니 오랜 친구처럼 느껴진다.
그동안 남편의 아내, 자식들의 엄마, 손자들의 할머니로만 살았다. 인생은 일회성이어서 젊음은 잠시 지나가고 얼굴에는 주름이 덮이고 머리에는 서리가 내렸다. 칭얼거리는 마음속 아기는 돌봐줄 여유가 없어 눈을 감지 않았을까.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펑펑 쏟아진다. 가슴 밑바닥에서 해결하지 못한 인간관계의 매듭들이 쉼 없이 숨통을 눌러 대곤 하지 않았나. 그 힘든 순간들을 계곡폭포처럼 시원하게 쏟아져 나올 수 있도록 멈추지 않고 울었다. ‘그래, 지금부터 내 인생의 르레상스를 맞이한 듯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인생을 다시 살아보는 거야.’ 그렇게 위로해주니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문득 집에 홀로 남아 있을 남편 생각이 났다. 자식들은 출가하고 밥을 함께 먹으며 내 옆을 지켜주는 든든한 지원군이다. 젊은 시절 뾰족한 모서리를 깎아내느라 서로 좌충우돌 부딪혔지만 미우나 고우나 긴 여행길에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핸드폰 메시지로 여행길에 오르기 전날 금일봉을 숨겨둔 곳을 알려주었다. <여보, 당신 서랍에 넣어 둔 돈으로 친구들과 맛있는 외식하세요.>라는 문자를 받고 싱글벙글할 남편의 얼굴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본다. 남은 시간은 덤이라 생각한다. 50년 전으로 시곗바늘을 돌려놓는다.
나의 삶도 한 편의 드라마처럼 지난하게 살아냈다. 여행지에서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써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창가에 앉아 상상의 날개를 펴고, 시인이듯, 소설주인공인 듯 마음속으로 그림을 그려보았다. 기억의 창고에는 슬픈 옹달샘이 숨어 있었는지 끝도 없이 고였던 삶의 노폐물이 솟아나온다. 정글처럼 빼꼭하게 들어선 욕망의 허상들로 햇볕과 바람이 스며들지 못했다. 복잡한 머릿속을 과감하게 정리하기 위해 떠오르는 생각을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졌다. 그때 상황으로 되돌아가서 풀지 못했던 매듭들을 펼쳐놓고 독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읽어 내려가니 기적이 일어났다. 상대방 탓으로 돌렸던 시간들이 곰삭아졌는지 옹졸한 내 탓이라는 생각이 든다. 좀 더 일찍 그쪽 입장을 고려해보았더라면 좋았을 것 같은 회한이 든다.
집을 떠나오니 여행기행문을 써보고 싶다. 나는 새롭게 거듭 태어나는 계기가 될 것 같기도 하다. 이참에 어릴 적 꿈꾸었던, 시처럼, 소설처럼 낭만이 넘실거리는 곳으로 돌아가서 내가 원했던 삶을 시작해 볼까나. 인적이 드문 시골이라 외로움을 타는지 초등학교 시절 좋아했던 친구를 상상해보았다.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순간적으로 그 시간으로 훌쩍 뛰어넘어가는 듯했다. 온통 자유로운 생각이 콩닥거리는 가슴에서 모락모락 피어 올렸다. 돌아보니 때로는 나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바늘구멍처럼 좁다가도, 바다처럼 넓어져서 세상을 다 품을 듯했다. 높은 창공을 올려다보니 파란 하늘가에 무수한 별들이 반짝거린다. 나의 별은 어디 있을까. 은빛일까, 분홍일까 아니면 파란색일까. 이름도 잃어버리고, 꿈도 삶의 뒤안길에 묻혀가는 동안 칠십이 되었다. 아직도 습관적으로 굳어진 사고로 무엇 하나 관대하지 않다. 어떻게 하다가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 유행하는 옷도 선뜻 사지 못하는 바보가 되었을까. 모든 것을 누구에게 양보했는가. 그들은 별스러운 짓을 하는 헛헛한 내 마음을 알기나 할까.
뭇 새들이 재잘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강물로 세수하니 뽀득뽀득 소리가 난다. 풀 섶에는 작은 들꽃들이 자신의 독특한 향기를 발산하고, 제철 만난 메뚜기도 이슬 밭을 뛰어다닌다. 통이 큰마음으로 브랜드 옷집에서 체형에 맞는 옷과 예쁜 구두도 샀다. 화장품 가게에서 빨간 립스틱 바르고 거울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비록 얼굴에는 잔주름이 덮여도 볼이 발그레한 새색시처럼 물든다. 일주일간의 외출이 나를 바꾸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