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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과 자존심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

by 시종여일

(챗GPT가 아닌 순수 창작글임을 알려드립니다)


자존감은 자아존중감을 줄인 말로써 자신을 존중하고 가치있는 존재라고 인식하는 마음이다. 유사하지만 다른 단어인 자존심은 자신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태도를 말한다.

배다른 동생처럼 같지만 다른 단어는 우리가 살아야 하는 방향을 성찰하도록 일러준다.


우선 가식과 위선의 관점에서이다.

실상이 없는 껍질을 허례허식이라고 꼬집었던 공자 선생처럼 실상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낼때 우리의 삶은 행복하다. 공갈빵 같은 인생을 살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극단적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은 세상의 이치이다. 화려했지만 거품처럼 사그라진 운명을 종종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나아가 그 자리가 부귀영화를 가져올 것 같지만 그 자리로 인해 곤욕을 치르는 고위직 인사를 한둘이 본게 아니다. 결국 자리보다 그 자리를 견딜 수 있는 명실상부한 사람인지의 내실이 중요해지는 대목이다. 그런 면에서 자존감은 내면의 존중이 차고 넘쳐 밖으로 유출되어 흘러나온 충만의 산물이다. 이런 유출은 외부의 평가를 용광로처럼 잠식해버린다. 내면의 힘이 큰 사람일수록 외부의 평가에 흔들리지 아니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반면, 자존심은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자신의 안정을 위한 방어선이다. 다만, 이 방어선이 자신의 인격을 진정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가 아닐 때에는 우리들의 처지가 곤궁하고 불행하게 된다. 지킬 것이 없는 방어선은 그 자체가 위선이기 때문이다. 위선의 거짓된 경계가 무참히 무너지고 숨어있던 잠복세력이 나오는 것을 열등감이라고 한다. 또는 그 저지선이 너무도 앞서 나아가 전쟁을 의미없게 만들어버리면 우리는 그것을 자만이라고 칭한다. 어찌되었든 실상이 없는 것을 부풀리는 것은 공갈빵의 운명을 면치 못한다.

다음은 인식의 주체이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가지 평가를 받는다. 평가에 익숙해지다보면 그 평가가 본인의 삶을 규정하게 된다. 특히, 햇병아리 같은 어린 나이에는 분별과 평가에 저항없이 길들여진다. 무균실에서 갓나온 내성 없는 개인은 타인의 평가가 만들어논 물웅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며 살아간다. '삶이 뭐지?'라는 질문이라도 던져볼 수 있는 나이와 여건이 되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러한 삶의 본질적 질문 조차 할 여유를 허락치 않는다. 그저 관성의 힘대로 휩쓸려 내몰려가다가 어딘지 모를 곳에 당도하여 빈가죽의 허탈함만이 자리잡는다. 인생을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런 회한들이 젊은이들의 새로운 삶의 교훈으로 쓰이지 아니하고 개개인들의 소심한 탄식으로 그냥 아무짝에 쓸모없이 희석되고 흩뿌려진다. 무수한 희생자만 난무하는 것이다. (내 삶의 허탈함이 버려지지 않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무엇보다 여러 평가와 분별 중에 가장 중요한 평가는 자신의 평가이다.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과 타인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런 나는 어떤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가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이 부분에서 타인에게 보이고자 했던 외면이 자존심이라면, 자존감은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자신의 본질적 내면이다. 자존심은 철저히 인식되는 주체가 타인에게 내맡겨진다. 그러므로 타인이 누구냐,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판단이 매우 유동적이다. 하지만 자존감은 나의 본연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견고하고 탄탄하다. 그런 점에서 '이생망'이라고 외치는 수많은 소리 중에 망함과 흥함을 누가 규정하고 있는지 진정 물어야 할 때이다.(물건의 스펙, 영어로는 specific 상세설명이라고 하는 것은 나만의 고유성과는 무관한 타인이 규정한 잣대이다. 이런 스펙이란 용어가 인간의 능력과 행복을 규정하는 척도로 일상화되게 쓰이는 세상이 안타깝다.)

마지막으로 희소성이다.

자존심은 누구에게나 있는 안전에 대한 저차원적 보호본능이다. 자존이 무너질 것을 염려한 일종의 안전발송문자같는 것이다. 문자가 와도 대게는 나에게 해당되지 않아 버려지거나 발전가능성을 논하기보다 현재의 상황을 중심으로 판단을 내놓는 즉흥성이 그렇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본인이 판단하여 즉흥적으로 내놓는 극약처방처럼 미리 상황을 염려하여 대처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이 바로 자존심의 알량한 허무맹랑함이다. 그에 반해 자존감은 동물적 차원을 넘어 자신을 사랑하는 인간의 의식이 고양된 감정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의식은 자기보호본능과 달리 희소하다. 세잎클로버가 널려진 곳에서 유사하지만 다른 희소한 네잎클로버를 찾듯 자존심은 널려있지만 자존감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우리 사회, 교육, 어른들은 자라나는 아이들의 자존감을 키우고 있는 것일까, 자존심을 키우고 있을까? 질문에 대한 답변이 없이 어디를 향해 매일 내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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