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Squid game 한국 교육

능력주의 내면화

by 시종여일

(인공지능이 아닌 개인의 순수 창작글임을 알립니다)


교육이 지향해야할 본질이 무엇인가? 교육의 어원인 라틴어의 educare는 ‘밖으로’를 뜻하는 e와 ‘이끌어내다’라는 ducare가 합쳐진 말이다. 어원의 의미에 비추어 교육이란 주입식 교육의 반대로 아이의 잠재성을 밖으로 이끌어내어 변화를 도모하는 일의 총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아이의 잠재성이란 것은 획일화되지 아니하고 다양하다. 교육 현장에서는 아이들이 다양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협력적인 보완성(자신과 타인의 능력의 협업)을 배워나가며 전인적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라나 행복한 공동체에 참여하는 일원으로 키우는 것이 교육의 본질일테다.

그러면, 교육이란 어원에 비추어 한국교육을 바라보면 그 현실이 어떤가? 처참하고 천박하고 야만적이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양성은 무시되고 인지적인 변별의 수단으로만 교육이 회칼처럼 휘둘러지기 때문이다. 지필시험, 수능시험은 시험의 내용보다 변별이 우선이다. 내용이 어찌되었든 변별이 안되면 큰 문제이다. 평가는 아이의 성장을 위해 환류되기는 커녕 시험 오류가 혹여 나타날까 이의 제기 기간을 운영하고 그 이후 고이 모셔둔다. 절차적 정의만 중요할 뿐 시험문항에 대해 아이 어른 할것 없이 고민하고 성찰하는 정당한 논의가 지속되지 않는다. 그냥 ‘시험 끝이다!!!’리는 환호성만 있을 뿐이다. 수업은 또 어떤가? 학습내용이 변별에 관여하는 협소한 기술적 지식을 가르치기에 급급하다. 시험범위를 다 가르치면 계속 자습이다. 아이의 성장은 안중에 없고 시험만 잘 대비하면 된다. 변별이 목적인 평가를 위해 달려온 평가의 실상은 정말 기계적이다. 변별이 공평해야 하니 다양한 평가보다 일회적이고 정량화된 평가를 하게 된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수행평가 논술이 어디 논술인가? 그냥 객관적인 정답을 글로 쓰는 형태라고 보면 된다. 여기서 학생 개인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평가계획 및 채점기준에는 사고력, 성실성, 창의성, 논리성 등의 온갖 미화된 역량들을 강조하지만 실상은 논리적이며 창의적인 사고를 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다. 빠른 시간에 문제를 처리할 것을 강요한다. 세계를 선도하는 기업인 구글이니 메타에서 여유로운 근로환경을 강조하는 이유는 시간이 창의성을 위한 촉매제이기 때문이다. 시간적 제약이 있는 상황에서 문제 처리가 우선이 되면 창의성은 쪼그라들게 된다.(무슨 교육부에서는 협력수업, 모둠식 토론 등을 하라고 하지만 ebs 교육방송에서는 수능강의를 하나같이 주입식 교육. 눈 가리고 아웅도 하루 이틀이지? 다양한 수업이 전개되려면 교사들의 수업을 바꾸는게 우선일까? 그냥 소가 웃는다)

획일적인 한줄세우기와 다양성의 말살, 인지적 주입식 교육의 효율성 강조 등의 냄새나는 야만을 그럴싸하게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는 능력주의라는 포장지로 감싸며 매우 공정하다고 꾸민다.(이전 다른 글에서 공정과 공평, 평등고 구분을 못하는 상황을 말한바 있다) 그 포장지 속에 어떤 본질이 있는지는 누구도 궁금해하지도 열어볼 생각도 않게 되었다. 오징어게임에서 주인공 성기훈이 궁금해했던 게임의 본질을 알아내려 할수록 엄청난 희생이 따르는 현실에 우리 교육도 똑같은 상황에 직면해있다.

이러한 승패를 가르는 야만적 구분이 만연하게 된 이유를 입시제도가 근원적 문제라고 누구라도 얘기할라치면, 문제의 본질을 보기보다 비판의 목소리를 앞세운다. ‘수능이 가장 공정하다’라든가 ‘그럼 대안이 있냐?’라든가 ‘누가 입시가 문제라는 것을 모르냐 하지만 그것보다 일단 아이들이 힘든 수행평가를 폐지하자!’ 등의 반론을 제기한다. 교육의 앞서 말한 본질적 측면인 다양성, 잠재성, 전인격성 등을 배제한 입시위주의 교육의 틀안에서만 본다면 게임의 공평성이 공정성으로 둔갑되고 근시안적이고 대증적 처방을 앞세우니 수행폐지! 수능이 최고 공정! 내신 폐지! 등의 얘기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공평한 것이 공정으로 둔갑된 장면을 우리는 목도한다. 가령,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게임에서 누구도 예외는 없다. 정말 공평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공평이 공정일까? 하지만 노약자, 어린아이, 장애인 등 다양성이 무시된 획일화된 게임이 정말 공평할지언정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공정과 공평은 단순한 언어사용의 오류를 넘어서 교육의 본질적 논의를 어렵게 만드는 걸림돌이 된다.

입시의 변별을 앞세우는 교육의 차가운 칼끝에 올려진 아이들의 실상을 보면 더욱 기가 막힌다.


고등학교 1학년 입학후 내신 성적이 안나오면 자퇴후 재입학하는 아이들

수능을 준비하는 경우는 자퇴후 기숙학원에 들어가서 수능을 준비하며 검정고시를 보는 아이들(자퇴가 부적응이 아닌 입시의 수단이 된지 오래이다)

고 3학년 2학기는 입시와 무관한 시기라서 학생들 근태 불량

고 2학년 1학기 내신의 반환점을 돌은 학생들이 이미 내신을 판단해서 공부하는 학생과 공부하지 않는 학생으로 나눠지는 상황

방학때면 지방에서 대치동으로 유학을 와서 호텔에 투숙해서 특강 수강

생기부 맞춤 컨설팅 수강

수행평가가 시기가 몰려서 학부모와 학원의 조력

사회적 배려자 전형을 노린 한부모전형을 노린 이혼

수시 정시 관련 과도한 사교육 및 선행학습

외국인 특례전형을 이용하고자 해외파견 근무나 해외 유학을 하고 돌아오는 아이들

농어촌 특별전형을 농어촌으로 이주하는 아이들


이 모든 것이 한국의 입시제도로 파생된 일들인데

수행평가가 문제라느니! 사교육이 문제라느니! 선행교육이 문제라느니! 아이들 수업태도가 시험 이후 왜 그렇냐!라고 하는 지엽적 상황이 대한 불만들만 속출하는 상황이 정말 개탄스럽다.


나 또한 변별이 목적인 교육을 거쳐왔고, 우열의 관계를 경험하면서 승패를 내면화하고 정당화하였다. 자본이 가속화되어 나를 포힘한 기성세대보다 더욱 승패의 천박한 논리는 더욱 고도화되고 빠르게 전승되고 내면화된다. 마이클 샌델 교수가 능력주의의 폭정(tyranny of merit)이라고 지적한 승자와 패자를 정당화하는 입시와 그 체제에 순응하는 모습이 가히 폭력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기에 '폭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논리가 깊게 뿌리 내려 체제를 정당화하는 이 사회에서 근원적인 게임의 오류를 지적하고 시정될 날이 언제올까? 누가 성기훈이 되어 게임의 본질을 지적하고 체제를 변화시킬까 그런 날이 오길 희망해본다. 아이들이 고통받지 않는 날이 오길 바란다.

어떤 이는 이런 얘기를 할 수도 있다. 우리 아이들이 고통받고 있다고? 힘들다고? 우리 아이들은 잘 살고 있고 한국은 아주 멋진 나라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가진 분들에게

이성복 시인의 ‘그날’ 마지막 구절을 바친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